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나는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복학생이었다. 기말고사 기간이어서 대학 도서관은 늘 학생들로 북적였다. 전공이 정치학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TV와 신문, 인터넷으로만 보던 촛불집회에 막연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 눈앞의 시험이 더 급했다.
하지만 6월 10일에 대규모 집회가 치러질 것이란 이야기가 들려왔다. 나는 무엇인지도 모를 조바심에 시험공부도 그만둔 채 2008년 6월 10일 오후, 무작정 광화문으로 나갔다.
처음 나가본 집회 풍경은 놀라웠다. 종로부터 광화문까지, 끝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물결이 모든 거리를 가득 메웠다. 다들 한 손에는 촛불, 다른 손에는 피켓을 들었다. 더러 아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기도 했다. 종로와 광화문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가득 메웠을 차량 행렬도 이날 만큼은 시민들에게 그 자리를 양보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마치 휴일에 공원으로 소풍을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집회의 내용과 구호는 엄중했지만, 내 옆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광화문대로를 가로막은 '명박산성'도 사람들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진 못했다. 그들은 명박산성을 무대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했다.
집회가 처음이었던 나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한 경험이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새벽녘 텅 빈 대로를 걸어 다시 집으로 향했다. 평범한 복학생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간혹 촛불집회에 나갔던 시민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연행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지만 별다른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8년이 지나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서 일하는 변호사가 되고 나서야, 그 때 나와는 달리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나긴 촛불재판의 시작
2008년 5월 24일 촛불집회에서 36명이 연행된 이후, 매일 수십 명의 연행자가 발생했다. 연행된 시민들은 여러 경찰서로 나뉘어 조사를 받았다. 민변 변호사들이 이들에 대한 지원을 맡게 되었다. 민변은 2008년 5월 25일부터 쇠고기 촛불집회가 사실상 마무리된 8월 26일까지 총 183회에 거쳐 1398명의 연행자를 접견하였다.
연행자 대부분이 불구속 수사를 받았는데, 2008년 하반기 이후 검찰의 약식기소와 약식명령 발부가 집중되면서 수백 건에 이르는 변론 사건이 한꺼번에 민변에 접수되었다. 민변은 총 939명(약식명령사건 858명, 정식기소사건 81명), 사건으로는 총 300건(약식명령사건 246건, 정식기소사건 54건)을 무료로 변론하였다. 총 83명의 변호사가 참여하여 이후 8년간 계속될 '촛불 법률지원단'의 시작이었다.
2008년 당시의 구 집시법(정식 명칭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0조는 해가 진 이후의 옥외집회 및 시위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촛불집회가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음에도 검찰은 위 규정을 근거로 수백 명에 이르는 시민들을 일괄적으로 기소했다.
집회·시위의 자유가 헌법상 기본권으로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당시의 집시법에 의하면 집회·시위의 자유는 단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만 보장되는 반쪽짜리 기본권이었다.
해가 진 이후에 집회·시위를 했다는 것만으로 집회·시위의 참가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구 집시법 제10조가 헌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인식이 법률지원단에 참여한 변호사들의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이에 따라 법률지원단은 집시법 제10조 위반 여부가 쟁점이 된 형사재판의 재판부에 이 법이 위헌이라는 취지의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을 하였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여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집시법 제10조를 적용하여 기소된 시민들의 재판이 모두 중단되었다.
먼저 구 집시법 제10조 중 일몰 후 옥외집회 부분이 위헌으로 결정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위 규정이 헌법에 위반하여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하면서도 "입법자가 2010. 6. 30. 이전에 개선입법을 할 때까지 적용된다"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였다(헌법재판소 2009. 9. 24.자 헌재 2008헌가25결정).
