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하마(橫浜)에 도착되는 때부터 가옥은 나뭇간 같고, 길은 시구렁 같고 사람들의 얼굴은 노랗고 등은 새우등 같이 꼬부라져 있다. 조선 오니 길에 먼지가 뒤집어 씌우는 것이 자못 불쾌하였고 송이버섯 같은 납작한 집 속에서 울려 나오는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였고 흰 옷을 입고 시름없이 걸어가는 사람은 불쌍하였다." - <삼천리(三千里)> 1932년 1월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 1년 9개월간의 기나긴 구미여행을 마치고 1929년 3월 12일 도착한 곳은 하필 부산 동래였다. 그나마 근대 도시의 외형을 어느 정도 갖추어가던 경성이었다면 다시 마주한 고국 땅에 대한 소회가 이보다는 조금 나았을라나. 철저하게 계획되고 통일된 기하학적 조형미의 첨단이라 할 파리의 도시 외관에 그새 익숙해져버린 눈이다. 그 눈으로 다시 대면한 고향의 '송이버섯 같은 납작한 집'과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길'은 아마도 익숙한 낯설음이고 서글픈 반가움이었을 것이다.
식민지 지식인의 근대 체험, 동경 유학 후 마주한 조국 땅의 처량한 풍경에 대한 서글픈 묘사는 이전에도 있었다. 다만 나혜석은 구미여행이었다. 유학 시절 선진 문물이라 감탄해 마지않던 일본의 풍경마저 '나뭇간 같은 가옥, 시구렁 같은 길'이라 느껴질 만큼, 서구의 도시 체험은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파리는 에투알을 중심하고 별과 같이 길이 뻗쳐났다. 그리고 건물이 삼각형으로 되어 자못 아름답다. 길모퉁이 집 벽에는 반드시 동리 지명이 써 있어 길 찾기는 '쉬우나' 누구나 한 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방향이 전혀 달라진다. 어디를 가든지 도로 좌우 편에는 병목(並木)이 있고 중앙은 차마도(車馬道)로 목침 만큼한 나무로 모양 있게 깔고 좌우에 인도가 있고 거기에는 매 칸에 하나씩 수도가 있어 아침마다 물을 뽑아 길을 씻어내려 유리같이 되어 있다." - <삼천리(三千里)> 1934년 나혜석이 묘사한 당시 파리의 모습은 파리 지사였던 오스만 남작(Baron Georges-Eugène Haussmann, 1809-1891)의 대대적인 도시 재개발 사업의 결과물이다. 아직 중세 도시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던 파리를 전혀 새로운 모습의 근대 도시로 변모시킨 것이다. 공과(功過)는 뒤로 하고 아이디어와 추진력만큼은 가히 놀라울 지경이다. 오죽하면 '오스만의 파리'라는 말까지 있을까. 파리를 통째로 들어내고 새로 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방대하게 진행된 이 대규모 도시 정비 프로젝트는 1853년부터 1870년 사이에 추진되었으니, 나혜석이 파리에 체류했던 1920년대로부터는 약 반세기 전의 일이다.
19세기 중반 파리의 인구는 100만을 넘어서고 마차 통행량도 급증하게 된다. 철도와 기차가 출현하며 도시의 유동인구도 증가하고 도시가 팽창하며 중심지도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다. 터질 듯한 이 도시엔 아직 상하수도 시설조차 마련되지 않아 위생 수준은 최하였으니 오물과 악취는 물론이고 콜레라 따위의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비뚤비뚤 뒤엉킨 비좁은 골목길은 당시 집정자 입장에선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폭도들은 툭하면 바리케이드를 치고 폭동을 일으킬 궁리를 하고 있는데다, 주도자들의 집회 장소나 도피자들의 은신처로 삼기에도 딱 좋은 공간 구조였던 것이다.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의 몰락 이후 다시 격변기에 접어든 프랑스는 왕정복고와 1830년 7월 혁명을 겪고 1848년 2월 혁명으로 공화정을 세운다. 루이 나폴레옹(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1873)은 백부였던 나폴레옹 1세에 대한 시민의 향수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잡는다.
하지만 곧이어 1852년 쿠데타로 공화정을 무너뜨린 후 황제로 즉위한다. 나폴레옹 3세는 파리를 런던을 능가하는 도시로 만들고 싶었다. 이 도시를 뿌리부터 뒤엎고 새로 지어 올려야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싶었다. 마치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건조했던 것처럼 파리를 상징적인 견본 도시로 삼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 막중한 사업의 책임자로 당시 센 강 지역을 담당하던 파리 지사 오스만 남작을 지목한다.
파리가 유난히 인상적인 이유는 도시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청회색 아연 지붕과 베이지색 벽으로 이루어진 건물들 때문이다. 유사한 형태와 색상의 건물이 일정한 형식으로 줄맞춰 서 있는 모습은 균형감을 주는데다 높이마저 6~7층 정도로 통일되어 위협적이지 않다. 지붕과 벽면의 색과 형태와 질감 등 건물 외관이 하나같이 비슷한데다 창문과 발코니는 정교한 청동 빛 철제 장식으로 둘러쳐 있다. 밤이면 은은한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 켜지며 끝 모를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확산해 가는 여러 개의 대로, 마치 베르사유 궁전까지도 단숨에 닿을 것처럼 시원스레 뻗은 넓은 도로, 그 길 양편에 늘어서 초록빛 물결을 이루고 있는 키 큰 가로수와 잘 정돈된 인도, 이제 그만 쉬고 싶다 싶을 무렵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작은 정원과 광장, 회색빛 도시에 산소를 공급하는 넓고 푸른 공원들, 청회색 아연 지붕과 베이지색 벽, 청동 발코니 장식이 조화로운 적당한 높이의 건물들과 가로등.
파리를 특별하게 하는 이 도시 풍경들은 실은 그리 오래지 않은 시기에 구축된 셈이다. 대부분이 쿠데타로 세워진 제2제정기의 산물이다. 당시 시민들과 지식인들의 반대와 저항은 결사적이었다. 수십 년간 끊임없이 파헤쳐지고 헐어내리는 공사판의 소음과 먼지와 피로를 견뎌내며 도시 빈민과 시민들은 깊은 우울을 경험해야 했다. 막대한 공사비를 들인 오스만의 대대적인 도시 정비 사업 이후로 파리는 문화와 예술이 만개하는 벨 에포크(Belle Epoque) 시대를 맞이하며, 해마다 8천만 명이 프랑스를 찾고 그중 3천만 명이 파리로 몰려든다.
수많은 상점과 공연장, 전시관 등 상업적이고 예술적인 화려한 건물들은 유서 깊은 건물들과 도시 빈민을 모조리 몰아내고 그들의 궁벽한 삶의 터전을 죄다 헐어버린 결과이다. 드넓게 뻗어나가는 시원스런 도로는 이야기를 품고 있던 아기자기한 골목들을 부숴 버린 결과이며 더욱이 바리케이드를 치기 어렵도록 설계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시민 혁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진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름다움으로 예찬되고 자유와 혁명, 사랑과 낭만으로 기억되는 도시 파리는 정작 그렇게 형성되었다.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