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커녕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할 나이에 죽음을 걱정했던 것 같다. 자그마치 초등학교 5학년 12살 때였다. 아마 어느 정도의 삶을, 되풀이 되는 삶의 연속을 경험해본 나이였을 테니까, 이 삶의 끝을 상상해봤을 것이다. 한때 매일 밤 눈만 감으면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 생각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머리에 든 게 많지 않고 생각도 짧으니 죽음에 대한 한 면만, 그리고 한 가지만 물고 늘어졌다. 죽음은 두렵고 무섭고 나쁘고 아프고 피하고 싶은 것, 부정(不淨) 그 자체였다. 그 끝이 어떻게 될까, 끊임없이 반복해서 생각하게 되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도무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데 자꾸 생각하게 되니 마냥 무서웠다. 그렇게 겁쟁이가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쓸 데 없는' 생각들이 나에게 가져다준 건 아무것도 없다시피 하다. 제대로 형성된 게 없는 그 시기에 그런 생각을 아무 이유 없이 했다니, 그때 즈음 겪은 외할머니와 증조할머니의 죽음이 나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게 하였을까?
이후 무수히 많은 콘텐츠를 통해서, 실제로도 죽음을 많이 접했다. 설마 오래 전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모두 끝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감흥이 일지 않았다. 이 짧은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누군가의 죽음,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
레프 톨스토이는 41세 때 <전쟁과 평화>로 대성공을 이루고 난 후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하며 지냈다고 한다.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 전후였다는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나이 58세 때 죽음을 형상화한 대표적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탄생했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의 죽음은 지인들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동료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들의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리 이동과 보직 변경 등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누구나 그러듯이 그들도 죽은 게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본문 10p 중에서)그야말로 영원히 곁을 떠난 이에 대해 어떠한 안타까움이나 그리움도 묻어나지 않는 굉장히 현실적인 생각이다. 누군들 다를까? '으레' 그렇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가히 그 통찰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 끔찍하기 그지없다.
소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반 일리치의 간단한 이력과 성격, 살아온 날들을 되짚는다. 그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극도로 끔찍했다. 그는 가벼운 재밋거리를 즐기는 성품이었음에도, 자신의 일을 할 때만큼은 극도로 조심스러웠고 관료적이었으며 심지어 냉혹하기조차 했다. '삶이란 반드시 쉽고, 기분 좋고, 고상하게 흘러가야만 한다'는 자신의 소신대로 그렇게 평탄하게 흘러갔다.
끔찍한 두려움과 고통, 그보다 더 힘든 건 '거짓'소설의 배경이 되는 제정 러시아 시대는 관료가 그야말로 최고의 위치와 지위를 점했다. 이반 일리치의 아버지인 삼등문관 일리야 예피모비치 골로빈이 별 쓸모없이 세워진 관청들을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하는 일 없이 한 자리 차지해 평생을 편안하게 보냈다는 게 당시 관료의 전형적인 예다.
이반 일리치는 그런 인물로 나오진 않지만, 어떻게든 높은 자리로 올라가 많은 봉급과 함께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행세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공무원 열풍과 다를 바 없다.
그는 어느 때 큰 위기를 겪은 후 회생해 좋은 곳으로 발령나 이사를 간다. 가족들보다 먼저 도착해 집을 꾸미는 와중에 옆구리를 다치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이 짧은 소설에서 그의 죽음 과정이 차지하는 바가 상당한데, 그 피말리는 묘사가 주는 기괴함은 말할 것 없이 엄청나다. 죽음에 대한 태초적인 두려움, 생전 처음 겪어보는 끔찍한 육체적 고통과 함께 오만 가지 생각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감정이입해 보게 되어 비슷한 고통이 엄습하는 것 같다.
그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바로 '거짓'이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당연히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건 일리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이유이겠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수작에 다름아니었다. 그렇지만 정작 그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는 '고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고상한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하인 게라심만은 그에게 서슴없이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그를 가엾게 여겼다. 일리치는 게라심과 함께 있을 때만 마음이 편안했다. 그건 거짓과 함께 그를 견디기 힘들게 한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진정 마음 아파하지 않았다. 말도 거짓이었고 마음도 거짓이었다. 고통과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것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이반 일리치는 특별한 인물인가? 소설에나 나옴직한,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형의 캐릭터이자 삶을 살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평범한 인물이다. 지위와 재력의 높낮이는 있겠지만,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치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의 죽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묘사를 보고 있노라니,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의 고통과 죽음 이후에 벌어질 사람들의 가식이 두렵게 다가온다. 그 무엇보다 일리치를 고통스럽게 한 사람들의 거짓과 가식이 나에게도 올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삶에게, 다름 아닌 나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죽음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그리는 건 역설적으로 그만큼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람들의 거짓과 가식은 결국 삶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삶이 있고 죽음이 있는 것이지 죽음이 있고 삶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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