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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때문에 광화문 광장에서 전영관 시인을 처음 보았다. 마른 체격에 좀 큰 키, 사람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성품인 듯 했다. 그를 기억하는 것은 4.16 아픔을 기록한 <슬퍼할 권리>를 그가 썼기 때문이다.

이따금 자신의 글을 들고 낭독 자리에 서기도 하던 시인이 쓰러졌다 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가 다시 일어나 글을 쓰고 독자들과 얼굴을 마주하길 바라며 이별의 시간을 견뎠다. 시인은 글로 다시 만나기를 바라던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별과 이별하기>라는 산문집으로 독자들에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전영관 산문집 <이별과 이별하기>
전영관 산문집 <이별과 이별하기> ⓒ 삼인
시인은 이별과 이별하기 위해 줄곧 사랑을 해왔노라고 고백하는데 그 고백은 사실일 것이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그 모든 순간이 관계이자 사랑이며 한편으론 이별이니 말이다.

시인은 '사랑과 만남으로부터 생을 격리시킬 수 없는 우리에게 이별은 언제 누구에게나 돌발하는 수퍼박테리아 감염병인지 알 수 없으면서 우리는 이별한다'고 말하지만 이별은 모든 관계 속에 준비된 필연이 아닐까.

3부로 엮여진 산문집은 1부 여자, 2부 남자, 3부 정반합이란다. 그는 이별에 특별한 레시피나 앱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며 이별이 변주되는 다양한 무늬를 봐 달라 주문한다. 다양한 이별의 양상을 콜라주 한 것이니 그 안에서 다양한 이별의 결과 무늬를 찾다보면 나름의 이별 공식을 찾게 될런지도 모른다.

시인이 '이별'이라는 주제를 들고 나온 것은 시인 자신의 갑작스러운 쓰러짐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한참 사랑에 열중할 때 이별을 예감하는 사람은 없다. 치열한 생의 질주 중에 예기치 않은 사건이나 멈춤을 예견하는 사람은 없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별은 늘 있어 왔지만 예견치 못한 일이 되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처가 되는 까닭은.

심지어 시인은 이별을 범죄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이별은 만남이나 사랑의 시작 속에 함께 배태되어 자라나는 샴쌍둥이 같은 것이다. 시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다만 젊음의 순간, 사랑의 열정이 넘치던 그 순간만은 이별의 시간을 예감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시인은 이제 승부를 내야한다면 패배자가 되어 빙그레 웃으며 돌아가겠다고 기꺼이 고백한다.

이별이 패배가 아님을, 사랑과 열정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연륜이 쌓여서일까. 백신조차 발명되지 않았다는 이별이 패배자의 뒷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시인처럼 빙그레 웃으며 담담하게 생의 여울목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건강을 되찾았듯이 시인이 갈무리한 이별 그림도 아픔이나 상처가 아닌 성숙의 시간이길 바란다.

'사랑은 시작되는 순간부터 낡아간다. 싹을 내미는 순간이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다. 나무가 자라는 거 아니냐고, 그늘을 만들어 서로를 초대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토 달았던 적 있다. 돌아보면 성장도 결국 낡아감의 한 갈래일 뿐이다. 세파에 휩쓸릴 때 사랑도 급류 앞의 제방처럼 쓸려나간다. 침식되는 거다.

어느 연인이 쌓고 간 돌담을 보며 이제 무너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현실에선 무너지고 당사자들 기억에선 오래도록 남을 상징이다. 사랑을 승부인 양 가늠하고 살았다. 스무 살 청춘의 맹목이었다. 첫사랑의 침전물에서 배어나온 독성물질이다. 진정 이기고 져야 한다면 기꺼이 지는 쪽을 택하겠다. 승부를 내야 한다면 패배자가 되어 빙그레 웃으며 돌아가겠다. 어렴풋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은 11월이 왔는데 내 사랑은 뿌리만 남았는지 부리라도 남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 이별과  이별하기 <승부> 중

덧붙이는 글 | 이별과 이별하기/ 전영관 산문집/삼인/ 13,800원



이별과 이별하기

전영관 지음, 삼인(2016)


#전영관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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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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