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 까꿍이오늘도 하교 후 까꿍이는 바쁘다. 아빠가 퇴근하기 전까지 숙제를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숙제를 미리미리 안 해 놓으면 아빠가 혼내서? 아니다. 아빠 보는 데서 숙제를 하게 되면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까꿍아. 오른손으로 써야지." 그렇다. 까꿍이는 왼손잡이다. 세 살 때쯤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드는데 오른손보다 왼손이 먼저였다. 어라? 이 녀석은 왼손잡이인가? 태어나서 가족 중에서는 처음 보는 왼손잡이였다. 그때야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갈등의 시작은 녀석이 글씨를 쓰면서부터 시작됐다. 나는 녀석이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야. 까꿍아. 글씨는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으로 써야 하는 거야.""왜? 난 왼손이 편한데?""안 돼. 이거 봐. 글씨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건데 왼손으로 쓰면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쓰게 되면서 몸이 삐뚤어지잖아. 자세가 안 좋아. 나중에 몸이 아플 수도 있고. 그러니까 오른손으로 써야 해.""치. 너무 힘든데. 그럼 그림은 왼손으로 그려도 돼?""그림? 그래. 글씨는 오른손으로 쓰고, 그림은 왼손으로 그려. 그렇게 양손잡이가 되면 생활하기 더 편할 거야."
거기까지가 나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림은 양보하더라도 글씨만은 오른손으로 쓰게 하고 싶었다. 어쨌든 우리의 모든 글자 체계가 오른손잡이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상 왼손잡이는 불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지하철 출입구부터 가위, 컴퓨터 마우스 등등 우리 사회에서 왼손잡이는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다행히 이런 내게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다. 양가 부모님이셨다. 특히 아버지는 가장 강력하게 손녀의 오른손 글씨를 주문하셨는데, 전화 통화를 하거나 얼굴을 볼 때마다 매번 오른손으로 글자를 쓰냐고 질문하셨다. 그때마다 말끝을 흐리거나 얼버무리는 까꿍이. 대신 녀석은 오른손으로 편지라도 썼으면 세상이 떠나갈 듯 자랑을 해댔다.
반면 아내는 나의 강요에 회의적이었다. 오른손이 왼손보다 글씨 쓰기는 편할 수 있겠지만, 까꿍이가 스트레스를 느끼느니 왼손으로 쓰게 놔두자는 의견이었다.
"그냥 왼손으로 쓰게 놔두자.""안 돼. 나중에 자세 삐뚤어지면 어떡해. 최소한 글씨라도 오른손으로 쓰게 해야지.""하긴. 요 며칠 전에 허 지부장을 만났는데 시집 간 딸이 그러더래. 거기도 왼손인데 시집에서 왼손으로 과일 깎으려니까 부끄러웠다고. 자기 어렸을 때 오른손 좀 쓰게 해주지 그랬냐고.""그치? 거봐. 그러니까 오른손으로 글씨 쓰게 해서 양손잡이로 만들어야 해.""그런데, 그래도 이렇게 강제로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세계에서 우리만 강력하게 오른손잡이를 고집한다던데? 오바마도 왼손잡이더만.""몰라. 어쨌든 오른손으로 글씨 쓰게 할 거야.""이럴 때 보면 당신 참 보수적이야."졸지에 '보수적인 아빠'가 됐지만, 그래도 까꿍이의 오른손 글씨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의 고집이 궁극적으로 아이를 위한 것이라는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편지 쓰기 싫어"
문제는 까꿍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글씨를 쓰면서 나타났다. 결국 초등학교 1학년생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은 글씨 쓰기였는데, 까꿍이가 집에서 숙제라도 하려고 하면 아빠의 잔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으니 문제가 될 수밖에.
