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문화유산은 도동서원과 곽재우 장군 묘소이다. 그 두 곳을 찾으려면 구지면 면소재지를 지나야 한다. 그런데 두 곳으로 가는 길은 아주 딴판이다. 도동서원은 면사무소에서 오른쪽, 홍의장군 묘소는 왼쪽으로 나가야 한다.
면사무소에서 도동서원 방향으로 갈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마을은 화산리이다. 마을 이름 화산리는 면사무소에서 1.5km가량 떨어진 지점에 봉긋 솟아 있는 화산(花山)에서 태어났다. 얕은 동산처럼 느껴지는 화산은 꽃뫼, 즉 꽃 같은 산이라는 뜻이다.
주소를 검색하면 화산서원(花山書院)은 구지면 화산리 898번지에 있다. 화산서원 답사 후 도동리 35에 있는 도동서원을 보려면 서쪽으로 다시 4km 정도 더 나아가야 한다. 대암리 182에 있는 홍의장군 묘소는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으로 가는 67번 지방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3km쯤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답사자는 현풍IC에서 내려 우회전하는 순간, 그 두 곳들보다 먼저 만나보아야 할 문화유산과 마주치게 된다.
용흥지라는 연못 옆에 조성되어 있는 삼각형 모양의 숲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숲은 범상하지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어 저절로 나그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충효를 대대로 실천하고 청렴결백을 가문의 명예로 삼으라'는 의미의 <忠孝世業 淸白家聲(충효세업 청백가성)> 여덟 한자를 새긴 빗돌이 웅장하다.
빗돌을 등지고 서면, 얕은 둔덕 위에 서서 호수 수면 가득 솟아오른 연과 삼각지의 고목들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 기와집 한 채가 정면으로 보인다. 기와집은 마치 답사자의 방문을 크게 환영한다는 듯이 두 팔을 좌우로 길게 뻗친 채 문을 활짝 열고 있다. 가로로 길게 늘여서 지은 듯한 특이한 모양새의 이 기와집은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29호 '현풍곽씨12정려각'이다.
현풍곽씨12정려각은, 이름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결코 평범한 일반 주택이 아니다. 각(閣)이라면 대략 가장 작은 규모의 집을 가리킨다. 가장 큰 것은 궁(宮, 경복궁 등), 이어서 전(殿, 석조전 등), 작으면 헌(軒, 오죽헌 등)이라 부른다. 보통의 집은 당(堂, 서당 등)이라 부르고, 거주하지 않고 그냥 놀거나 행사를 여는 공간이면 누(樓, 총석루 등)라 한다. 누는 각보다 커서 2층 이상이 많다.
정려각은 정려가 모셔져 있는 작은 집이다. 따라서 현풍곽씨12정려각은 현풍곽씨 문중이 조정으로부터 받은 정려 열둘을 한곳에 모아놓은 집이다. 정려 열둘과 비석 둘을 가로로 줄지어 세워놓다 보니 자연스레 건물이 상당한 길이를 뽐내게 된 것이다. 문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을 읽어본다.
현풍곽씨12정려각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29호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지리 1348-2'정려각이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정문(旌門, 홍살문)을 세우고 표창하기 위해 건립한 상징적인 건물로 내부에 정려비(조정에서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여 내려준 비석)나 현판처럼 만든 정려기(旌閭記, 표창 내용을 기록한 나무)를 모신다. 이 건물은 1598년(선조 31) 부터 영조 때까지 솔례마을의 현풍곽씨 일문(조선 초기 익산군수 곽안방의 한 가문)에 포상된 12정려를 한 곳에 모은 정려각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으로 황석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가족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곽준과 그의 두 아들, 그리고 딸이 일문삼강(一門三綱, 한 가문에 충신, 효자, 열녀가 모두 표창됨)으로 정려된 것과, 임진왜란 때 비슬산 자락의 사효자굴에서 병든 아버지를 대신하여 목숨을 바친 곽재훈의 네 아들인 결, 청, 형, 호(潔, 淸, 泂, 浩)가 효자사공(孝子四公, 네 명의 효자)으로 정려된 것을 비롯하여 정려가 내릴 때마다 따로 여각(정려각)을 세우던 것을 영조 1년(1725) 이후 이들 정려를 현재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고 한다.6.25 때 건물 일부가 포격으로 무너지고 비석 1기가 부서졌으나 1963년에 모두 보수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삼강오륜을 지켜 모범이 되면 조정에서 이를 포상하였는데, 한 문중에서 12정려가 내려진 것은 매우 드물고도 자랑할 만한 것이다.'
