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가 교육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들이 서원을 세워 과거 합격자를 교생으로 받아들여 교육과 제사를 올렸다. 이로써 본격적인 서원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즉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 서원에서 공부하게 됐으며 엄격한 학칙과 학업 분위기 등으로 인해 향교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참교육의 기능이 회복된다.
조선시대 서원은 선비들이 모여 성리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교육기관이었다. 자신들이 존경하는 스승과 선현들의 연고지에 후학들이 제향과 선비들의 교육을 위해 건립했다. 서원은 인재를 양성해 중앙정계에 배출함으로써 사림(士林)의 시대를 주도했으며, 당면 현안에 대응하는 공론을 모으고 그 해결책을 찾았다.
월봉서원은 1575년 황강 김계휘 등이 기대승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광산구 신룡동 고마산 남쪽에 망천사를 세우며 시작됐다. 임진왜란으로 망천사가 피해를 입자 1646년 산월동 동천 위로 옮겼다. 1654년에 월봉(月峰)이라 사액을 받았으며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너브실(廣谷)에 자리하고 있고 음력 3월 중정일인 4월 16일에 추모하는 제사를 올렸다.
기대승(1527~1572)의 관향은 행주로 자는 명언, 호는 고봉, 존재 시호는 문헌이다. 그가 광주에 뿌리를 둔 것은 그의 계부인 복재 기준이 기묘사화로 사사되자 일가가 광주에 자리를 잡으면서 부터다. "학문의 뜻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효도하고 우애하며 조상을 욕되지 않게 하는 인륜을 배우는 것"이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다.
고봉 기대승이 퇴계 이황(1501~1570)과 성리학에 대해 1559~1566년까지 8년동안 편지를 왕복하며 나눈 철학논쟁인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이후 조선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된다. 당시 32세의 젊은 선비 고봉과 58세의 노학자 퇴계 사이의 나이를 뛰어 넘는 두 사람의 논변과 학문에 대한 열정은 당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봉이 퇴계에게 거침없이 반론을 제기하고 퇴계는 그 반론을 겸허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인 '학덕'으로 유명해졌다. 또 고봉은 그것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행한 '용기와 수준 높은 지식인'으로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자유로운 논변은 고봉과 퇴계, 율곡과 우계로 이어졌으며 훗날 영남학파의 주리설이 퇴계의 학설에서 힘을 얻었다면 율곡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의 주기설은 고봉의 학문에서 싹이 텄다고 볼 수 있다.
고봉 기대승의 선비로써 수준 높은 지식인으로 찬사를 받은 당당한 자세와 용기는 지금도 살아 있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월봉서원에서는 '꼬마철학자상상학교' '청소년이기(理氣)진로교실' '2030청소년선비문화원정대' '선비의 하루' '살롱 드 월봉' '철학자의 부엌' '서원마을 너브실밥상' 등 조금은 별스러운 프로그램도 진행되고 있어 고봉의 정신을 새롭게 해석하는 온고지신을 실천하고 있다.
※ 사칠논변을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내용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짐의 실마리라 하고, (惻隱之心 仁之端也)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의로움의 실마리라 하며, (羞惡之心 義之端也)사양하는 마음을 예의 실마리라 하고, (辭讓之心 禮之端也)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을 지혜의 실마리라 한다. (是非之心 智之端也)칠정(七情)은 기뻐하고(희喜), 노여워하며(노怒), 슬퍼하고(애哀), 두려워하며(구懼), 사랑하고(애愛), 미워하며(오惡), 하고자 하는 마음(욕欲)을 말한다. 이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하게 된다는 사람이 가진 7가지 감정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