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불수교 130주년을 맞아 서울시립미술관(관장 김홍희)은 '일우재단(일우스페이스전시)'과 함께 아시아 최초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공공예술기관인 '국립조형예술센터(CNAP)'와 '아키텐지역현대미술기금(Frac Aquitaine)' 공동주최로 사진과 영상과 설치 등이 포함된 사진전 '보이지 않는 가족(The family of the Invisibles)' 전을 5월 29까지 연다.
이미지 홍수시대에 사는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사진을 보고 살지만 사진의 존재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질문을 던진 적은 별로 없다. 이번 전시는 규범화된 신화에 갇혀버린 사진의 허상을 깨고 사진의 본질에 접근하고 모색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이번 전시에는 '카르티에 브레송,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소피 칼, 오를랑, 메사제' 등 프랑스 작가와 '신디 셔먼, 제프 쿤스' 등 미국 작가, '길버트&조지' 같은 영국작가, '잔더' 같은 독일작가, 사진비평가 '빅터 버긴(V. Burgin)' 등 114명이 참여해 21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이전에 많이 본 스펙터클한 사진전과는 전혀 다르다.
이번 전시는 프랑스의 사진이론가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유명한 사진이론서인 <밝은 방>을 기반으로 기획된 사진전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신화를 해체하다
이번 전시는 4장으로 꾸며졌는데 전시장마다 어떤 주제로 구성되었는지 알아보자.
제1전시장 제목은 '신화를 해체하기: 지배표상과 위대한 남자들'이다. 이 제목은 롤랑 바르트가 1957년에 쓴 <신화론(Mythologies)>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의식을 깨우는 메타언어로 통해 주류미디어가 어떻게 현대사회에서 신화를 내재화하고 '부르주아' 계층이 이걸 어떻게 소비하고 유통하는지 등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위에 '허구'란 작품은 사진작가이면서 개념미술가이기도 한 '에두아르 르베'가 연출한 사진으로 우리시대 신화의 주인공이 어떻게 이 세상에 탄생하는지를 한눈에 알게 해준다. 또한 '제프 쿤스'는 자신의 전시홍보용 사진에서 스스로 예술가의 신화를 부수는 파격도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신디 셔먼'은 바로크 풍 자기에 루이15세 애첩으로 알려진 '퐁파두르 부인' 사진을 넣은 작품을 보인다. 우리는 흔히 그녀를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사치와 허영의 화신으로 보는데 그녀를 기념비적 건물을 설계한 문화애호가로, 계몽주의자로 그 위상을 치켜세우면서 제프 쿤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남성 중심의 신화를 깨는 것이다.
1955년 뉴욕현대미술관 '인간가족'전 비판
1955년 뉴욕현대미술관(MoMA) 25주년을 기념해 68개국이 참가하면서 503점을 선보인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 전은 역대 최고의 사진전으로 칭송받는다. 1957년 서울 경복궁에서도 이 전시가 열렸고 관객 30만 명이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근현대가 낳은 신화를 해체시키려고 한 롤랑 바르트가 보기에 이 사진전은 너무나 문제가 많았다.
이 사진전이 인류가 희로애락을 같이 나누는 한 가족이라는 보편성을 근거한 휴먼드라마를 연출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롤랑 바르트 생각은 달랐다. 무엇보다 간과해서는 안 되는 건 이 전시가 가족을 신화화하면서 개인을 배제시켰고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가려버렸다는 것. 특히 눈에 안 보이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파묻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또 그가 보기에 이 전시는 문화다양성도 무시됐고 인류애라는 신화 속에 오히려 공동체적 가치를 산산조각 냈으며, 신 냉전주의와 미국패권주의(팍스 아메리카나)를 복원시켰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연환경파괴를 경고하는 히로시마 원폭사진은 진본이 아니고 미국핵실험 때 찍은 것으로 대체되었음을 지적한다.
'글쓰기영도' 개념, 사진에도 적용
이번에는 롤랑 바르트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글쓰기영도(zero point)'에 대해 알아보자. 이 개념은 1953년 그가 같은 제목의 책에서 주장한 것으로 글쓰기를 할 때 모름지기 머리에 담긴 기존의 정보와 지식을 싹 지우고 백지 상태가 되어야 가장 본원적이고 창조적 글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걸 또한 '중성적 글쓰기'라고도 한다.
