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향기와 함께 향긋한 봄 내음이 창문을 뚫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자꾸만 집중력을 잃게 한다. 나를 바라봐 달라고,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 늦게 퇴근하는 일상,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봄이 성큼 와 있는데도 관심이 없으니 어깃장을 놓는 것일 게다.
"어디 갔다 오니?"주말 오후, 여느 때 처럼 늦잠을 자고 일어나 늦은 점심을 먹고 조금 있으려니 아들 녀석이 어딘가 외출했다 돌아온다.
"알바 갔다 와요.""알바?"학기 중이고 군에서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놀기 바쁘고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을 텐데 알바라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딱히 주말에 할 일도 없고 해서 제 용돈은 제가 벌어서 쓸려고 알바를 시작했어요. 이번 달부터는 용돈 안 주셔도 돼요.""야, 용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걱정말고 친구들도 만나고 영화도 보고 그래. 지금 아니면 언제 놀겠니?"난 진심이었다. 그러고 나서 "너 이제 혼자서도 대학 다닐 수 있겠네?" 농담으로 툭 던졌다.
"그럼요. 용돈은 벌어서 쓰고 학자금은 대출받고 나중에 취업해서 갚으면 되지." 그냥 하는 말일 텐데 그 말 자체가 놀라웠다. 애가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구나.
'지·옥·고'에 충격 먹다
요즈음 아이들은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지난해 11월에 군에서 전역하고 대학 2학년에 복학해 다니고 있는 아들은 하나뿐이어서 그런지 늘 품안에 자식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품안에 자식이라 생각하고 마냥 어린애인줄만 알았는데 다 컸구나. 미안하고 기특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니어서 대한민국의 중산층이라고 자부하면서 사는데, 용돈 정도야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 용돈은 자기가 벌어서 쓴다고 주말을 이용해 편의점 알바를 하는 아들에게 달리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은 나이인가? 놀기도 바쁠텐데…. 안쓰러운 생각과 함께.
일단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줘야 할 것 같다. 나름 고민해서 선택한 것일 테고 세상 경험이 될 테니 지지하고 응원하는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며칠 전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KBS스페셜 지·옥·고'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지·옥·고는 지하·옥탑·고시원을 줄여서 쓰는 표현으로 하우스·렌트 푸어·월세 세대·부모보다 가난한 최초의 세대의 현재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청년들의 현실적인 모습, 프로그램이 끝나고 한동안 멍해질 정도로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시간이었다. 그간 막연히 알고 있었던 것 보다 더한 현실에 또래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그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살이 인생으로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지 그건 두려움이었다. 하나같이 열심히 사는 청년들, 지친 일상이지만 미래를 포기 할 수 없어 최악의 조건에 순응하며 발버둥치는 모습에서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답답함에 미칠 지경이었다.
이거... 남의 일이 아니구나그들의 모습에서 아들이 모습이 투영됐다. 남의 일이 아니구나 걱정이 앞섰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들의 아버지들 또한 베이비부머 세대로 산업화·민주화의 주역으로 대부분 농촌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들이 가진 건 집 한 채뿐 거의 노후준비가 안 돼 있는 세대인데 자식들까지 대를 이어 암울한 시기를 지나고 있으니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들만이라도 편히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간절함, 당장은 힘들더라도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나아질 거라는 청년들의 기대를 외면하는 현실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아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는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놀고 싶지만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자기도 모르게 알바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건 아닐까?
왠지 우울한 날이었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사치가 아닌 현실이길 하는 바람을 담는다.
덧붙이는 글 | 청년들, 그리고 그 아버지들에게 열심히 살면 더 나아 질거라는 희망이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