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치지지지직~, 치지지지직~'모든 것은 이 소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 낯선 소리에 반응하지만 않았어도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무심코 손에 쥔 이 오래된 무전기 하나로 인해 세상이, 삶이 이렇게 뒤바뀌게 될 줄은.
만약 알았다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겠지. 그러나 잠깐. 정말 모른 채 지나칠 수 있었을까. 아득히 먼 과거와 조우하는 이 치명적인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었을까.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2. <시그널>종영한 지 한 달도 넘은 드라마 <시그널>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이 시공을 초월해 미제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 판타지에 대중들을 환호했고 열광했다.
판타지는 희망이자 꿈이며 염원이다. 비루하고 너절한 현실에 익숙해질수록 판타지를 향한 본능은 더욱 구체화되고 짙어진다. <시그널>은 이 극명한 괴리를 기막히게 잘 버무려냈다.
과거로부터 걸려온 무전에는 '시간은 이어져 있다'는 분명하고 명확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과거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현재와 이어져 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시그널>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무전기'다. 골동품 시장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낡고 닳은 무전기가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들을 만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제사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추적해 나간다.
그들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물이 무전기라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키워드는 '간절함'이다. 정의를 꿈꾸고 사랑을 그리워하고 누명을 벗기려는 그들의 간절함은 이 판타지에 활기와 생명을 불어 넣는다.
간절함은 의지와 열정의 또 다른 이름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희망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터럭 같은 희망을 쫓아 맹렬히 돌진했던 이 판타지는 "미래에 있는 당신이 마지막 희망이다"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끝을 맺는다. 절망적 현실이 판타지를 만나 희망으로 채색된 것이다.
3. 현실시간은 이어져 있다. 현실에서도 과거의 끈을 부여잡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정치권, 그 중에서도 특히 새누리당은 과거를 소환하기 위해 아주 필사적이다. 그들 덕분에 시민들도 덩달아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야 한다.
얼마 전 새누리당은 '존영' 논란으로 한바탕 소동을 겪어야만 했다. 이 눈꼴 시린 장면은 그 졸렬함은 둘째치고라도 대통령의 사진을 '존영'이라 칭하는 퇴행적 행태로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권위주의 시대의 흉물은 여전히 집권당의 DNA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대통령을 향한 구애는 그보다 더 노골적이고 민망하다. 저 당에는 대통령과 가깝다는 사실을 무용담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헌법보다 대통령과의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대통령을 피 흘리는 예수에 비유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이 낯뜨거운 장면들은 수십 년 전 최고 권력자를 향해 나타나던 그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백투터퓨처'는 단지 새누리당 내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기관이 선거에 깊숙이 개입하고, 위법성과 위험성에 대한 뚜렷한 증거도 없이 정치정당이 강제 해산되기도 한다. 대통령을 비판·풍자했다는 이유로 시민이 기소·구속되는가 하면, 30년 만에 처음으로 '소요죄'가 등장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당장 2017년부터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워야 한다.
어디 이뿐인가.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지표들인 언론자유지수, 인권지수 마저 해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급기야 세계로부터 '아시아 민주주의 모범'이라 칭송받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그들의 심각한 우려를 받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정권이 바뀐 지 8년 만에 이루어진 기막힌 반전이다.
2016년 우리 사회는 아주 오래된 과거와 마주보고 있는 중이다. 이 과거는 누군가에게는 추억이고 그리움이며, 되돌리고 싶은 아련함이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몽이고 절망이며, 떠올리기조차 싫은 끔찍함이다. 과거는 이렇듯 다르게 적힌다.
4. 에필로그'치지지지직~, 치지지지직'소리가 들린다. 현실에서 목격되고 있는 과거의 '시그널'이다. 이 소리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다. 누군가에게는 친숙함이자 반가움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음이자 공해다.
그러나 당신이 이 '시그널'에 어떻게 반응하든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와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제 곧 총선이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이것 한 가지만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간은 이어져 있는 사실을. 미래는 현재의 당신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현재의 당신이 미래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을.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민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