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의 이야기는 평택에서 개업을 한 지 두 달 이후부터 어떻게 지속해서 망해왔는가에 대한 복기이다. 개업하는 날부터 두 달 동안, 어떻게 알고 그 많은 사람이 왔다 갔는지도 불가사의지만, 또 두 달 만에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었는지도 불가사의다. 도시에서의 소문은 그토록 빠르고, 도시 사람들의 행동 역시 빠르기 때문이었다고 해석할 뿐이다.
그렇다고 매상이 형편없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보다 훨씬 나았고, 단골도 꽤 있었다. 그런데도 매달 적자 행진을 한 이유의 핵심은 터무니없는 임대료 때문이었다. 부가세를 합해서 매달 363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갔다. 평택에서는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것)에 해당하는 임대료였다. 오죽했으면 '부가세 10%는 빼달라'고 사정할 정도로 압박이 컸다.
개업 후 첫 달에는 인테리어 공사비로 긁은 카드 대금 중 8백만 원을 일시불로 갚고, 직원 월급을 주고, 임대료를 내고도 돈이 남았다. 손님이 계속 그렇게 와준다면 걱정할 게 없었다. 두 번째 달에는 남은 카드 대금 1천만 원이 돌아왔는데, 일시불로 갚기에는 무리여서 장사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이리저리 쫓아다니다 결국 신용보증기금을 받아 급한 불을 껐다. 신용보증기금 직원은 가게로 찾아와 여러 가지 항목을 평가했다. 가게가 망할지 안 망할지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 한 사람의 안목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땐 누가 봐도 잘 나가는 가게였으므로 평가는 손쉬웠다.
세 번째 달이 되었다. 내리막길의 시작이었다. 거의 온종일 붐비던 가게에 손님의 발길 뚝 끊어지는 시간대가 생겨났다. 매달 돌아오는 빚을 갚고, 월급을 주고, 임대료를 내자니 빠듯했다. 위기감이 찾아왔다. 네 번째 달이 되자, 위기감은 현실이 되어 임대료를 내고 나니, 월급이 모자랐다. 제2 금융권 문을 두드렸다. 대출은 까다롭지 않았다. 이자율이 높더라도 매달 내야 하는 금액이 많지 않았으므로 압박이 덜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식으로 대출의 뫼비우스 띠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당장 발등 위에 떨어진 불 때문에 갚아야 할 총 이자를 따지는 것은 무리였다. 설사 셈이 밝더라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잘 될 거야, 나아지겠지'라며 스스로 장밋빛 미래를 주입하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 평균 매상이 지금의 두 배가 넘었는데도 적자가 이어졌다. 한 달 수익 중 가장 큰 고정 지출을 차지하는 임대료는 블랙홀이었다. 그곳이 홍대나 분당쯤 되었더라면 임대료에 맞춰서 음식값을 올리기라도 할 텐데 단지 건물만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는, 밑도 끝도 없는 개발지구 환상만 폭죽을 터뜨리는, 미분양 사태를 빚은 프리미엄급 아파트 입주 세대 외에는 대부분 서민이 사는 동네에서 그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우리의 주메뉴는 짜장면과 짬뽕이었다. 그 무렵, 2500원짜리 짜장 현수막이 내걸릴 만큼 가격 경쟁이 심한 것이 중식이었으니 우리 가게의 5천 원짜리 짜장도 비싸다고 할 판이었다.
우리는 그제야 그 비싼 임대료가 아무 가치가 없는 숫자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임대료가 높은 건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 정도 목이 되니까 정해진 액수가 아니겠냐고 믿은, 아니 믿고 싶어 한 우리는 얼마나 순진했던가.
임대료 하루만 밀려도 이자 1만 원... 건물주는 매정했다
지나치게 높은 임대료는 건물주의 잇속을 챙겨주는, 부동산 투기꾼들과 건설 투기꾼들이 부를 강탈해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올가미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올가미에 걸린 먹잇감 신세였지만, 계약이란 걸 자발적으로 했기 때문에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과연 그 자발적 계약이 진정 자발적인가? 아니다.