곽준(1550~1597)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다. 곽준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평소 친하게 지내온 이웃 고을 선비 김면(1542~1593)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를 도와 종군한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안음(安陰, 경상남도 함양)현감으로 있으면서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켰는데,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대군을 맞아 끝까지 싸우다가 마침내 전사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본 두 아들 곽이상과 곽이후도 분노와 한에 서려 적을 무찌르던 중 이윽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곽준의 사위 류문호도 전투 중에 죽었다.
전투를 돕기 위해 산성에 머물고 있던 맏며느리 거창신씨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전사에 절망한 나머지 나무에 목을 매어 세상을 이별했다. 아버지의 사망 사실을 안 뒤 줄곧 울고 있던 딸은 뒤이어 남편도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지아비가 살아있어 미처 죽을 수 없었는데 이제 지아비마저 적들에게 참화를 당했으니 어찌 나만 살아 남으리까!"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곽준과 그의 두 아들, 그리고 사위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으니 충성이요, 곽준의 전사를 보고 적과 더욱 분연히 결전을 벌이다가 두 아들과 사위가 전사했으니 이는 충성이자 효도이며, 지아비를 뒤따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딸과 며느리는 열녀이다. 그래서 한 가문에 충신, 효자, 열녀가 한꺼번에 탄생한 일문삼강으로 표창을 받은 것이다.
뒷날 곽준의 묘소 앞에 비를 세울 때 비명(碑銘, 비석에 새긴 글)은 정경세가 지었다. 정경세는 '체찰사(體察使, 전쟁 중에 임금 대신 군대 일을 총괄하는 관리) 이원익 공은 황석산성이 호남과 영남의 요해처'이므로 '공(곽준)이 충성스럽고 성실하며 강직하고 의젓하고, 또 아전(낮은 관리)과 주민들에게 인심을 얻었으므로 반드시 잘 지킬 것'으로 여겨 그에게 수비 책임을 맡겼다고 썼다. 다만 '공이 서생(書生, 선비)으로 무술을 익힌 바 없기에 김해부사 백사림에게 전투를 돕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곽준은 체찰사의 임명을 받은 즉시 초소와 성첩(성벽 위에 덧붙인 방어 시설)을 수선하고 식량과 무기를 비축한 다음, 성을 지키다가 죽기로 결심했다. 곽준은 백사림에게 성을 나누어서 지키자고 제안했다. 곽준은 성의 서남쪽, 백사림은 동북쪽을 사수하기로 하고 구역을 분담했다. 이윽고 적의 대군이 남쪽 문을 공격해왔다. 곽준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밤낮으로 분투했다. 하지만 백사림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적의 기세가 너무나 대단하여 우리를 핍박하니, 어찌 겁나지 않겠는가?" 하고 말했다.
곽준은 "나는 이미 죽기를 결심하였으니 겁나는 것이 없소" 하면서 백사림을 꾸짖었다. 그래도 백사림은 어둠을 틈타 가족들을 밧줄에 매달아 성밖으로 먼저 내려보내고는 자신도 군사들과 함께 도망쳐버렸다. 그 바람에 성의 동북쪽이 텅 비게 되었다. 군사들과 백성들은 크게 동요하였고 마침내 성 안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지경이 되어서는 적의 공격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모두들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고 곽준에게 말했다. 곽준은 "이 성은 내가 죽을 곳인데, 그 외에 무슨 계책을 세운단 말인가?" 하면서 무기, 군량미 등을 모두 태우라고 명령했다. 이윽고 적들이 성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마침내 곽준은 황석산성에서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경세는 '공(곽준)이 전사하자 아들 곽이상과 곽이후가 공의 시체를 안은 채 적과 싸우다가 함께 칼에 찔려 죽었고, 딸은 남편 유문호가 적에게 사로잡히자 눈물을 쏟으면서 "아버지(의 시신)를 (성 안에) 남겨 두고 나온 것은 남편 때문이었는데 남편이 적에게 붙잡혔으니 (내가) 살아서 무엇 하리오!" 하고는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라고 기록했다.
정경세는 비명에 곽준의 선조들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곽준의 고조부 곽안방은 청렴결백으로 이름이 높았던 조선 초기 선비이고, 증조부 곽승화는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두 수제자였으며, 조부 곽미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남쪽(고향 현풍)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밖에 나가지 않았던 인물이다. 곽준의 아버지는 곽지완, 어머니는 초계 정씨(草溪鄭氏)였다.
