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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 가도
세월이 가도 ⓒ 이준수





올해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전에 근무했던 강릉도 작다면 작은 도시이지만 도계에 비하면 서울이었다. 도계는 삼척시에 속해 있으나 여기 사람들은 시내에 갈 때면 언제나 삼척 다녀온다고 했다. 이 지역 주민들만의 독특한 정서나 의식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탄광촌에서의 직장 생활은 여러 가지로 흥미로웠다. 그중에서도 소규모 공동체에서 나오는 긴밀한 인간관계가 인상적이었다.




우리 반은 23명의 학생들이 생활한다. 구성원들은 서로의 사정에 빤했다. 승연이(가명, 이하 모든 학생 이름 가명) 오빠가 800m 달리기 선수이고 장석이 아버지는 정문 앞 파출소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준원이는 금요일 다섯 시만 되면 도계역에 모습을 드러내고, 시영이는 장학센터에서 벨리댄스를 춘다고 했다. 심지어 홍열이와 광호는 6촌 지간이고 명현이는 명훈이 엄마를 숙모라고 불렀다. 마음 먹고 캐보면 누구 집 아침 반찬으로 뭐가 나왔는지도 알 수 있으리라.




옆집 사는 아주머니 이름도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거미줄처럼 촘촘한 관계망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물론 이런 감정은 동해시 아파트 밀집단지에서 출퇴근하는 외부인이기에 가능하다. 만일 거주지를 학교 근처로 옮겼다면 베스킨 ㅇ빈스(아이스크림 가게) 하나 없고, 연탄 공장 기계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를 느꼈을 것이다.



 
 도계 아이들 손바닥. 다른 친구들 사정을 자기 손바닥 보듯 알고 있다.
도계 아이들 손바닥. 다른 친구들 사정을 자기 손바닥 보듯 알고 있다. ⓒ 이준수







도계에는 사람을 흥분시키는 사건이 드물다. 항상 보는 이웃들, 5일장, 탄가루가 섞여 검게 보이는 산,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도 자극적이지 않다. 매달 갱신되는 멀티플렉스 영화 포스터, 방수방진을 강조하는 스마트폰 광고, 공사 중인 빌딩의 소음으로 대변되는 도시와는 사뭇 다르다. 시골생활의 담백함은 사람들에게 여유를 선물한다. 동네에 아기가 태어나면 함께 축하해주고, 등굣길에 아는 애가 걸어가고 있으면 같이 차에 태워오는 일이 흔하다.




정다운 시골의 모습은 낭만적이다. 그러나 도시에 사는 사람이 도계 주민처럼 행동하다가는 과민증에 걸릴 위험이 있다. 시시각각 바뀌는 주변 상황에 일일이 반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24시간 동안 스쳐간 인물들을 모두 기억할 수 없고, 직접 대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속사정을 고려하며 대하기 힘들다. 복잡한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도시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며, 감정 소모를 최소화한다. 냉정하고 사무적인 인간관계는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 도시 구조에 기인한다.




사채 빚에 시달리다 모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여자친구의 헤어지자는 말에 분노한 남자친구가 애인을 살해하고, 퇴근길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해도 나와 관련되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는다. 언뜻 보면 자유롭고 부담감이 없지만 한편으로 고독하고 쓸쓸하다. 조금이라도 경쟁력을 키워 남들보다 앞서 나가길 강요받는 사회에서 남에게 마음 쏟는 일은 사치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세월호도 그랬다.



 
 2014년 4월 20일에 매단 리본들. 이때까지만 해도 모두 돌아올 수 있을거라 믿었다.
2014년 4월 20일에 매단 리본들. 이때까지만 해도 모두 돌아올 수 있을거라 믿었다. ⓒ 이준수







달력을 보다가 4월 16일에 눈길이 멈췄다. 곧 세월호 2주기이다. 2014년 4월 아이들과 노란 리본에 살아 돌아오라고 손글씨 적던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달력이 두 번 바뀌었다. 실종자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불러보다가 동생들 같고, 동료들 같아서 참 많이 울었다. 그런 장면들을 가슴 깊숙이 묻어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왔다. 문득 미안해져서 오랜만에 세월호 추모곡인 '천 개의 바람'을 들었다. 임형주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여전히 아름답고 슬펐다.




4월 16일에 출근하면 애들하고 같이 '천 개의 바람'을 불러 봐야겠다. 하루에 반쪽이나마 나도 도계 사람인데 먼 이웃의 고통에 최소한의 관심과 예의를 보여야겠다.
 

#세월호#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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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미래의창 2024>, <선생님의 보글보글, 산지니 2021> 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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