"12일 오전 8시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친척 일동과 노모(老母)와 3아(三兒)가 나왔다.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눈물도 아니 나오고 감상이 이상스럽다. 자동차로 동래에 돌아왔다. 1년 8개월 전에 보던 버섯과 같은 집, 먼지 나는 길, 원시 그대로 있다. 다만 사람이 늙고 컸을 뿐이다.(...) 아, 아, 동경하던 구미 만유도 지나간 과거가 되고 그리워하던 고향에도 돌아왔다. 이로부터 우리의 전도(前途)는 어떻게 전개하려는고." - <삼천리(三千里)> 1934년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 부산에 도착한 것은 1929년 3월 12일의 일이다. 1927년 6월 19일 부산을 떠나 1년 8개월 가량의 해외여행을 마치고 이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시베리아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지나 유럽 땅에 발을 디딘 그녀는 파리에 머물며,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베를린, 런던, 이탈리아, 스페인을 두루 여행한다. 이후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미국을 횡단하고 하와이를 여행한 후, 태평양을 건너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온다.
한국 근대미술사상 최초의 여성 화가로 알려져 있는 나혜석은 시대를 앞선 여성해방론자이자 문학 작가이기도 했다.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1913년 3월 일본 유학길에 오른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도쿄의 사립여자미술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유학생 사회에서도 드문 여성화가와 여성문인으로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그림도 그림이지만 1918년 <여자계(女子界)>에 발표한 단편 소설 <경희>는 여성의 각성을 촉구하는 당시로선 드문 실천적 작품이다. 귀국 후 3·1운동 시기엔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과 함께 다섯 달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결혼을 약속한 첫사랑이었던 시인 최승구(崔承九, 1892~1917)가 폐병으로 세상을 뜨고 자책하던 나혜석은 1920년 오빠의 소개로 만난 김우영과 결혼하고 이듬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한 남편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다.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국경을 오가던 독립운동가들을 돕기도 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 매년 출품하며 특선에 당선되기도 하는 등 화가로서도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녀의 살아생전 영화와 몰락은 파리를 거점으로 했던 구미여행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당시로선 드문 이 세계여행은 6년간의 만주 임기를 무사히 마친 김우영에 대한 일종의 포상휴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흔치 않은 일이다.
칠십 노모에게 갓난쟁이 어린애를 포함한 세 아이를 맡기는 무리한 선택을 감행하면서까지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이 여행의 끝에 기다리고 있을 처참한 날들을 짐작하지 못했다. 1년 8개월의 세계여행, 파리 체류의 경험은 화가로서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새로운 세계와 사상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지만 대가는 너무도 컸다.
파리 체류 기간에 만난 최린(崔麟, 1878~1958)과의 짧은 연애와 그로 인해 겪어야 했던 세기에 남을 이혼 사건으로 나혜석은 파경에 이르고 만다. 결국 차가운 어느 겨울날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해야 했으니 그녀에게 이 여행은 포상은커녕 독주였던 셈이다. 설령 독주일 것을 알았더라도 그녀는 이 잔을 기꺼이 받아 넘겼을까, 아니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부산의 항구를 떠나는 두려움과 망설임과 설렘이 뒤섞인 그녀의 모습과 1년 8개월 후 부산으로 돌아온, 이전의 그녀가 아닌 전혀 새로운 한 여성의 모습,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푼 꿈이 가득했을 새로운 여성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치울 수 없는 묵직한 바윗덩이 하나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닌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인 그 갑갑함을 견뎌내야 하는 일상이 어떠했을지.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혜석은 기행문을 비롯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삼천리(三千里)> <신가정(新家庭)> <중앙(中央)> <매일신보(每日新報)> <동아일보(東亞日報)> <신동아(新東亞)> <대조(大朝)> <동광(東光)> 등의 지면에 게재한다. 화가로서의 본연의 정체성에 기반한 파리 미술에 대한 경험과 감상을 담은 논평부터 여성의 해방과 생활 개선을 부르짖는 논설, 희곡이나 소설에 이르기까지 장르도 소재도 다양하다.
당시 해외여행 기행문은 주로 <삼천리>에 실렸다. 이전 시기의 초기 잡지가 기관지나 학회지의 성격이 강해 대중성이 약했던 것에 비해 대중 종합지 성격의 <삼천리>는 당대 문화와 문물, 유행과 풍속을 담아내고 있었다. 해외여행 기행문을 통해 식민지 약소민족의 당면과제와 미래에 대한 인식과 담론을 형성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혜석의 구미 여행기도 여러 편 실렸는데 90년 전 이 나라 신여성의 파리 체험을 읽는 일은 안타깝고도 흥미로운 일이다.
"파리 시중 제일 큰 다점은 라쿠폴 카페와 카페 돔이 있으니 야반(夜半)에 가 보면 인종 전람회와 같이 모여들어 장관이며 카페 돔은 화가 많은 몽 파르나스에 있어 늘 만원이다." 미국에서 건너온 젊은 작가 헤밍웨이가 파리의 카페를 헤매고 다녔을 즈음, 그보다 세 살 많았던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건너온,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화가도 그곳에 머물렀던 것이다.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한 이 젊은 동서양의 예술가는 어쩌면 비에 젖은 어느 오후 몽파르나스의 카페 돔이나 라쿠폴 한 구석에서 한번쯤 우연히 마주쳤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헤밍웨이가 이곳 파리에서 첫 아내 해들리를 두고 폴린 파이퍼와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나혜석도 이곳 파리에서 예술과 인생, 자유와 사랑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다만 저 미국 남자는 새로 만난 사랑과 다시 결혼을 하고 고국의 남쪽 끝자락 바닷가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후 수십 년간 더없이 영예로운 날들을 보낸 데 반해, 이 조선 여자는 고국의 남쪽 끝자락 바닷가 도시로 돌아간 것까지는 닮았으나 파리에서 만난 사랑과 자유가 족쇄가 되어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는 서글픈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여행 중 넷째를 임신한 나혜석은 귀국 후 2개월 만에 아들을 낳는다. 아들 이름을 '건(建)'이라고 짓는데 "프랑스가 혁명 이후에 모든 것이 건설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의미"하는 이름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녀에게 파리 여행은 예술과 인생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돌아온 고국 땅에서 그 혁명을 기반으로 새로운 그림과 사상과 생활을 '건설'하고 싶었을 이 여성의 고군분투가 안타깝다. 뜨거운 열정과 빛나는 재능이 가득한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한 여인, 인간 나혜석의 허무한 몰락이 근 100년이 지난 지금도 두고두고 가슴 아프다.
덧붙이는 글 | *참고한 책
<나혜석 전집>, 이상경 편집, 태학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