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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요상씨가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요상씨가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박지향

대화 참가자 수만 560명, 집회공지와 기자회견부터 각종 토론회, 서명운동 제안까지 전국의 거의 모든 사회참여 활동소식을 전하는 곳. 언론보다 더욱 빨리 현장의 생생한 정보들이 공유되는 '활동공유 참여독려를 위한 시민활동가' 카카오톡 방이다. 이 '시민활동가' 카톡방을 만들고 부지런히 현장에서 연대를 실천해온 시민이 있다. 본명보다 닉네임 '요요천사'로 더 잘 알려진 시민활동가 이요상씨(65)다.

거리에서 "깨어있는 시민상이 있다면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만 듣던 이요상씨가 정말로 '상'을 받게 됐다. 지난 2009년 재심에서 무죄로 판결난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관련 기사: 어머니는 순식간에 간첩이 됐다) 피해자 송기수씨가 올해부터 통일·인권·평화·민주의 신장, 그리고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치유와 명예회복에 기여해온 개인 혹은 단체에게 1천만 원의 부상과 함께 상패를 수여하는 '한경희 통일평화상' 1회 수상자로 결정된 것이다.

평범한 주부였던 이요상씨가 2008년 광우병촛불집회를 계기로 시민활동을 시작하게 된 지 어느덧 8년. 자식 둘을 다 키우고, 시민활동가로서의 제2의 인생을 살면서 받게 된 상이라 더 뜻 깊다. 인터뷰 전날까지 제주도에서 '강정 국제 평화영화제'를 제안하고 왔다는 전국구 종횡무진 시민활동가 이요상씨를 지난 25일,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나처럼 홀가분한 사람이 운동하기 더 쉽더라"

- 2008년 광우병쇠고기 촛불집회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민 활동가의 길에 뛰어 드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늦은 나이에 활동가라는 생소한 삶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17년 동안 서울 강남에서 식당을 하면서 자식 둘을 키웠어요. 일찍 결혼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남은 생은 '선교사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경기도 양주 시골로 내려가 천주교 공부를 하던 차였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소식을 듣고 '이거 안 되겠다' 싶었는데, 인터넷을 통해서 촛불집회 소식을 들었어요. 시위가 시작되고 열흘만에 구경나왔는데, '계속 나와야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부터 하루도 안 빠지고 광장에 나왔어요. 밤 11시 25분 마지막 전철을 타고 가면서 12시 반 넘어서 집에 오고..."

- 그때 촛불시위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정말 많은 사람이 참여했지만, 선생님처럼 아예 '시민활동가'로 살기를 결심하신 분은 드문 것 같습니다.
"그때 성당에서 여러 가지 직책도 맡고 있었고, 선교사 준비도 했기 때문에 자주 안 보이니까 신부님이 궁금해 하시더라구요. 여러 가지 사회 참여도 하시던 비교적 깨어 있는 신부님이셨는데, 한번은 상의를 드렸어요. '신부님, 밤새 기도하면 이명박 정권이 바뀝니까? 저는 나가서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하고 물었죠.(웃음) 신부님이 한참을 침묵하시더니 '자매님 마음이 가는 대로 하시라'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 열심히 촛불을 들었습니다. 아니, 촛불이 절 불러 낸 것 같아요. 하다 보니, 저 같은 사람이 제일 운동하기 좋은 여건이더라구요. 자식도 다 키워놨으니 살림도 안 해도 되고, 매일 나오고 밤을 새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요. 젊은 사람들은 오히려 할 게 많으니까 저처럼 홀가분한 사람이 운동하기는 더 쉽더라구요. 나이 먹어서 쉬지 왜 나오냐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제 나이가 운동하기 제일 좋은 나이라고 생각했어요."

- 상당히 많은 활동을 해오셨는데, 특별히 주목한 활동이 있습니까?
"어느 날, 집회가 끝나면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데 그게 너무 아쉽더라구요. 이렇게 시민들이 많이 모여 있지만 흩어져 버리면 다 소용이 없는 거구나, 저처럼 개인적으로 온 시민들이 조직적으로 묶여야지 운동이 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특히 보수언론의 폐해, 언론의 불공정함이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언론에 대한 심판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언론소비자주권연대(언소주)에 소속되어서 보수언론 광고 불매운동을 했지요."