이후 국회가 2010. 6. 30.까지 위 규정을 개정하지 않고 기한을 상실하자, 대법원은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은 형벌 법률조항에 대한 위헌결정의 변형된 형태이므로 위헌결정과 동일하게 소급하여 효력을 상실한다고 보고 일몰 후 옥외 집회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대법원 2011. 6. 23. 선고 2008도7562 전원합의체 판결).
이 대법원 판결 이후, 해가 진 이후 옥외집회를 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사안에 대해 검사는 공소를 취소하거나, 일몰 후 옥외시위로 공소장을 변경하였다.
구 집시법 제10조 중 나머지 옥외시위 부분은 그로부터 6년 뒤 위헌으로 결정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위 규정에 대하여 '해가 진 후부터 같은 날 24시까지의 시위'를 금지하는 한 헌법에 위반된다는 한정위헌결정을 하였다(헌법재판소 2014. 3. 27.자 2010헌가2 한정위헌결정). 여전히 자정 이후의 시위는 금지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한정위헌 결정 이후 '해가 진 이후부터 같은 날 24시까지' 부분에 한해서만 무죄라고 선고하였다.
도로에서 집회하면 안 되나요?
촛불집회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기소된 시민들 중 대다수가 일반교통방해죄(형법 제185조)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법정형으로만 따져보아도 '영아살해'(10년 이하의 징역), '존속상해'(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 '강제추행'(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 '야간주거침입절도'(10년 이하의 징역)와 비슷하고, '과실치사'(2년 이하의 금고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와 같은 죄에 비하면 그 형이 훨씬 무거운 죄가 단지 도로에 나가 평화적으로 집회에 참여한 시민 수백 명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된 것이었다.
유사한 조문을 갖춘 도로교통법과 비교하여 보자. 도로교통법은 "도로에서 교통에 방해되는 방법으로 눕거나 앉거나 서있는 행위"를 "벌금 20만 원 이하 벌금이나 구류"라는 경범죄로 규율하고 있다(도로교통법 제68조 제3항, 제157조).
평화적인 집회에 참가하여 도로를 일시 행진, 연좌하는 행위를 처벌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굳이 처벌해야 한다면 도로교통법 조항을 적용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검찰은 일반교통방해죄를 기계적으로 적용하였다.
특히 검찰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집회나, 집회 개최를 신고하였으나 경찰이 금지한 집회를 무조건 불법 집회로 간주한 후 참여한 시민들을 일반교통방해죄로 일괄 기소했다. 집회가 평화적으로 진행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검찰은 도로에서 진행된 미신고집회(또는 금지통고된 집회)의 참가자들은 모두 범죄자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검찰의 기소방침은 집회에 참여하려는 시민이 그 신고여부를 일일이 확인해야만 한다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에 이를 뿐만 아니라, 집회·시위에 대한 허가제를 금지하는 헌법과도 맞지 않는 태도였다.
위와 같은 검찰의 무차별 기소를 막기 위해 법률지원단에서 일반교통방해죄의 위헌성에 대해 검토하던 중, 다른 집회 관련 사건에서 법원이 위헌제청결정을 하여 위 규정도 헌법재판소로 올라갔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일반교통방해죄에 대해서는 합헌결정을 하였다(헌법재판소 2010. 3. 25.자 2009헌가2 결정). 이에 따라 단순히 집회에 참가하여 도로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처벌받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기소된 시민 한 명 한 명의 구체적 사실관계가 밝혀짐에 따라, 검찰의 기소·법원 판결의 일정한 문제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집회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 기소 및 처벌이 이루어졌다. 인권침해감시활동을 벌이던 활동가, 의료봉사단 간호원은 물론, 집회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옷에 물대포에 섞여있던 색소가 묻어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소된 경우도 있었다. 다른 시민을 연행하는 경찰관에 항의하다 체포되어 기소된 경우도 여럿이 있었다. 집회를 촬영하던 시민, 촛불예비군, 유모차를 끌고 나왔던 엄마들이 줄줄이 기소되었다.
