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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원서원의 강당인 전귀당
백원서원의 강당인 전귀당 ⓒ 정만진

백원서원은 대구광역시 동구 도평로51길 18, 구주소로는 도동 487번지에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안내해서는 대구 지리를 잘 아는 사람조차도 백원서원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가장 적당한 소개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 도동 측백수림 앞'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안내를 하면 찾아오지 못할 사람이 없다.

백원서원은 효자로 이름난 서시립(徐時立, 1578∼1665) 선생을 기려 1692년(숙종 18)에 세워졌다. 물론 1864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된 역사는 여느 서원이나 다를 바 없다. 1945년에는 재실 기능을 하던 전귀당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이듬해에 선비들이 뜻을 모아 전귀당을 재건했고, 1991년에는 사당인 경덕사도 건립하는 등 서원의 면모를 복원했다.

그런데 백원서원을 찾아가 보면 강당인 전귀당 왼쪽에 백원서원 묘정비(廟庭碑, 서원의 내력을 새긴 비)도 있지만, 대문 오른쪽 담장 안쪽에 '전귀당(全歸堂, 서시립의 호) 서선생(徐先生, 서시립) 모부인(母夫人, 어머니) 강씨 효행비(康氏 孝行碑)'도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서원 안에 부인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니?

서원 안에 부인을 기리는 비석도 세워졌다!

일단 서시립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본다. 서시립은 임진왜란 초 적들의 침탈로 불에 타 무너진 대구 최초의 서원 연경서원을 종전 이후 복원하는 데 크게 기여한 선비이다. 그는 당시 연경서원 원장이엇다. 하지만 서시립은 그보다도 효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서시립의 어머니를 기려 세워진 빗돌
서시립의 어머니를 기려 세워진 빗돌 ⓒ 정만진
그의 효행이 사람들에게 회자된 것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부터였다. 1592년 4월 21일 청도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진입해온 왜군은 이틀 뒤인 23일 팔공산 아래까지 몰려왔다. 당시 열다섯 살이던 서시립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팔공산 서봉 턱밑의 삼성암으로 피란을 갔다.

어린 그가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부인사 뒤편의 가파른 오르막 끝자락에 있는 삼성암으로 간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의병에 참가한 때문이었다.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출현한 왜적들이 불과 8일만에 파잠(수성구 파동)에 나타났으니 대구 사람들로서는 어느 누구 가릴 것 없이 모두들 경황이 없었다.

왜적의 침탈을 맞아 대구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서사원의 <낙재일기> 1592년 4월 23일자의 기록이 잘 증언해준다. 일기는 '정오에 왜구 10여 명이 팔거(칠곡) 도덕봉 고개로부터 용진 파계사 아래로 들어왔다. (중략) 대포 소리가 산을 진동시키니 아버지와 아들이 숨을 곳을 서로 다투고 여자들이 모두 풀을 잘라 햇볕을 가렸다. (저녁에 적들이 소와 말을 끌고 돌아간 후에야) 비로소 바위구멍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15세 서시립, 할머니와 어머니 모시고 팔공산으로 피란

당시 서시립의 나이는 겨우 열다섯이었다. 하지만 서시립은 조금도 겁내지 않고 혼자 산 안팎을 돌아다니며 먹을거리를 구해와 할머니와 어머니를 봉양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본래의 집에서 평화롭게 살았더라면 그렇게 끼니를 걱정할 형편과 마주칠 일도 없었고, 왜적들이 쏜살같이 대구에 쳐들어오지만 않았더라도 피란을 떠나기 이전에 식량을 챙겨서 왔을 것이므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상황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터였지만, 지금은 목숨을 걸고 멀리 마을까지 내려가 빈 집이나 밭을 뒤져 입에 풀칠할 거리를 구해야 했다.

