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만 열면 '애국'을 외쳐온 이들이 있다. 어버이연합이 대표적일 텐데, 이 단체가 재계의 뒷돈과 정치권력의 사주를 받고 활동해온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정부, 경찰, 검찰이 한 목소리로 비난하던 '전문시위꾼'들이 바로 이들이었던 셈이다.
'애국'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곳이 또 있는데, 청와대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다. 이들 말을 들어보면, 자신들의 활동 가운데 '국익'이나 '애국'과 관련되지 않은 일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유유상종이라고, 애국자들끼리 통하기 마련인지, 어버이연합은 청와대 행정관의 지시를 받고 움직여 왔고, 전경련은 어버이연합에 억대의 활동비를 제공해온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애국 3인방'이 벌여온 활동을 보면, 세월호 유가족 규탄이나 한일 위안부 합의 옹호 집회 따위였다. 가족을 잃고 오열하는 가족들과 국가에 의해 인생을 유린당한 노인들을 비난하고 겁박하는 것이 이들이 벌여온 '애국 활동'이었다. 이들의 파렴치한 행태는 '애국' 간판을 내건 이들이 애국과 가장 거리가 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앞세운 종교가 도리어 혐오를 부추기고, '도덕'을 내세운 종교단체가 가장 부도덕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는 이런 사례로 차고 넘친다.
사랑 대신 혐오 내세운 한국의 보수 개신교
내가 30년 넘게 교인으로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은 '빛과 소금'이다. 이 표현은 목사가 힘주어 전하는 설교에서, 기도자의 간절한 기도문에서 빠지는 법이 없다. 빛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고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고 맛을 더하듯, 교회가 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이 일을 제대로 해왔다고 믿는 사람들은 교인들 가운데서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주류 교회가 권력의 비리, 재계의 부패에 목소리 높여 비판하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교회는 세상의 불의에 목소리를 높이기는커녕, 교회 안의 불의에도 쉽게 눈을 감아왔다. '세상'의 대학에서는 논문을 표절한 교수가 해임되는 게 상식이지만, 논문을 표절한 목사는 멀쩡히 자리를 지킨다. '세상'의 공직자들은 성희롱 발언만으로도 제명 당하는 게 상식이지만, 여러 건의 성폭행 혐의를 받는 목사는 처벌은커녕 억대의 '전별금'을 받고 새 교회를 세워 승승장구한다.
물론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인간적인 실수와 오류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적 일탈이 교회의 존재 목적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개인적 일탈이 다수의 옹호나 묵인에 의해 보호받게 된다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수의 교인들이 논문 표절과 성범죄를 저지른 목사들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피해자들을 고소하고 비판자들을 제명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처럼 내부적으로는 무감각한 도덕주의가 교회 밖으로는 매우 공격적으로 표출된다는 점이다. 총선 당시 "동성애 반대, 차별금지법 반대, 이슬람교 반대"의 기치를 내걸고 참여했던 기독자유당의 경우가 그렇다. 비록 국회 진출에 실패했으나, 2.6%의 득표율은 보수 개신교의 정치세력화가 코 앞에 다가왔음을 보여주었다.
올해 초 <기독교한국신문>은 "'기독자유당' 창당이 주는 의미와 배경"이라는 사설에서 이 정당의 정치적 실험을 높이 평가하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전국교회의 기독교인을 하나로 묶어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지역선거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썼다. 흥미로운 점은, 자신과 다른 성적 성향과 종교를 지닌 사람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외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화해의 정신"을 말한다는 점이다.
오해, 무지, 모순의 연대명분은 사람을 결속시킨다. '애국'이 그렇고, '도덕'이 그렇다. 이 두 가지는 상대적 우월감을 제공해 사람을 끌어들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을 자극함으로써 유대를 강화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저쪽편'에 대해 지나치게 단순화되거나 완전히 그릇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성 사이에 성행위만 존재하는 게 아니듯 동성 사이에도 성행위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의 관계에 사랑, 우정, 존경, 배려, 희생, 인내 등이 존재할 수 있다면, 동성 사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수개신교는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행위'의 차원으로 단순화하기 위해 '에이즈'나 '항문성교'를 끌어들인다.