12정려각의 핵심, 곽준 가족과 네 효자
사효굴 앞 안내판의 안내문 |
사효굴(四孝窟) 달성군 유가면 양리 360
사효굴의 유래는 망우당 곽재우의 사촌형인 곽재훈의 네 아들과 관련 있다. 곽재훈의 슬하에는 결, 청, 형, 호의 네 아들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병환 중인 부친을 모시고 비슬산 중턱에 있는 동굴에 숨어 피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부친의 천식이 심해 기침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어느날 굴 밖을 지나던 왜병들이 기침소리에 굴 안에 사람이 있음을 알고 밖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이에 효성이 지극한 큰아들이 부친을 대신해 나갔다가 죽임을 당했고, 같은 방법으로 나머지 세 아들 또한 차례로 살해당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곽씨가 굴 밖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에 그 간의 정황을 알게 된 왜장은 네 형제의 효성에 감동하여 곽씨의 등에 '네 아들의 효자(四孝子之父)'라는 글을 써붙여 석방하였다. 그 후 마을사람들은 이 곳을 '사효굴'이라 이름하여 네 형제의 효성을 추모하였고, 나라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정려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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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곽씨12정려각 앞 안내판은 곽준과 그의 아들, 딸, 며느리의 장렬한 죽음, 그리고 곽재훈의 네 아들이 비장하게 죽은 사효굴을 핵심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비각 안에 걸려 있는 열두 정려기들과 두 기의 빗돌을 살펴보니, 안내판의 해설에 나와 있지 않는 임진왜란 피해자가 한 분 더 발견된다.
'곽재기 처 광릉이씨가 왜란 중 적을 만나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遇賊投水而死事)'라는 정려기가 바로 그것이다. 현판의 검은 빛깔이 마치 당시의 처참한 광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아 비각 안을 들여다보는 마음을 눈물겹게 한다.
12정려각에 모셔져 있는 주인공들은 모두가 곽안방의 후손들이다. 따라서 12정려각 관련 유적지를 답사하려면 곽안방이 모셔진 이양서원(현풍면 삼강3길 23), 곽안방의 후손들을 제향하는 화산서원(구지면 화산리 898), 곽준이 홍의장군 곽재우 함께 배향되고 있는 예연서원(유가면 구례길 123번지), 그리고 사효굴(유가면 양리 산144)을 찾아야 한다.
여정의 효율성을 생각하면 불과 1km 거리에 있는 이양서원부터 먼저 찾는 것이 당연하다. 그후 2.5km 남짓 더 나아가 화산서원을 둘러볼 일이다. 예연서원과 사효굴은 화산서원 가는 길과 반대쪽인 비슬산 기슭으로 들어가야 한다. 현풍곽씨12정려각에서 예연서원까지는 대략 5km, 예연서원에서 사효굴까지는 다시 6km가량 된다.
이 일대를 완벽하게 두루 둘러보려면 현풍곽씨12정려각> 이양서원> 화원서원> 송암서원> 도동서원> 홍의장군 곽재우 묘소> 예연서원> 사효굴> '빨간 마후라' 기념관> 유가사 순서로 여정을 잡아야 한다. 등산이 가능한 답사자는 유가사를 둘러본 뒤 비슬산에 올라 대견사 삼층석탑과 빙하기 암괴류를 감상할 일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곳을 단숨에 모두 찾아보겠다는 계획은 현실저긍로 무리미으로, 우선 현풍곽씨12정려각> 이양서원> 화산서원 세 곳부터 둘러보면서 하루의 보람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양서원을 찾아간다. 12정려각에서 오른쪽으로 67번 지방도로를 300m쯤 나아가면 대1리 마을회관이 나오고,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가라는 표지석이 도로 우측에 서 있다. 마을 안을 바라보며 300m 들어간 후 좌회전한다. 길은 대동지라는 작은 연못의 오른쪽을 빙 돌더니 얕은 언덕 비탈을 타고 잠깐 이어진다. 마을 표지석에서 이양서원까지는 모두 700m가량 된다. 서원 앞에 닿아 안내판을 읽어본다.
이양서원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32호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대리 907-4'이 서원은 조선 세조 때 청백리인 곽안방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907년(숙종 33)에 사당인 청백사(淸白祠)를 건립한 뒤 서원으로 발전되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1945년에 사당을 복원하였으며, 1982년에 동재와 서재를 건립하였다. 서원은 8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당 오른쪽에 사당인 청백사가 있어 병렬형을 이루고 있다. 청백사에는 곽안방을 으뜸으로 하여 곽지운, 곽규, 곽황 등 네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곽안방은 세조 당시 익산군수를 지낸 선비로서 이름 높은 청백리(淸白吏)였다. 청백리는 맑고(淸) 하얀(白) 관리(吏)를 가리키는 말로, 고려 시대에는 염리(廉吏)라 하였다. 염(廉)은 청렴(淸廉)을 의미한다.
곽안방의 청렴성을 상징하는 일화에 현어(懸魚)가 있다. 현어는 관리가 임기를 마치고 이임하는 날 그 전에 선물로 받았던 고기(魚)를 창고에 매달아(懸) 두고 떠나가는 것을 말한다. 곽안방도 익산군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노비 한 사람이 열쇠 하나를 차고 오는 것을 보고 놀라 "그것이 관공서의 물건인데 어찌 작은 것이라 하여 소홀히 가져온단 말이냐? 나를 더럽힐 수 없다"라면서 곧바로 돌려보내게 했다.