이 나라 자본주의는 불공정에서 시작해서 불공정으로 끝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도자지만, 줄곧 지배자만 군림해왔다. 지배자는 권력을 이용해 부를 늘이고, 지배자의 마름들은 부를 이용해 권력을 승계해왔다.
이런 시스템하에서의 계약은 공정하기가 어렵다. 내 땅이 없고, 내 집이 없는 사람들은 평생 계약서를 작성해야 인간의 기본권인 식의주를 해결할 수 있다. 없는 땅과 없는 집이 개인의 잘못도 아닌데, 평생 짊어져야 할 업보처럼 강요된다. 그러니 자발성은 강요된 자발성일 뿐이다. 체제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는 이상은 방법이 없다.
먹는 것도 내 맘대로 할 수가 없어 온갖 화학첨가물과 GMO(유전자조작작물)가 뒤범벅인 가공식품을 피할 수 없다. 마트에 가면 수많은 식품이 있고, 그중에서 골라 먹는 자유가 있다고 떠미는데, 그건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연출된 자유이며 본질적 억압이다.
수만년 자연스럽게 이어져 오고 발전되어 온 식문화를 식품첨가물산업이 단 1세기 만에 뒤집어 버렸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나 먹을 것이 산업에 의해, 즉 지배자와 그 마름들에 의해 재구성되면서 자유를 빼앗겼다. 자본주의를 자유주의라고도 하는 모양인데, 개뿔이다. 이 자유는 99%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그렇다고 굶어 죽게 놔두진 않는다. 먹이긴 먹이되, 몸에 좋지 않은 물질을 함께 먹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물질을 먹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먹는다. 이것이 병이 되고, 보험 회사와 병원에 돈만 쏟아붓는다. 죽어도 도대체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시장의 경제 질서를 흔히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표현한다. 그냥 두면 자본주의 경제는 저절로 적절히 자원을 배분한다는 이론인데, 이 이론을 만든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정치가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경제학자의 탈을 쓴 정치가이거나 정치가의 뒷돈을 받은 경제학자이거나.
내 생각은 이렇다. 이 이론은 엉터리이며, '보이지 않는 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손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 대신 '감춰진 손'이 있다. 시장은 저절로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세상 어딘가에 순수한 시장 그 자체만 존재한다면 애덤 스미스의 이론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세계는 어떠한 사회적 법칙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통치 이념이나 지배자의 지배 야욕에 의해 굴러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감춰진 손'이고, 자본주의 하의 '감춰진 손'은 검디검다.
임대료 얘기하다 너무 나갔나? 암만해도 선거철이라 그런 모양이다. 어쨌거나 나는 8년 이상을 짜장면 팔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아주 많이 바뀌었다. 그동안 내가 배운 대부분의 공식적인 이론과 논리는 허구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치, 경제, 종교, 문화, 과학, 인문학, 한국사, 세계사 등등 그야말로 모든 분야를 막론하여 '진짜'를 알게 되었고, 매번 충격에 빠졌다. 시인으로만 살았더라면 결코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놈의 짜장면 때문에'라고 원망도 많이 하지만, '짜장면이 아니었다면...'이라고 많이 고마워하며 산다. 내 인생의 절반은 이렇게 짜장으로 시작해서 짜장으로 끝날 모양이다.
임대료로 돌아가 보자. 경기가 나빠진 책임은 기업과 정부에 있으나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들에게 떠넘겨진다. 명예퇴직, 정리해고 등으로 직업을 잃은 사람들이 밥벌이를 위해 내몰린 것이 자영업이고, 그 중 식당이 상당수다. 요리사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식자재 마트에 가면 식품첨가물회사에서 친절하게 만들어준 모든 재료가 준비되어 있으므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렇게 새로 들어올 사람이 늘 대기 중이므로 세입자가 자주 바뀌면 바뀔수록 건물주는 임대료를 마음껏 올릴 수 있어 쾌재를 부를 것이다. 땅만 있으면 돈 없이도 건물을 짓고 세입자들에게 보증금 수천, 수억씩 받아 메우면 그만이다. 마땅히 제대로 된 정부라면 보증금과 임대료에 대한 상한선을 정하고, 부동산과 땅 투기와 건설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애초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최대한 바로잡을 수 있는 '공정한 편애'를 시행하지만, 이 나라 정부는 전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임대료 메우느라 등골 빠지는 장사를 2년 동안 계속했다. 건물주는 매몰찼다. '조미료 넣어서 돈이나 벌지, 뭔 중뿔난 짜장을 판답시고 임대료도 제때 못 내고 있냐'는 것인지, 늘 못마땅한 얼굴로 지나다녔다.