에이즈가 동성만이 아니라 이성 간의 성관계를 통해서도 전파된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항문성교'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동성애자들보다 이성애자가 훨씬 많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한국처럼 성적으로 보수적인 듯 보이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한국성과학연구소의 2003년 조사에 따르면, 자신이 동성애자와 양성애자라고 밝힌 비율은 각각 0.3%와 0.2%였고, 항문성교를 시도해본 사람들의 비율은 약 10%였다. 물론 한국 사회는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큰 편이어서 응답자들이 솔직히 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외국처럼 1~4% 비율을 대입한다 해도, 항문성교를 시도하는 이성애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증오의 정치'에 중요한 것은 사실 확인이 아니다. 오직 '적'에 대해 혐오감을 갖게 하는 게 중요하다.
동성애 혐오자일수록 동성애에 흥분?
프랑스 사회심리학자 로랑 베그는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를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스스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도덕과 거리가 먼 행동을 하는 경향을 분석했다. 그는 이것을 '가혹한 역설'이라고 부른다.
로랑 베그는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연구를 인용한다. 이 대학 연구팀은 피험자에게 '공정', '관대' 등의 언어로 자신을 높이 평가하게 한 후, 이것이 행동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관찰했다. 결과는 무척 흥미로웠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도록 지시받은 사람일수록 타인들에게 가혹하게 반응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기부나 자원봉사에 훨씬 소극적이었다. 이 '도덕의 화신'들이 기부한 액수는 다른 사람들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도덕주의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을 비난할 구실을 마련해줄 뿐이다.
로랑 베그는 동성애 혐오자의 '가혹한 역설'도 언급한다. 그는 '방어기제'라는 심리학 이론을 통해, 동성애 혐오가 자신의 동성애 충동을 부정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했다. 이 가설은 '플래티스모그래피'라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입증된다.
우선 설문조사를 통해 동성애에 매우 비판적인 사람들을 파악한다. 그에게 동성간의 사랑을 다룬 영화를 보여주고, 기계장치를 통해 그들의 음경 크기가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로는 혐오감을 표현하며 '아무 흥미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그들이 발기할 확률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았다. 동성애에 거부감을 표하지 않는 사람들은 34%만이 발기했으나, 극단적 혐오자들의 '발기율'은 무려 80%였다.
혐오가 언제나 자신의 충동을 부정하려는 방어기제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타인에 대한 혐오를 앞세우는 이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임은 분명하다. 자신의 삶이 아름답고 정의롭고 행복하다면 '이렇게 살라'고 말하지, '저렇게 살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정권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 왔다면 말끝마다 '종북'이니 '좌빨'이니 하며 증오의 정치에 기대어 연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잘 해 왔다면, 그동안의 성과를 보여주며 '우리 삶이 이렇게 나아졌으니 계속 지지해 달라'고 말할 테지만, 보여줄 게 아무 것도 없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끊임없이 되뇌지만, 이 땅에서 탈북자는 생활고에 쪼들린 채 돈 2만 원을 받고 시위에 동원되고 있다. 보수 개신교가 동성애자와 무슬림에 대한 혐오의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교회 내의 도덕과 상식은 (그들이 교화의 대상으로 여기는) '세상'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타인에 대한 혐오는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게 한다. 로랑 베그 관점에서 보면, 혐오는 자신의 허물을 은폐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동원되는 수단이다. 혐오 때문에 자신을 보지 못하든, 자신을 보지 못하게 의도적으로 혐오를 끌어들이든, 타인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곳은 온전할 수 없다. 그게 국가든, 정당이든, 종교단체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