 서시립이 임진왜란 초기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 생활를 했던 팔공산 삼성암 터. 부인사에서 가파른 등산로를 올라 거의 서봉 정상부까지 닿으면 나타난다.
서시립이 임진왜란 초기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 생활를 했던 팔공산 삼성암 터. 부인사에서 가파른 등산로를 올라 거의 서봉 정상부까지 닿으면 나타난다. ⓒ 정만진

서시립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지극한 효성을 본받으며 자란 아이였다. 어머니 강씨는 진작부터 대단한 효부로 이름난 며느리였다. 시어머니는 노령으로 병석에 누워 지냈는데, 어느 추운 겨울날 "아가야, 꿩고기가 먹고 싶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사람이 뭔가가 먹고 싶은 것은 몸이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씨는 알고 있었다. 즉 강씨는 꿩고기가 시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강씨는 맹추위에 폭설까지 유별한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며칠을 두고 내내 산과 들을 돌아다녔다. 물론 꿩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꿩이 걸어다니는 강씨 손에 저절로 잡힐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까닭도 없이 꿩이 땅 위를 엉금엉금 기어다니거나 쓰러진 채 누워 있다가 강씨에게 발견될 턱도 없었다. 이윽고 강씨는 지치고, 손발도 얼고, 드디어 주저앉고 말았다.

 백원서원의 내력을 기록한 비석
백원서원의 내력을 기록한 비석 ⓒ 정만진

강씨는 꿇어앉아 "천지신명이시여, 시어머님의 병을 낫게 하려면 꿩이 있어야 합니다. 제발 저에게 꿩을 내려주시어 시어머님의 약으로 쓸 수 있게 해주시고, 며느리로서 맡은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하고 기도를 올렸다. 그때 하늘에서 꿩 한 마리가 강씨의 무릎 앞에 툭 떨어졌다.

아까부터 하늘에는 매가 빙빙 돌고 있었다. 착한 강씨를 돕기 위해 하늘이 보내준 매였다.  하늘의 명령을 받은 매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꿩 한 마리를 채서 강씨에게 선물로 내려주었던 것이다. 꿩고기를 잘 먹은 시어머니는 병석에서 툴툴 털고 일어섰고, 사람들은 모두 강씨의 효성에 하늘이 감복한 결과라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며느리의 효성에 감동한 매가 잡아다 준 꿩

비로소 서원 안에 '강씨 효행비'가 세워져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어머니에게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란 서시립이었으니 겨우 열다섯밖에 안 되었으면서도 그렇게 겁도 없이 왜적들이 활보하는 팔공산 아래를 돌아다니면서 가족을 부양할 식량을 구할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일어난다.

 서원의 정문
서원의 정문 ⓒ 정만진

물론 서시립의 효행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결같이 계속되었다. 연로하신 부모를 위해 얼어붙은 겨울 강의 두꺼운 얼음을 깨어 물고기를 잡고, 찬바람이 쌩쌩 부는 한겨울 야산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캐는 일도 힘들지 않고 해내었다.

이제 음식을 씹을 수 없을 만큼 노쇠해진 할머니를 위해서도 서시립은 갖은 노력을 다했다. 서시립은 호리병을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부인들로부터 젖을 얻어 할머니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다. 젖은 액체이므로 씹을 수 있는 이빨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유용한 건강식인 것이다.

1597년에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 서시립의 가족들은 재차 산 속에 숨어서 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식량 구하기가 지난 1592년의 임진왜란 때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가 '전란에다 기근이 겹쳐 경기, 전라, 경상도에서 굶어죽는 자가 속출하는 등 백성들이 곤경에 처해 있어 의병에게 군량을 내려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증언하는 바와 같이, 오랜 전쟁과 거듭된 흉년 탓에 애초에 먹을 만한 농산물이 거의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군들의 움직이는 양상 또한 지난번과는 아주 달라서 서시립은 물론이고 조선인들이 임의로 돌아다니면서 먹을거리를 구하는 일도 매우 어려워졌다. 이에 대해서도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는 '임진란 초기에는 일본군의 전선이 거의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병력이 분산되었으나 정유재란에서는 일본군이 항상 대군으로 작전을 하였기에 소수의 의병으로서는 성과를 올리기가 극히 어려워 의병의 활동이 미미하였다.'라는 참고 진술을 해준다. 그래서 '소수의 의병에게는 향토에 침입한 영세한 적을 소탕하기도 벅찬 일'이 되었다. 정유재란 당시 경상도 일대가 온통 왜군들 천지였다는 말이다.