또한 자정 이후 5분~10분 동안만 집회에 참여했는데도 처벌된 경우가 많았다. 새벽에 체포된 경우 뚜렷한 증거도 없이 그 이전 시간 시위에 계속 참여하였다고 간주되어 처벌받은 경우도 있는가 하면, 인도에 있었던 사람도 연행되어 일반교통방해죄로 처벌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미 시위 이전에 경찰 차벽이나 경찰에 의하여 도로와 인도가 차단된 상태에서 집회에 참가한 시민에게도 법원이 일괄적으로 일반교통방해죄를 적용하여 유죄를 선고했다. 형량 역시 지나치게 높았다. 평화적인 집회에 단순 참가한 시민에게도 100만 원 이상의 벌금이 선고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럼에도 검찰은 오히려 형량이 너무 적다고 항소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검사의 무리한 무차별적 기소를 법원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때 그 촛불들, 감사합니다.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촛불집회에 참가했다가 기소되어 재판을 받던 시민·변호사 모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시 학생 신분이었던 사람들은 직장인이 되었고, 가정을 이룬 경우도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시민과 변호사가 울고 웃으며 함께 재판을 치러냈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대학생에서 만 2년차 변호사가 되었다. 나는 촛불 법률지원단의 마지막 사업인 두 번째 촛불백서(법률지원단에서는 2010년 첫 번째 촛불백서를 발간하였다) 제작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8년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법률지원단의 막내로 사업을 마무리 지으며, 자연스럽게 집회·시위의 자유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집회·시위는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알릴 수 있는 최후의 통로다. 헌법재판소도 집회·시위의 자유를 대의제를 보완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필수적 요소이자 관용과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다원적인 '열린사회'에 대한 헌법적 결단으로 인정하고 있다(헌법재판소 2014. 4. 24. 2011헌가29 한정위헌결정 등).
시민이 국민의 건강권과 검역주권을 스스로 포기하려는 정부에 맞서 자신의 입장을 내보이기 위해서는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때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간 시민들이 없었다면, 이명박 정권은 급히 협상을 재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건강권과 주권을 외치며 집회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수백 명이나 되는 평범한 시민들이 8년 넘게 재판을 받아야 했으며, 100만 원 내외의 벌금형을 선고받는 것으로 촛불재판은 마무리되었다. 집회·시위의 자유가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민변은 그러한 우려의 목소리들을 모아 오는 5월 2일 오후 2시, 두 번째 촛불백서를 발간하고 이를 기념하는 보고대회를 서울변호사회 조영래홀(광화문)에서 개최한다. 이 글에 담지 못한 보다 많은 이야기를 백서와 보고대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서 발간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애도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대규모 집회가 2015년 4월 중순부터 5월 초순까지 열렸고 수많은 시민들이 2008년 촛불집회 때처럼 거리로 나왔다. 또 다시 단지 도로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백명에 달하는 시민이 입건되었고, 그 중 상당수가 기소되어 재판 계속 중이며,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여했던 시민들도 비슷한 절차를 밟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집회·시위의 자유를 옭매는 집시법과 일반교통방해죄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완고한 검찰과 법원의 태도를 바꾸기에는 좀 더 시간이 걸릴 듯싶다. 그러나 법원과 검찰의 완고한 보수성만큼이나 민주주의와 집회·시위의 자유 보장을 향한 시민들의 열망도 바뀌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집회와 민중총궐기 집회에 여전히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뀐 것이 있다면 손에 든 것이 촛불에서 노란 리본으로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결국 촛불을 들고 함께 손 잡아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실제로 집회에 나와서 앞장서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국민의 건강권과 검역주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거리에서 민주주의의 고귀함을, 헌법상 기본권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었던 이름 없는 수많은 촛불들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그들은 국민이 곧 주권자이고 정부는 단지 선거로 그 주권을 위임받았을 뿐임을, 헌법에 쓰인 대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우리에게 확인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