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태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입니다. 누군가가 2000년대에 나온 주목할 만한 한국 문학으로 그의 세 번째 단편집 <늑대>(2009)를 꼽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나 김연수 작가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2005)를 추천하던 때라 그의 선택은 꽤 특별해 보였고,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어 곧바로 책을 구해 읽었습니다.
과연 <늑대>는 그런 상찬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었습니다. 특히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위해 탄탄한 서사 구조를 만드는데 신경을 쓴 것과 한국이라는 좁은 땅에 갇히지 않고 중국과 몽골에까지 이야기의 무대를 넓혀나간 것은 기존의 한국 '순수' 소설과 확실히 구별되는 지점이었지요.
그와 비교했을 때 작가의 네 번째 작품집 <두번의 자화상>(2015)은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작가는 여전히 잘 구축된 서사를 추구하지만, 더이상 경계 너머를 꿈꾸지 않습니다. 대신 한국 사회 내부의 '기억'에 주목합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무정한 자본의 논리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남긴 상흔을 찬찬히 돌아보면서요.
첫 작품 <소풍>은 차곡차곡 쌓아올린 디테일이 어떻게 한순간에 비극의 요소들로 바뀔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잘 고안된 이야기입니다.
작중 화자가 비극의 당사자인 장모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인상적인데, 이것은 이번 작품집 전체에 걸쳐 작가가 삶의 비극에 대해 일관되게 취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배웅>부터 <망향의 집>까지 일곱 편은 각박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점점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본의 논리와 관료주의, 일그러진 현대사가 만들어낸 슬픔과 아이러니가 배어 있지요. 제각기 다른 톤이지만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갖추고 있어, 작가의 이야기 만드는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이주민 노동자와 나누는 정이 애틋한 <배웅>, 본격 '순수' 소설 풍의 <낚시하는 소녀>, 시골 마을의 개밥그릇을 노리는 골동품 판매상이 등장하는 포복절도할 블랙 코미디 <밥그릇>,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풍성한 풍자물 <영접>, 씁쓰레한 뒷맛을 남기는 <로동신문>, 소설과 르포 중간쯤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성묘>와 <망향의 집>까지 한 사람의 소설집에 실린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스타일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아홉 번째로 실린 <국화를 안고>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집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사의 아픔이 남긴 흉터와 여전히 상존하는 빈부 격차와 세대 갈등의 문제를 함께 다루면서 오늘날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나직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이야기하거든요.
여기에 바로 뒤이어 붙은 <지워진 풍경>은 과거의 역사가 만든 비극이 어떻게 개인의 불행이 되었고,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현재의 문제로 남게 되는지 보여줍니다. 그럼으로써 앞의 작품에서 제기된 작가의 문제 의식을 든든히 뒷받침합니다.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소문의 형식을 빌어 소년의 뒤늦은 사랑 고백을 그린 <소녀들은 자라고 오빠들은 즐겁다>와 어머니로부터 들은 구전 설화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마음가짐을 내비친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는 소품이지만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인간의 기억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라는 형태로 전해진다면, 소설은 그것을 문자로 남겨 오래 보존하는 작업일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작가의 주제 의식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까요. 최근 들어 '순수 문학'을 표방하는 많은 한국 소설들은 설득력 있고 수준 높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 아름다운 문장을 갈고 닦거나 개성적인 문체를 실험하고, 특이한 소재에 집착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부족함을 덮고 지나가려 하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사회가 잊지 않았으면 하는 기억들을 이야기로 남기기 위해 분투한 전성태 작가의 노력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이 책 <두번의 자화상>은 그의 절실함이 낳은 또 하나의 보석 같은 결과물입니다.
덧붙이는 글 | <두 번의 자화상> 전성태 지음 / 창비 펴냄 (2015. 2. 27.)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