 백원서원 정문으로 이어진 담장, 정문 오른쪽의 강씨부인 효행비 비각도 담장 너머로 보인다.
백원서원 정문으로 이어진 담장, 정문 오른쪽의 강씨부인 효행비 비각도 담장 너머로 보인다. ⓒ 정만진

그런데도 서시립은, 가까운 곳에서 먹을거리를 구할 수 없게 되자 멀리 부산의 동래까지 걸어서 왕복하며 어른들을 봉양했다. 당시 예조판서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이 연경동 뒤 태봉에 있는 광해군 태실과 관련한 일로 대구에 왔다가 서시립의 효행을 들었다.

이호민은 전쟁 8년 동안 변함없이 지극정성을 다한 서시립의 효행에 감동하여 임금께 가져가던 고기, 꿀 등을 그에게 선물로 내려 할머니를 봉양하는 데 보태게 했다. 그러면서 서시립의 집을 '全歸堂(전귀당)'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호민의 이 말은 유교의 인륜적 가치관에서 볼 때 서시립에 대한 최고의 극찬이었다.

임금께 가져가던 진상품을 서시립에게 주는 예조판서

왜냐하면 이호민은 자식으로서 더 이상 잘할 수 없을 만큼 서시립이 효자로 살았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전귀'는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상하지 않고 잘 유지하였다가 죽을 때에 온전(全)하게 부모께 돌려(歸)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전귀는 증자가 "전귀함으로써 내 걱정이 없어졌다(以全歸 爲免矣)."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물론 여기서 이호민이 전귀를 원용한 것은 서시립이 평생에 걸쳐 몸을 잘 보존하였다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아무 데도 다친 데 없이 고운 신체로 하늘나라의 부모에게 돌아갔다는 소극적 평가가 아니다. 이호민이 말하는 전귀는 서시립이 온몸을 바쳐 부모를 봉양했다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감히 흉내내기 어려울 만큼 온 정성을 다하여 효도를 실천했다는 상찬인 것이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표지석. 사진의 오른쪽에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인 도동 측백수림의 일부가 보인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표지석. 사진의 오른쪽에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1호인 도동 측백수림의 일부가 보인다. ⓒ 정만진

서원 이름 백원(百源)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시립이 죽자 조정에서는 큰 효자로 인정하여 정려를 내려보냈고, 선비들은 1692년(숙종 18) 서원을 건립하여 그를 모셨다. 그리고 백원서원이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서원이 처음 세워진 일대에는 백원동이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백원동은 뒷날 부르기 편하게 백안동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공산초등학교 뒤편이다.)

나라 안의 모든(百) 성(姓)씨의 사람들을 백성(百姓)이라 한다. 원(遠)은 근원, 원천이다. 즉 백원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백원은 <효경>과 <동몽선습> 등에 나오는 '사람의 행실은 오륜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지만 특히 효가 모든 행실의 근원이다(唯孝 爲百行之源.).'라는 가르침에서 태어났다. 서시립도 '효행잠(孝行箴)'에서 "효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라고 강조했다.  

이호민은 서시립과 대구 사람들에게 시 한 편을 남기고 한양으로 돌아갔다.

達城孝子徐時立 달구벌의 효자 서시립을
其孝人稱類厥慈 사람들은 어머니의 효라고 말하네 
今日偶看三省錄 오늘 우연히 삼성록을 읽어보니
有慈如此有兒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을 느끼겠네 

삼성록은 서시립 부자가 팔공산 부인사 뒤편 삼성암에서 피란 생활을 하면서 겪은 임진왜란의 실상을 기록한 글이다. 이호민은 시를 통해 서시립과 그의 어머니 강씨의 2대에 걸친 지극한 효성을 칭찬하고 있다. 서시립을 모셔 건립된 백원서원 안에 그의 어머니 강씨를 기리는 효행비가 세워진 까닭을 이제야 분명히 알겠다.


#백원서원#전귀당#서시립#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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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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