"언론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 언소주의 보수언론 광고 상품 불매운동은 파장이 꽤 컸습니다.
"언소주 운동 중에 제일 잘 되었던 게, 보수언론에 광고 넣는 기업들 불매하겠다는 운동이었죠. 편파·왜곡 보도하는 나쁜 신문에 광고하지 말라고 기업들에게 전화하고 했었어요. 그때는 광화문광장에 수십만 명이 모이던 시기라 광고기업 명단을 밝히면 기업들이 아주 놀라서 효과가 좋았어요.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는 신문은 원래 75페이지였던 지면을 25면까지 줄이기도 했어요. 기업들이 광고를 안 줘서."

- 기업들이 놀랄 정도의 시민운동이라니, 아득한 옛날이야기 같이 느껴지네요.
"저도 열정이 있었고, 같이하는 시민들도 정말 열정이 넘치던 시기였어요. 그때는 '언론이 바로서야 시민이 바로서야 한다'고 언론사 앞에서 외치고 그랬죠. 보수언론들 곧 폐간 시킬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정말 수천 명이 불매운동 해가지고... 나중에는 기업들이 업무방해로 사법처리를 해서 24명이 기소가 됐거든요. 그런데도 검찰이 가택수색 하는 그날 아침까지 어떤 분은 보수언론에 광고한 광고주 명단을 인터넷에 올리고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 결국 언소주 사무총장까지 하셨죠?
"열심히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아시겠지만, 그 후로 언론 상황이 더 나빠졌어요. 촛불 이후에는 종편과 미디어악법에 반대하는 활동을 주로 했어요. 낮에는 언소주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고 저녁에는 접이식 식탁을 들고 어디든지 가서 서명운동을 했어요. 거의 사생활 없이.(웃음) 제 환갑날이었는데, 가족들이 밥이나 먹자고 해서 '촛불집회 해야 하니까 시청 근처에서 먹자'고 했어요. 정작 그 날도 제가 미디어법 반대 서명운동을 하다가 30분이나 늦었어요. 동생들이 '언니, 미쳤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 지금도 언론개혁 활동은 계속하십니까?
"언소주가 지금 NGO단체가 되었고요, 요즘은 한겨레 주주통신 전국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해요. 거기서 '우리도 <오마이뉴스>처럼 시민기자 활동 해보자'고 뜻을 모아서 준비하고 있어요. 지금 한겨레 주주가 6만7천 명 정도인데, 모든 주주들이 시민기자가 되어보자는 취지죠."

"시민이 기자보다 더 빨랐어요"

- 선생님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선생님이 만든 '시민활동가' 카카오톡 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하도 집회하고 기자회견을 많이 다니다 보니까, 일일이 문자 보내고 하는 게 힘들었는데, 카카오톡은 그냥 한 번만 올리면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가 확 되더라고요. 쉽기도 하고. 언소주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쭉 모아 보니까 한 200명 정도인 거예요. 전국에 다 있었죠. 이들이 각자 알고 있는 소식을 올려주니까 정보가 신문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빨리 공유됐어요. 시민들이 기자보다 빠른 거죠.

이런 장점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계속 불어나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됐어요. 나중에는 민주노총 같은 곳에서도 저한테 일정을 보내 주더라구요. 카톡방에 공유 좀 해달라고. 그러다 보니 시민사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정을 공유하는 전국적인 소통망이 된 거죠."

이 카카오톡 방의 장점은 속도와 현장성이다. 언론사보다 더욱 빨리 현장의 소식과 활동정보들이 공유된다. 세월호 참사 사건처럼 잦은 언론의 오보들로 실제 상황을 알 수 없었을 때에도, 팽목항에서 시민들이 직접 현장의 목소리를 보내왔다. 구성원이 다양한 만큼 노동, 인권, 통일,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까지 공유되는 현안도 다양하다. 실천과 참여로 세상을 조금씩 바꿔가는 시민들과 활동가들이 서로를 활동을 격려하는 단체카톡방. 때때로 벌어지는 급박한 사안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연대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 카톡방을 운영하시는 원칙 같은 것이 있습니까?
"시민활동가 방의 기준은 한마디로 '닥치고 활동'이에요. 논쟁도 웬만하면 못하게 하고요. 말로만 떠들고 정견이 어떠네 하면서 싸우고 하는 건 금지예요. 우리 방은 오로지 서로의 활동을 신뢰하는 것, 그리고 공지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직접 가는 거죠. 무슨 행사든지 이 방에 올리면 달려가겠다, 그렇게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겠다라는 게 목적이거든요. 제가 하는 일은 그 방에서 공지되는 행사에 한두 개는 꼭 가서 참여하고 그 현장을 찍어서 홍보하는 것이에요. 어쩔 때는 대여섯 군데 갈 때도 있고, 내가 못 가면 다른 사람이 가고요.

