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이다. 총선도 끝나고 조용한 시국에서 맞은 5·18인데, 연예계에서는 시끄러운 일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지난 3일 방영된 <채널 AOA>라는 방송에서 시작됐다. 퀴즈 코너를 진행하던 중, 아이돌 그룹 AOA의 멤버 설현과 지민은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고 '긴또깡'이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제작진이 힌트를 주었음에도 이들은 정답을 알아내지 못했고, 검색을 거친 후에야 정답을 맞힐 수 있었다.
비판이 쏟아졌다. 역사에 대해 무지하고, 안중근 의사를 장난스럽게 대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비판 끝에 설현과 지민은 자신의 SNS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역사에 대해서 진중한 태도를 보였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점에 대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반성하고 있"다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비판은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결국 이 두 멤버는 컴백 소식을 알리는 쇼케이스에서 "앞으로 신중하게 처신하겠다"며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역사에 무지? 설현·지민에 대한 비판 타당한가AOA의 설현·지민 두 멤버가 비판받았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안중근 의사를 모를 정도로 역사에 무지하다"는 것이 첫 번째고, "안중근 의사를 장난스럽게 대했다"는 것이 두 번째다.
그런데 과연 "역사에 무지하다"는 것은 비판받을 수 있는 일일까? '역사인식'이 부족하거나 왜곡되었다면 그것은 비판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두 멤버가 "독립운동가는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했다면,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발언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모른다'는 사실이 이들의 역사인식을 대변할 수 있을까? 이들은 단순히 안중근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몰랐을 뿐이고, 이것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안중근 의사의 얼굴을 모른다"는 사실 외에는 단 한 가지도 없다.
물론 안중근 의사의 사진은 많은 곳에서 볼 수 있고, 교과서에서도 상당히 자주 등장하긴 한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모르는 것은 '상식이 부족하다'는 정도로 취급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역사인식이 왜곡됐다"거나, "역사에 전반적으로 무지하다"고 잘못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만약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모르는 것'이 역사인식의 부족으로 직결된다면, 대체 그 기준선은 무엇인가? 김구 선생의 얼굴을 모르면 어떻게 되는가? 김규식 선생은 어떤가? 김원봉은 그 기준에 포함되는가? 나석주나 김상옥의 사진은 어떤가? 우리는 모든 독립운동가의 사진을 기억해야 하는가? 아니라면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결국 안중근 의사의 사진에 대해 알거나 모르는 것은 지식의 차이일 뿐이며, 그것이 개인의 역사 인식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 단순히 안중근 의사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사과해야 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안중근 의사 앞에서는 경건해져라?"안중근 의사를 장난스럽게 대했다"는 점은 어떨까? 사실 이 지점에 대해서 두 멤버는 비판받을 수 없다. 그 사람이 안중근 의사인지 몰랐는데 뭐 어떡하겠는가. 모든 사진 앞에서 경건하고 엄숙해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만약 이 사진이 안중근 의사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 앞에서 장난스럽게 대해서는 안 될까.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사람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제국주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면,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고, 그 앞에서 경건하고 엄숙해질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래야 할까? 누군가는 안중근 의사를 그렇게 보지 않을 수 있다. 국적이나 민족과는 관계가 없는 문제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을 지휘한 거두라는 평가도 있지만,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독선적 지도자라는 평가도 있다. 유관순 열사는 3·1운동을 적극적으로 확대시킨 용기 있는 지도자라는 평가도 있지만, '만들어진 영웅'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안중근 의사라고 다를까? 이토 히로부미라는 제국주의의 상징을 제거한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가가 있지만, 이토 히로부미 제거 이후 조선을 완전히 병합하자는 주장이 일본 내에서 힘을 얻었다는 해석도 있다.
어떤 지도자든 완벽하지 않다. 김구 선생을, 유관순 열사를,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라고 모두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사회는 그들에 대한 최대한의 정보를 제공해야 하고, 그 이상의 판단은 개인에게 맡겨야 한다. 이 판단에 사회가 개입해서 '완벽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면, 과도한 엄숙주의로 흐를 수 있다.
김구에 대해서도, 유관순에 대해서도, 안중근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을 허용해야 하고, 그것이 한데 모여 무엇이 더 '적절한 판단'인지를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과도한 엄숙주의는 이런 '해석의 다양성'을 막아 세운다.
꼭 역사 해석의 문제만은 아니다. 대중의 역사인식에 있어서도 과도한 엄숙주의의 폐단이 존재한다.
엄숙주의는 '불가침의 존재'를 만들어낸다. 김구와 유관순과 안중근에 대해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는 인식이 확대된다. 이런 불가침의 존재는 사람들을 대단히 불편하게 만든다.
당장 지금 몸살을 겪은 AOA의 설현과 지민은 앞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게 될까? 열심히 공부해서 독립운동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려고 할까? 어느 정도는 그럴 것이다. 적어도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나 이름 정도는 기억하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더 궁극적으로 그들은 웬만하면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을 것이며, 역사에 대해 불편하고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 대중이라고 다를까? 아마 내가 존경하는 역사 인물에 대해 누군가 함부로 말한다면, 나도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발언들은 곧 논쟁의 기회를 만들어 낸다. 역사에 대해 누군가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과의 논쟁은 둘 모두를 가장 합리적인 결론으로 이끌어 내고, 곧 둘 모두를 역사적 주체로 성장시킨다.
5.18과 역사, 그리고 기억오늘이 마침 5·18이다.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제 5·18은 35년 넘게 지난 일이며, 1987년 민주화 이전의 세상을 겪어본 사람도 30대 아래로는 없다. 당장 나만 해도 5·18이 벌어지고 10년 이상 지난 세상에서 태어났다. 나에게 5·18은 기억이 아니라 역사다.
그렇게 민주화운동을 마주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민주화운동에 대한 과도한 엄숙주의는 지양해야 할 태도다. 그것은 내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는지 아닌지와는 다른 문제다.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나온 이야기라면, 어떤 내용이든 당당하게 사회의 일면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독립운동이든 민주화운동이든 마찬가지다. 다양한 목소리가 모여야 사회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고, 적절한 균형을 찾아낼 수 있다.
5월 18일이다. 5·18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슬프게 생각할 것이며, 누군가는 분노할 것이다. 합리적 근거가 있다면 그 모든 감정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어야 한다.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모른다는 이유로 눈물을 흘리며 사과해야 하는 과도한 엄숙주의의 사회. 그것은 역사 해석에 있어서도, 대중의 역사인식에 있어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독립운동가의 사진 앞에서든, 5월 18일 앞에서든, 근거를 가지고 다양한 해석이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을 통해, 사회가 가장 적절한 균형을 찾아내야 한다.
터져나오는 그 다양한 목소리! 토론과 논쟁을 통해 만들어지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 나는 그것이, 독립운동가와 민주화 열사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외쳤던 "독립"과 "민주주의의"의 함성이 궁극적으로 뜻했던 바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 <비더슈탄트, 세상을 읽다>와 팀블로그 <이승로그>에 동시 게재됩니다. 딴지일보 독투불패에도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