제2전시장 '중립 안으로 사진의 0도'라는 제목은 바로 사진을 찍을 때도 글쓰기 할 때처럼 기존의 머릿속 개념을 미련 없이 지워버리라는 주문이 포함돼 있다. 다시 말해 진하게 화장을 한 것 같은 사진을 탈(脫)신화화 하려면 눈금을 0도에 놓고 맨 얼굴 같은 맨 사진 즉, 중립적이고 제3의 관점으로 사진 찍기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맹인도 볼 수 있게 하는 사진(?)
제3전시실의 주제는 '보이지 않는 이들(The invisibles)'이다. 사회적 약자나, 거리의 행인이나 할렘가의 흑인들, 집에서 버림받은 아이들, 시각장애자, 정신박약아 등을 사진에 노출시키는 것이 중대함을 다시 언급한다.
이를 주제로 한 '소피 칼' 작품을 하나 보자. 그녀는 1954년 파리 출생으로 일상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을 몸소 겪은 후 그걸 소재로 하는 개념미술가다. 그녀는 80년대 시각장애인을 찾아가 그들과 인터뷰하고 가장 아름답게 본 것이 뭐냐를 물은 다음 그 답변을 텍스트와 사진으로 재구성해 작품화한다.
위 '맹인들(15)'이 그런 작품이다. 사진의 왼쪽 여성은 눈을 뜬 것처럼 보이나 날 때부터 맹인이다. 작가가 뭐가 가장 아름다웠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베즈레이 성당에서 본 그리스도상이 가장 아름답고 그걸 또 보고 싶다"라고 답했고 오른쪽 상단액자에는 그걸 적어놓은 것이다. 그 아래는 맹인 여자가 좋아한다는 성당을 작가가 찾아가 찍은 것이다.
이런 시도는 관객에게 묘한 호기심을 일으키면서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비가시성의 가시성'이라는 이론이 얼마나 타당성 내지 가능성이 있는지 살짝 엿보게 한다.
2가지 사진, '스투디움(studium)'와 '푼크툼(punctum)'
이번 전시의 기반이 된 <밝은 방>에서 바르트는 사진을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로 나눈다. 전자가 그냥 좋은(like) 사진이라면 후자는 옆구리가 팍팍 찔릴 정도로 애착이 가는(love) 사진을 말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푼크툼은 충동과 파열이 강렬해 혐오스럽게 보일 수도 있단다. 그리고 보도사진이나 포르노에는 푼크툼이 없단다.
한 생명이 처음 빛을 보는 감격을 전하는 '바쟁'의 작품 '탄생'에서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을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여기서 이 작가가 강조한 건 역사적 사건이나 신성한 가족보다 개인이 더 귀중하다는 관점인데 이는 바르트가 깨려 한 가족 신화와도 통한다.
또 이 책에서 롤랑 바르트는 사진에서 중요한 개념이 하나 추가되는데 그건 바로 동시대미술에서처럼 사진에서도 시각성과 함께 음악성, 촉각성 등 오감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하나의 사진을 보기 위해서 눈을 감는 게 낫겠다. 사진은 시각의 문제만이 아니라 음악의 문제다. 절대적인 주관성은 침묵의 어떤 상태나 노력에 의해서만 도달한다"라는 그의 글을 읽으면 그가 사진에서 얼마나 음악성 등을 중시했는지도 알 수 있다.
"작가의 죽음과 관객의 탄생"
그리고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책에서 "저자가 죽어야 독자가 탄생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작가는 죽었다'라는 이 도발적 선언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나 푸코의 "인간은 죽었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이는 또한 백남준이 1963년 독일에서 첫 전시에서 열면서 도입한 개념인 "전시의 주인은 작가가 아니고 관객이다"와 동일선상에 있다.