상시로 참여할 수 있는 연대인원이 그런 식으로 생기거든요. 저희가 달려가서 기자회견을 성사 시킨 적도 많아요. 기자회견 하려면 양옆으로 현수막이라도 들어줘야 하는 데, 그거 들 사람이 없는 작은 목소리들도 있거든요. 계속 그렇게 하다 보니까 여러 곳에서 많이 연대 요청이 오더라구요. 그밖에도 집회 현장에서 누가 끌려가는지, 어디가 진압 당하는지, 어디서 무슨 행사를하는지 시민들은 바로 올리니까, 유용하죠."

- 카톡방 덕분에 도움을 받은 사람이나 단체가 꽤 된다면서요?
"어느 순간부터 전국카톡방 운영 중 중요한 것이 된 게 있는데, 바로 사회참여 활동을 펼치다가 부당하게 구속된 사람들 청원과 탄원서를 작성하는 일입니다. 사실은 어려운 상황의 동지들을 돕는 거죠. 500여 명의 사람들이니까 다 같이 탄원서를 쓰자고 하면 금방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탄원은 어떤 거라도 이 방에 올리면 다 해주자 이런 기준이 있어요. 우리방에 올린 탄원서가 잘 되어서 석방되고 기각된 경우도 굉장히 많았어요."

- 국정원의 사이버 사찰에 맞서 피해자 대표로 헌법소원도 하셨어요.
"그것도 우리 카톡방과 관련이 간접적으로 있죠. 사실 저도 몰랐는데, 카톡방에 노동당 부대표가 있었어요. 정진우씨라고 그분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저희 카카오톡 대화록을 검찰 경찰이 다 들여다봤던 거예요. 한마디로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털린 거죠. 제 정보가 다 제공이 된 거예요. 참을 수 없어서 검찰청도 쫓아가고, 서울 한남동 카카오톡 본사를 가서 기자회견을 했거든요. '왜 카카오톡은 내 개인정보를 제공했느냐? 사과하고 앞으로 하지 않겠다고 해라'고.

그날 저녁에 카카오 이석우 사장이 긴급기자회견을 열어서 사과하고 앞으로 개인정보 제공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어요. 그 일을 계기로 민간인 사이버 사찰 관련해서 헌법 소원을 시민대표로 제출했어요. 아직 결과가 나온 것은 없고요, 사실 더 큰 문제는 그 후로 테러방지법이 통과되어 버린 것인데 정말 답답해하고 있어요. 이 운동을 어떻게 끌고 나갈 것인지 고민도 많이 됩니다."

"이제 평화운동 통일운동을 하고 싶어요"

- 종횡무진 정말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데요, 앞으로 더 하고 싶은 활동이 있으신가요?
"정권이 너무 많은 일들을 저질러서 수 가지의 사회 현안을 쫓아다녀야 하지만 않으면, 통일과 평화가 최고의 숙제라고 생각해요. 사실 분단이 우리 민족과 국가의 가장 불행한 사건이었고, 친일 청산이 안 된 것도 그 이유가 크죠. 언론 운동 다음으로 제가 많이 하는 활동이 평화통일 쪽 운동이에요. 임진각, 포항-키리졸브, 그리고 강정. 강정에 해군기지 들어서는 거 알고 20번 넘게 갔을 거예요. 몸싸움도 많이 했고... 제주도에 미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은 오키나와 해군기지를 전진시킨 거예요. 우리나라를 전쟁의 한가운데로 몰아넣겠다는 거고... 민주정권이 수립되면 강정-평화활동가가 될 거예요. 딸이 제주도에 살기도 하고요.