까꿍이는 최선을 다해 아빠에게 글씨 쓰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녀석은 4월부터 받아쓰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100점을 맞아도 내게 드러내놓고 자랑을 하지 못하는 듯 했다. 받아쓰기 100점 맞은 공책을 아빠에게 보여주면 칭찬과 함께 오른손으로 썼냐는 질문이 뒤따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했는데 아내가 조금 속상한 말투로 내게 까꿍이와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했다. 학교에서 해외 친구에게 편지 쓰는 프로그램을 하는데 녀석이 귀찮다며 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 굿네이버스의 해외아동결연으로서 해외로 편지도 쓰고, 성금도 보내고, 편지 쓴 아이들 중 몇 명을 뽑아 정부에서 시상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까꿍아, 편지 안 써?""응. 안 할래.""왜? 좋은 일 같은데.""선생님이 편지는 꼭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그냥 받아온 (해외아동 현실에 관한) CD만 봐도 된데.""그래? 너 혹시 아빠 앞에서 오른손으로 편지 쓰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냐?""아냐. 귀찮아서 그래."녀석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치 상 아빠 앞에서 오른손으로 글씨 쓰기가 싫어서인 듯했다. 아내한테는 그럼 편지 쓰게 하지 말라고, 나도 이번 정권에서 주는 상은 받기 싫다며 농담조로 웃어넘기고 말았지만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가 스트레스로 글도 쓰기 싫어하는데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게 하려는 나의 고집이 과연 옳은지 헷갈렸다. 다행히 아이는 CD를 본 이후 편지를 썼지만 나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왼손잡이에 대한 편견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 진다고 나 같은 아이 한 둘이 어지럽힌다고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그런 눈으로 욕하지 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난 왼손잡이야 - 패닉 <왼손잡이>
어쩌면 왼손잡이 아이에게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라고 하는 것은 매우 잔인한 일일지도 모른다. 타고 태어나기를 왼손이 편한 아이에게 굳이 오른손을 강요하고, 그것을 통해 의도하지 않았어도 아이가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면 그것만큼 폭력적인 일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왼손잡이 아이는 부모의 참관수업 때 그 시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글씨도 못쓴 채 울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럼에도 내가 오른손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인류의 90%가 오른손잡이인 이상 왼손잡이는 평생 일정 부분 불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다행히 오른손잡이가 정상이고 왼손잡이가 비정상이라는 멍에는 벗어났지만, 어쨌든 세상은 오른손잡이를 기준으로 표준화 돼 있고, 그에 따라 왼손잡이는 소소하게라도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부모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나의 자식이 불편을 겪지 않길 바라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바람이다. 가능하면 녀석이 오른손잡이가 되도록,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왼손만큼 오른손을 쓸 수 있도록 가르치고 싶을 수밖에. 더욱이 자식이 어리면 이 생각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아직 아이가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만큼, 부모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이 까꿍이의 편지쓰기 거부로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왼손잡이보다 오른손잡이가 더 편하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의 강요가 녀석에게 더 큰 스트레스로 돌아갈 수도 있음을 확인한 만큼, 이제는 까꿍이가 그 불편을 책임질 나이가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모로서는 녀석이 오른손으로 글씨 쓰기를 바라지만, 녀석이 기꺼이 그 불편함을 감수하겠다고 스스로 결심했다면 그 역시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아마도 이런 패턴은 아이들이 커가면서 계속될 것이다. 어릴 때야 부모로서 내가 녀석들의 우산이 돼 대신 판단하고 결정하겠지만, 아이들이 머리가 굵어가면서 자신의 생각과 행위에 책임을 질 나이가 되면 그것들을 존중하고 내가 그만큼 욕심을 버리는 일이 잦아질 것이다. 물론 부모로서 미련과 아쉬움은 남겠지만, 나의 부모님이 내게 그랬듯이 나도 조금씩 아이들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며 하나의 주체로 서는 아이들에게 적응하게 되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옆에서 무의식적으로 왼손으로 글씨를 쓰고 있는 까꿍이에게 더 이상 진지하게 잔소리를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른 뒤 오른손으로도 좀 써보라고 가볍게 핀잔만 줄 뿐이었다. 아직 녀석이 부모의 우산 밑에 있다고 판단하는 만큼이었다. 이에 찡긋 웃어주는 까꿍이.
까꿍아. 그래도 아빠는 네가 왼손보다는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면 좋겠단다. 물론 이 글 또한 컴퓨터 자판으로 치고 있는 시대에 이 무슨 아집인가 싶기도 한데, 원래 부모란 게 이렇게 사서 걱정을 하는 존재이니 네가 이해해주렴. 아빠의 굳어진 생각이 매일매일 콩나물 자라듯 성장하는 너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조금은 염려되지만, 그래도 노력해보련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