마지막 제4전시장의 제목 '자아의 허구: 친밀함, 자서전, 전복(supervision)'은 바로 '작가의 죽음과 재기'라는 맥락에서 전시 것으로 여기서 '자아의 허구'란 기존의 눈먼 자아의 영역과 가족의 신화에서 벗어난 차별화된 과거와는 전혀 다른 개인을 뜻한다.
이 전시장 입구에 '빈센트 미센(V. Meessen)'이 1975년 바르트 자서전에서 쓴 첫 문장 "이 모든 것은 소설 속 화자가 이야기하는 것이다(Tout ceci doit être considéré comme dit par un personnage de roman)"를 인용한 네온작품으로 자신을 소설 속 화자로 놓은 것은 바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작가의 죽음'에 대한 은유로 보인다.
미학자 진중권은 이에 대해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찍는 자'가 아니라 '사진에 찍히는 자'와 '사진을 보는 자'의 입장 즉 '수용자 미학'으로 사진이론을 구성했다고 말한다.
기존의 미적 통념을 뒤집는 사진
그뿐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비너스는 우리가 익히 봐온 비너스와는 사뭇 다르다. 위 '아리안 로페즈 후이치'가 찍은 '맨해튼에서 온 비너스'가 그런 예이다. 이는 마치 1908년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Willendorf) 근교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빌렌도르프 비너스'를 닮았다. 그는 이렇게 미의 우상파괴자로서 우리의 통념을 허물어버린다.
그는 또 "좋은 사진은 내가 지식과 교양을 몰아낸 때, 내가 야만인임을 깨달을 때, 내가 전혀 심미적이지 않은 사진을 봤을 때 감동을 받는다"라고 했는데 이는 그의 친구인 '레비-스트로스'가 그의 책 <야생적 사고>에서 밝힌 개념과 통한다. 야생적 사고란 결국 서구의 근대 신화를 부정하고 야만과 문명을 구분하는 이분법이 오류라고 보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의 사진애착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밝은 방>도 실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한 책이다. 또 제4전시실에 '낸 골딘(Nan Goldin)'의 대형3면 사진작품이 있는데 작가의 언니가 사춘기 때 반항하다 수용소에 갇혔고 19살엔 자살을 감행한 것이 그 주제이다.
또한 그는 흑인소년이 장난삼아 백인여성에게 휘파람을 불었다가 백인남성에게 몰매 맞아 죽게 되는 사건을 다룬 사진을 자신을 추동시키는 '푼크툼'으로 여겼다. 그래서 진중권도 그의 사진미학을 "주제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상처로서의 사진"이라고 봤다.
끝으로 이번 사진이야기를 마무리해보자. 심포지엄에서 내처겔 박사는 "어느 날 '니체'는 길을 가다 한 마부에게 채찍질당하는 말을 보고 참지 못해 쓰려지면서까지 몸을 던지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게 바로 롤랑 바르트스타일"이라고 했는데, 맑시스트인 롤랑 바르트가 보는 사진의 관점은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한불수교130주년] 서울시립미술관-팔레드도쿄 교류프로젝트'
이 프로젝트는 서울시립미술관과 파리에 있는 팔레드도쿄(파비용) 두 미술관의 협업으로 진행된 전시다. 성별, 국적, 문화가 다른 한국, 필리핀, 영국, 프랑스 등 7명의 작가가 2015년 11월에 파리에서 만나고 또 올 3월 19일부터 4월 4일까지 3주간 서울에 다시 만나 정보사회에서 체득한 엇갈린 삶의 경험을 서로 다른 언어로 녹여냈다.
그 과정에서 두 도시에 대한 해석과 견해에서 편차는 컸고 물리적, 정신적, 문화적, 언어적 장벽 높았으나 오히려 보라는 듯이 그런 난제를 극복하고 이를 더 좋은 창작의 자극제로 삼아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위트와 유머, 스릴과 풍자, 유쾌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맛보게 한 <도시괴담>은 우리시대의 우화 같다.
덧붙이는 글 |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2-3층과 일우스페이스(중구 서소문동 41-3) 02)2125-8928 2시와 4시 작품설명회 도슨트 운영 http://sema.seoul.go.kr/korean/index.jsp '보이지 않는 가족'전과 함께 '도시괴담'전이 동시에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