어제도 제주도에 다녀왔어요. 강정 국제 평화영화제를 열자는 제안을 하고 왔죠. 강정의 해군기지 철수 운동은 우리나라의 평화통일 운동이고 동북아시아, 세계의 평화를 위한 운동이에요. 오키나와처럼 수십 년이 걸려도 강정에서 해군기지가 나갈 때까지 평화운동가로서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제1회 한경희 통일평화상을 수상중인 이요상씨. 국가폭력에 고초를 겪은 고 한경희 여사를 기리며 그의 아들 송기수씨가 제정한 이 상은 이땅의 민주, 통일, 평화 활동가들에게 매년 매년 시상될 예정이다.
제1회 한경희 통일평화상을 수상중인 이요상씨. 국가폭력에 고초를 겪은 고 한경희 여사를 기리며 그의 아들 송기수씨가 제정한 이 상은 이땅의 민주, 통일, 평화 활동가들에게 매년 매년 시상될 예정이다. ⓒ 박지향

- 그 동안의 열정적이 시민활동으로 '한경희 통일평화상'을 수상하시게 되셨습니다.
"8년 정도 활동을 하면서 특히 촛불집회 현장 같은 곳에서 '민주시민상이 있다면 이요상씨가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간혹 단체들에서 그런 상을 주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야 했지만, 명망가도 활동가도 많다 보니 상이 있어도 저를 주겠거니 했죠. 소식을 듣고 놀라고 당황했어요. 제가 받는 것도 놀랍지만 상 자체가 특별하니까요.

한경희씨는 독재정권의 조작간첩 사건으로 큰 고통을 받고 끝끝내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분이잖아요. 그런 분의 명예회복을 위해 자제분들이 만든 상이고, 그 자제분들마저 국가폭력의 피해자였다고 하니 눈물의 상이고 한 맺힌 상이죠. 그런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상을 주신다니, 저 같은 평범한 시민이 한 것이 있긴 한가 자문하게 되더라구요. 많은 분들이 '시민으로서 정말 열심히 했다. 평범한 시민이 받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해서 받을 용기를 냈습니다. 일생의 영광이고, 앞으로도 민주시민으로 더 많이 활동해야 한다는 무게를 느끼기도 합니다."

"시민은 눈감지 않습니다. 시민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 이렇게 인터뷰를 하니 꼭 받으셔야 할 분이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활동가가 아닌 시민으로서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근혜 정권 들어서 '그렇게 해봐야 무슨 소용 있겠느냐', '오버하지 마라', '안 바뀐다'고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저는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피를 흘렸잖아요. 4.19나 5.18같은... 이젠 피를 흘리는 혁명이 아니라 선거혁명을 이뤄야 해요. 그건 이 정권의 잘못을 알리고 이런 정권에게 권력을 주지 않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때 가능합니다. 하지만 종편이나 지상파 등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이죠. 그런데 우리에겐 SNS가있고 1인 미디어가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죠.

결국 시민의 힘의 힘입니다. 활동가 방처럼, 시민도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는 매체를 갖게 된 시대가 된 거예요.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어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것을 시민이 국민이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 않아요. 시민들은 눈을 감고 있지 않아요. 제가 그런 시민이었고 지금도 시민이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박근혜가 국정원까지 동원해서 관권부정선거로 51퍼센트를 받았어요. 그러면 48프로는 우리가 받았다는 거예요. 사실 3%의 시민만 우리를 지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50만~100만 명. 그 시민들이 나쁜 정권을 안 찍게 하는 거.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인터뷰 내내 이요상씨의 핸드폰은 끊임없이 울렸다. 이곳저곳에서 제기되는 연대요청들로 무척 바빠 보였다. 요즘은 일상적으로 시민들의 목소리가 교류되는 문화공간을 서울 종로에 열기 위해 더욱 정신없이 뛰고 있다고 했다.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는 시민활동가의 얼굴은 초로의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의 생기와 에너지가 있었다. 끝없이 후퇴하는 민주주의를 보며 낙담과 패배의 목소리가 높은 진보진영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 자신이 시민이자, 포기하지 않는 시민의 근거이기에 "시민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진정성있게 들렸다. 이요상씨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그가 대표하고 있을지 모르는 평범한 시민들이 첫 한경희 통일평화상의 수상자라는 생각이 든다.

 제1회 한경희통일평화상 시상식. 수상자 이요상씨(가운데 왼쪽)와 한경희상을 만드신 송기수(가운데 오른쪽)씨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제1회 한경희통일평화상 시상식. 수상자 이요상씨(가운데 왼쪽)와 한경희상을 만드신 송기수(가운데 오른쪽)씨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박지향



#이요상#한경희통일평화상#시민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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