부실 공사로 인테리어 때부터 비가 여러 곳 새는 것을 임시변통으로 이리 땜질하고 저리 땜질하다가 결국 가게를 접을 때까지 비 새는 곳이 남아 있었다. 그저 세입자 신세만 서러울 뿐이다. 그는 악질 건물주의 전형이었다. 임대료가 하루만 밀려도 하루에 1만 원씩 이자를 매겼다. 나는 하루 이틀 늦어질 때마다 피가 말랐고, 이자도 무섭지만, 그런 사람에게 머리 조아리는 게 너무나 싫어 빚을 내서라도 해결하려고 했다.
카드에 제2금융권, 제3금융권까지... 달력엔 빚 갚는 날짜가 빼곡
빚이 천정부지로 늘어갔다. 제2 금융권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제3 금융권으로 내려앉았다. 고리대금의 덫은 점점 커져 갔다. 나의 개인정보는 고리대금업자들의 세계에서 돌고 돌았다. 하루에도 몇 군데씩 전화가 왔으며, 지금도 걸려온다. 자주 돈이 필요했던 나는 돈 빌려준다는 전화가 반가웠고, 빌릴 수 있는 만큼 계속 빌렸다. 내 탁상용 달력에는 주말을 제외하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돈을 갚아야 하는 일정이 적혀 있었다. 직원들이 볼까 봐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했다.
비참한 날들이었다. 개업 전, 모든 직원에게 4대 보험을 적용하여 정규직으로 운영하려던 나의 계획 역시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꿈에 불과했다. 처음엔 직원들 모두 보험을 원하지 않아서 못했고, 뒤에는 적자라서 못했다. 고맙게도 매상이 줄어드는 것에 비례해 직원들은 스스로 일을 그만두었다. 여섯 명으로 시작했던 직원이 주방에는 보조 한 사람이 남았고, 홀에는 아르바이트생 한 명만이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다.
우리 부부는 자주 싸웠다. 쪼들리는 것이 우리의 탓이 아닌 줄 알면서도 다른 누구에게 화를 낼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괴롭혔다. 상황이 힘들수록 서로의 단점이 잘 드러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감싸주고 덮어주는 게 이상적인 부부 사이지만, 이상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 다행스러운 것은 싸움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루나 이틀 정도면 원치 않아도 풀어야 했다. 24시간을 한 공간에 있으면서 같은 일을 해야 하니, 계속 입을 닫고 있을 수도 없었고, 손님에게 감정노동까지 해야 하는 직업이므로 손님을 향해 웃고 얘기하다 보면 어느새 서로에게도 그러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웃을 수 있었던 이유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딸아이 기련이었다. 10개월 때 평택으로 와서 17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보내졌고, 하원 후에는 밤 10시가 되도록 가게에서 지냈다. 아이에겐 나쁜 환경이다. 그래도 기련이는 너무 잘 지냈다. 아이가 그렇게 수월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말 피폐해졌을 것이다.
기련이가 있어서 힘들어도 행복한 날이 많았고, 희망을 안고 살아갈 수 있었다. 어느 가정이든 자식 보고 사는 거다. 그러나 불임 부부가 많은 요즘, 분만실을 닫는 산부인과가 속출하고, 2018년부터는 '인구 절벽' 현상이 일어나 중고등학교가 줄어들 것이고, 이어 대학교, 학원 등등 쓰나미에 휩쓸리듯 무너질 것이라고 한다. 아이가 사라지는 세상, 버티고 살아내야 할 희망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 정말 걱정 많은 날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에도 함께 실립니다. 이 이야기는 2010년에서 2012년 사이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으며, 현재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은 평택이 아니라 제주도 화순에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