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적인 존재로 세상에 태어나지만, 영유아기 때의 아이는 당연히 자연스럽게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대상인 엄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타고난 성향은 어찌할 수 없다 해도, 아이가 살면서 지니게 될 사소한 습관은 엄마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먹는 것은 가공식품으로 대충 해결하는 식사와 간식이 아닌, 풍부한 영양소가 골고루 함유돼 있는 건강한 자연식이 기본이 돼야 한다는 것. 놀 때도 TV나 스마트폰의 미디어가 아이의 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닌, 아이의 뇌가 주체적으로 세상의 많은 것들을 탐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내 경우엔 그 두 가지가 원칙이었다. 정해놓은 그 원칙들을 꼭 지킬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내가 정한 원칙이 옳다고 믿으며 내 마음대로 키우고 싶었다. 성인이 돼 "난 엄마 생각과 달라"라고 말하면서 등을 돌리는 자식의 뒷모습에 아글타글 살았던 지난 인생 후회가 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참 까다롭게도 키운다." 대놓고 말하던, 이미 내가 겪은 많은 세상의 일들을 경험하고도 시간이 한참 지난 집안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듣는 말이 아무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이들에게 첨가물이 잔뜩 들어가 있는 과자류를 사주고 싶어 슈퍼에 데려가려는 친정엄마를 만류하고, 급기야 화도 내고, 설득하기까지 1년 넘게 걸렸다.
아토피가 살짝 있는, 극도로 건성인 피부를 지닌 큰아이는 유제품을 먹이지 않은지 꽤 오래됐다. 더운 여름에 밖에서 뛰어놀다 친구들이나 이웃집 형 누나들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달려가도, 먹일 수가 없었다. 왜 그런 달콤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안 되는 건지 아이에게는 늘 설명해줘야 했고, 아이는 아이스크림 대신 얼린 홍시나 블루베리를 먹어도 행복해했다.
"나도 조금 먹었어"... 기운이 쭈욱 빠졌다
최근에 친정에 큰 행사가 있어 친척들이 많이 모였던 날, 작은 아이를 달래느라 잠깐 자리를 비운 때가 있었다. 다시 돌아온 나에게 큰 아이가 다가와 엄청나게 큰 비밀이지만 엄마에게는 털어놓겠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 이모들이 아이스크림 먹을 때 나도 조금 먹었어."이종사촌동생들이 많았는데, 내가 없을 때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아이에게도 몇 입 준 거라고 친정엄마가 부연설명을 하셨다.
"네 엄마한테는 비밀이라고 하면서 줬는데 순진한 녀석이 다 말하네." 함께 계시던 내 이모는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조금씩은 먹어도 괜찮다고 날 안심시키려 했다. 아이는 엄마가 없는 틈에 유혹을 못이긴 거고, 그 유혹에 넘어가도록 다른 어른들이 만류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인 셈이었다.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어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하고 화를 내고야 말았다. 믿었던 친정엄마에게는 실망감마저 꽉 차올랐다.
이제 아이의 먹는 문제는 엄마 혼자 끙끙대며 해결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 새롭게 떠오른 내 과제였다.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길 때에도 엄마의 철학과 뜻이 맞는 이를 만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가장 가깝다 여겨진 가족들을 통해 실망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빵 말고 떡, 과자 말고 과일'을 주장하던 내 의견이 모든 가족들에게 완전히 받아들여 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던 또 한 번의 사건이 있었다.
명절 때, 아이들 고모가 온갖 과자들이 옹기종기 섞여 있는 커다란 검정 봉지를 아이들에게 짜잔 하며 들이밀 때에는 정말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섭섭했다.
"아무리 안 먹여도 어차피 이제 어린이집 다니게 되면 다 먹게 될 걸."화난 감정 감추고 꾹 참느라 애쓰는데, 툭 던지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항변하듯 사실 섞인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그런 간식 안 먹이고, 식단도 유기농 식재료를 고집하는 어린이집 찾아서 보내는 거예요!"속마음이란 건 감출 때 무기가 될 수도 있고, 드러낼 때도 무기가 될 수 있다. 명절 과자 사건의 경우엔, 내 육아지론과 실천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상대가 더 이상 말 못하게 할 무기가 된 것이다.
여기가 아니면 안 돼모진 풍파 다 겪어내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큰 나무가 아니라, 돌봄과 사랑이 필요한 작은 묘목에 불과한 아이의 존재. 그런 아이와 부대끼며 일과를 이어가야 할 주변 어른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면 했다. 비슷한 육아철학을 가진 지인들 사이에서 입소문 난 어린이집이 다행히도 우리 동네에 딱 한 군데 있었다. 기나긴 겨울동안 봄을 대기하듯, 길고 긴 기다림도 감수하겠다는 생각으로 그곳에만 대기를 걸어놨다. 겨우내 움츠러든 생활이 지겨워 입소확정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면상담을 전화로 예약하고 찾아갔다.
"다행히 3월에 자리가 있을 것 같네요"라고 점잖은 목소리로 확답을 주시던 어린이집 원장님과의 첫 대면은 앞으로 아이를 몇 시간 동안 이곳에 맡겨도 되겠다는 안심을 얻은 날이다. 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그날은 이미 봄이 온 것처럼 유달리 따뜻했었다. 이곳이 아니면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없겠구나 결심한 날이기도 하다.
진짜 봄이 반짝하고 찾아왔다. 아랫집 형아처럼 쑥 크면 어린이집에 다니게 될 거라고 말하곤 했던 엄마는 어린이집 가방을 열어 아이에게 보여준다. 그곳엔 점심 먹을 새로운 식판, 집에서 쓰던 익숙한 모양의 숟가락 젓가락이 들어있고, 작은 수건도 들어있다. 칫솔도 빼놓지 않고 챙겼고,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아이의 컵도 가방 한구석을 차지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도 형아처럼 큰 거야?"라고 물으며 신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는 가방을 매고 싶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걸음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네가 겪게 될 변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여줬으면 하는 엄마의 걱정이 전부인 무거운 바람이 목울대까지 차올랐다.
그래 넌 이제 어느덧 큰 거야. 엄마가 없는 곳에서 엄마의 마음처럼 널 사랑해줄 또 다른 어른과 함께 지내게 되는 거야.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 http://blog.naver.com/rnjstnswl3 중복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