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가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회사 '드림웍스'와 손잡고, 자사 IPTV인 올레TV를 통해 드림웍스에서 제작된 만화 시리즈를 24시간 동안 방송한다. KT는 남녀노소가 좋아하는 <쿵푸팬더>를 통해 국산 캐릭터의 대표 격인 <뽀로로>를 잡겠다며 자신감에 차있는 상황이다.
이를 지켜보는 국내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마음은 씁쓸하기만 하다.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이 그 어떤 분야보다 내수시장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VOD는 다른 VOD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시간이 짧아 구매율이 높은 콘텐츠다. IPTV 업계에 가입자 유치 효자상품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러한 상황에서 IPTV 업계 1위인 KT가 드림웍스와 손을 잡았으니, 국내 애니메이터들의 시각에선 KT가 해외 콘텐츠 수급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해야 할 애니메이터들의 한숨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이유를 들여다봤다.
신입들은 '무임금' 받기도... 산업경쟁력 악화의 시작
그들의 현실은 애니메이션처럼 아름답지 않다. 통계청의 2013년 조사에 따르면 애니메이터들의 평균임금은 128만 원. 한국 노동자 평균임금인 223만 원(2014년 1분기 기준)에 크게 못 미친다.
업계에 처음 발을 내디딘 신인 애니메이터의 경우는 더 열악하다. 경력이 없는 이들의 임금은 대부분 장당 가격으로 측정된다. 하루 12시간을 일해도 '쓰이는' 그림이 없으면 임금조차 받지 못한다. 이들의 급여는 교통비와 식비를 제하면 남는 것이 없는 수준이다.
버티는 사람들만이 승리하는 현 상황에서 중도 탈락자들은 속출하고 있다. 문화콘텐츠진흥원이 진행한 업계 종사자 대상 설문조사 결과, 애니메이션 분야는 숙련직 부족이 두드러진 분야(54.7%), 대졸 이상의 전문 인력 부족이 심각한 분야(47.6%)에 꼽혔다. 결국 열악한 환경에 의한 신입 애니메이터들의 중도 이탈은 중간 관리자급의 숙련 인력 부재로 연결되고, 이는 애니메이션 업계의 경쟁력과 다양성을 크게 훼손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내수시장 취약... 해외시장으로 눈 돌린다현재 수많은 애니메이터가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예컨대 토종 캐릭터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애니메이션 <머털도사>는 중국의 영화투자배급사인 '펀하이로'를 통해 전체 자본의 60%를 유치, 3D 블록버스터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해외진출은 분명 긍정적인 방향임이 틀림없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다는 한계는 아쉬운 대목이다. 중국 측 합작사가 투자를 빌미로 <머털도사>의 내용에서 한국 색채를 덜어내고 아시아적 색채를 더할 것이기 때문이다.
취약한 내수시장 구조는 지상파의 애니메이션 유통과정에서도 드러난다. 현재 시리즈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 한 편의 제작비는 대략 26억에서 50억 원 사이. 반면 지상파 방송에서 지급하는 방송료는 30분물 기준으로 1천만 원에 불과하다. 이는 전체 예산 기준 5~10% 정도 되는 비용. 나머지 제작료는 캐릭터 사업 등의 부가산업으로 메워야 하는 실정이다.
해외 사례와 비교하면 더욱 참담하다. 애니메이션 선진국인 미국이나 유럽의 방송국은 제작비의 최소 30~40%, 보통 50~80% 정도를 지급한다. 고위험 산업에 대한 부담감을 방송사의 방송료를 통해 분담해주는 것이다.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떠안고 있는 부담감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다.
과감한 투자로 선순환적 구조 구축해야
결국 해답은 하나, 지속적인 투자를 통한 내수시장의 활성화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업계는 투입되는 인력에 비해 회수기간이 길어 투자자를 찾기 힘들다. 성패에 따라 타격을 크게 받는 중소기업보단 국내 경제를 선도하는 대기업들의 참여가 필요한 이유다.
그런 면에서 과감한 투자에 나선 몇몇 기업들의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뽀로로> <로보카 폴리> 등 국내 톱 3 애니메이션 성공에 기여한 SK브로드밴드는 제작 단계부터 리스크를 감수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SK브로드밴드는 기획 단계부터 투자에 참여하여 공동저작권을 확보, 지상파 방송과 동시에 자사 IPTV 독점서비스를 제공하며 콘텐츠 유통에도 힘을 실어주고 있다.
국내 완성차업체 최초로 애니메이션 공동제작에 나선 현대자동차는 기업의 성격에 맞는 자동차를 소재로 내세웠다. 이들은 삼지 애니메이션, CJ E&M과 공동 제작에 나선 3D 애니메이션 <파워배틀 와치카>를 통해 국내 애니메이션, 캐릭터 사업의 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한다는 각오다.
단순 콘텐츠 수급 넘어선 근본적 시도 필요대기업들의 투자 역시 반길 만한 사례이지만, 급속도로 침체된 현 애니메이션 시장을 일으키기 위해선 보다 근본적인 시도도 필요하다. 최근 KT의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만약 KT가 드림웍스 콘텐츠를 단순 수급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기술 협약 혹은 공동제작의 단계까지 나아갔다면 더욱더 바람직한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지 않았을까?
이와 가까운 예로 중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을 들 수 있다. 지난 2010년 시장 규모 470억 위안에 불과했던 중국 애니메이션 시장은 2014년 두 배가 넘는 성장을 기록하며 1000억 위안을 기록했다. 연간 제작 편수에서는 독보적인 1위를 달리던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단순한 거대 자본의 힘일까?
아니다. 중국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현재 할리우드식 시스템을 도입하고 전문 인력을 영입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칭칭슈'는 최근 미국 월트디즈니 출신 징거를 제작 총감독으로 영입했다. 또 다른 대형 제작사 '쭈이광 애니메이션'은 할리우드식 제작 공정을 도입, 프레임을 정밀하게 쪼개는 기술에 힘을 쏟고 있다. 할리우드의 콘텐츠를 단순히 중국 내 시장에 들여오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닌,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오윌리>로 시카고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엠마 데 스와프 감독은 당시 수상 소감에서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자에 비하면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며 한국 실태를 꼬집기도 했다. 그는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생계가 힘들지는 않다, 정부 지원도 있고, 인디 애니메이션만을 방영할 수 있는 방송채널도 있다"며 제작 환경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여유로운 미소를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에게서도 보고 싶다면, 이는 큰 욕심일까? 정부와 기업, 그리고 관련 종사자들의 수많은 노력과 시도가 쌓여 국내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판이 하루빨리 만들어지길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위키트리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