곽안방이 말 한 필만 탄 채 들판을 조용히 통과하여 떠나가니 농삿일을 하고 있던 백성들조차 군수가 지나가는 줄 알지 못했다. 이양서원의 사당 이름이 어째서 청백사(淸白祠)인지 잠깐 궁금했었지만 곽안방의 행적을 되새겨보니 단숨에 그 뜻이 헤아려진다. 청백사 현판 글씨가 너무도 하얗고 맑아 여전히 곽안방의 청렴한 정신이 생생한 기운을 드러내고 있는 듯 느껴진다.
다락형 외삼문, 동재 지붕 아래로 난 강당 가는 길이양서원은 외삼문이 다락방처럼 생긴 점이 가장 특이하다. 강당 마루에 앉아 바라보며 외삼문 2층에 난 창으로 맞은편 산과 하늘이 시원하게 보인다. 인위로 시야를 가로막지 않고 자연과 벗하며 살기를 염원했던 조선 시대 선비들의 건축술을 엿보는 듯하다.
사당이 강당 동쪽에 있어 병렬을 이루고 있는 점도 남다르다. 흔히 서원과 향교는 전학후묘(前學後廟)라 하여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이 앞에 있고, 선현을 제사지내는 공간이 뒤에 있는데, 이양서원은 사당이 강당과 나란히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이는 사당을 먼저 지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로, 사당 앞은 강당과 정원을 놓을 만한 적당한 공간이 없다.
사당 앞에는 동재가 지어져 있다. 그런데 이 동재에도 이양서원이 지닌 독특한 면모의 한 가지가 깃들어 있다. 보통 서원은 외삼문의 오른쪽 작은 문으로 들어가 강당 앞 뜰에 닿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양서원은 관리사 대문으로 들어가 동재 지붕 아래를 통과하여 사당 앞, 그리고 강당 뜰로 다가간다. 동재 건물의 일부가 사당과 강당으로 접근하는 통로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화산서원은 곽씨문중이 네 분의 선조를 제사지내는 곳이다. 곽준의 증조부 곽승화, 그리고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왜적과 싸웠고, 그 공을 인정받아 초계군(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가수(假守, 전쟁 중 임금이 발령장을 보낼 겨를이 없어 초유사가 대신하여 임명한 군수)로 활동하였던 곽율을 섬긴다. 곽승화는 곽안방의 아들이고, 곽율은 곽안방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이다.
화산서원은 역시 곽안방의 현손인 곽간도 모신다. 강릉부사 등을 역임했던 곽간은 대동찰방겸수은어사(大同察訪兼搜銀御使)로 있을 때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권력 센 고위관리들의 짐을 수색하여 밀수품들을 압수, 불태워버리는 등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화산서원이 모시는 한 분 더, 바로 곽재겸이다. 곽재겸은 곽승화의 현손으로, 홍의장군 곽재우의 사촌형이다. 그는 46세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전쟁 중에 임금을 대신하여 관리들을 다스리고 의병을 독려하는 관리) 김성일을 찾아가 군사와 군량미를 모집할 수 있는 계책을 제시하고, 7월 6일 대구 일원 선비들이 팔공산 부인사에서 '공산의진군(公山義陳軍, 대구 전체를 아우른 의병군)'을 결성할 때 '해안(현재의 대구광역시 동구 일원) 5면 도대장(都大將, 총대장)'을 맡았다. 그는 정유재란 때에도 의병을 이끌고 화왕산성에 달려가 곽준, 곽재우와 함께 왜적을 방어하는 데 힘을 쏟았다.
문제는, 화산리 898번지를 찾아가도 화산서원을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구지면에서 도동서원 사이의 광활한 들판과 야산이 산업단지 조성 공사에 들어가면서, 화산서원을 다시 짓기로 하고 기존 건물을 철거한 때문이다. 미처 그 사실을 모르는 채로 서원을 찾아온 나그네의 허탈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자취를 감춘 경덕사(화산서원의 사당)가 흡사 현대의 한국인들이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묵숨을 바친 의병들을 거의 잊어가고 있는 현실을 증언하는 것만 같아 공연히 마음이 쓸쓸하고 눈물겹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너무 지나친 비관일 것이다. 다시 우뚝 선 화산서원을 찾아 임진왜란 의병장 곽율과 곽재겸 선생을 기억하며 절을 올릴 날도 멀지 않았으니 말이다. 만약 그때 어린 자녀와 동행했다면, 전란이 일어나고 얼마 안 된 1592년 6월에 두 아들을 한꺼번에 왜적들에게 잃은 곽재겸 의병장의 아픔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