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 동남아국가나 제주의 아름다운 해변을 배경으로 무릎엔 랩톱을 올려놓고 유유자적 일하는 비키니 여성은 언론이 그려낸 지극히 작은 한 단면에 불과하다. 디지털 노마드는 여행하며 일도 하는 한가한 '라이프 스타일'보다는, 인터넷의 보급과 기술의 발전으로 가능해진 '원격근무(remote work)'로 인한 일과 삶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용어는 프랑스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가 1997년 저서 <21세기 사전(원제 Dictionnarie du 21e Sie'cle)>에서 처음 소개했다. 이후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업무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재택근무 개념이 등장했고, 2007년 출간된 티모시 페리스(Timothy Ferriss)의 책 < 4시간(The 4-Hour Workwee) >으로 인해 디지털 노마드 논의가 불붙었다. '장소로부터의 해방(location independency)'을 핵심 키워드로 한 이 책에 많은 젊은이들이 열광했고 디지털 노마드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로 떠올랐다.
2010년을 전후로 실리콘밸리 테크기업들의 부상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는 개발자를 구하지 못하는 많은 기업들이 생겨났다. 회사라는 장소에서 먼 지역에 살고있는 능력자들에게 '협상력'이 생기게 됐고, '원격근무(remote work)'라는 아이디어가 제기된 것이다. 미국 등 해외에서는 기업의 경쟁력제고 측면에서 원격근무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생산성 측면에서도 우월하다는 사실은 조사자료를 통해 입증된다. 9개월간 미국 나스닥 상장사에서 일해온 직원 1만6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원격근무자들의 생산성이 사무실 근무자보다 13%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원격근무 직원들이 느끼는 만족감은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출처 <스탠포드 비즈니스>, <포브스>)
원격근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으로 조직과 협상할 수 있는 전문성, 그리고 국적에 관계없이 사람을 뽑는 여러 원격근무 시행기업에서 협업을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는 비단 원격근무뿐만 아니라 미래 전 세계를 무대로 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수로 요구되는 역량이기도 하다.
원격근무를 시행하는 기업으로 유망한 인재들이 몰리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사무실 업무 방식을 고수하는 기업은 필연적으로 인재를 놓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로봇에 대체되고, 정규직 사라지고... 일자리 패러다임이 달라진다
이 같은 현상이 과연 남의 나라 먼 미래의 이야기일 뿐일까. 높은 실업률과 정규직 일자리의 소멸 등 일자리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통해서 한국 사회에 새로운 논란으로 떠올랐다.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일자리는 파편화되고 일반적인 직장인들, 즉 제너럴리스트가 해온 일은 로봇이나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예측은 불 보듯 뻔하다. 2020년까지 미국 노동인구의 40%가 프리랜서가 될 것이란 < Quartz > 보도만 보더라도 한 사람이 평생 정규직으로 일하는 시스템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4차 산업혁명의 큰 흐름 속에서 디지털 노마드는 어쩌면 가장 극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늘 그랬든 이런 극단적인 사례들이 더 큰 변화를 이끌어온 것도 사실이다. 지난 17일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열린 디지털 노마드 밋업 행사에는 이 같은 변화의 앞단에 서 있는 기업들의 사례가 소개됐다.
워드프레스 개발사이자 전 직원 원격근무를 도입한 오토매틱(Automattic)의 맷 페리(Matt Perry)와 스테프 유(Steph Yiu)는 세계 45개국에 흩어져 일하는 450여명의 직원들의 업무방식과 문화를 소개했다. 이메일 대신 슬랙이라는 온라인 협업 툴을 사용하고, 주1회 비디오 채팅으로 실시간 미팅을, 그룹 블로그를 통해 의사결정 과정을 공유한다. 매니저가 따로 없고, 모든 직군이 수평적으로 일하며, 몇 시간을 일하든 결과물(output)로만 평가한다.
편견을 배제하기 위해 대면 면접 대신 채팅만으로 채용과정을 진행하며, 계약 후엔 철저히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된다. 3000 달러의 홈오피스 비용과 카페 비용, 코워킹 스페이스 멤버십 등을 복지제도로 갖추고 있다.
IT 프리랜서 채용 및 일자리 찾기 플랫폼인 탑탤은 전세계 상위 3%에 해당하는 개발자와 디자이너를 보유하고 있다. 물론 전 직원에게는 원격근무가 보장된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알렉세이 쉐인(Alexey Shein)은 "탑탤에서 일하는 한국인이 아직 2명밖에 없지만 우수한 개발자를 채용하기 위해 여기 왔다"며 탑탤아카데미, 여성개발자를 위한 탑탤장학금, 매달 상금 5000달러가 수여되는 탑탤대회 등 조직문화와 채용과정을 소개했다.
작가이자 <포브스> 기자인 카비 굽타(Kavi Guppta)는 2년간 디지털 노마드로 보낸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디지털 노마드는 항상 움직이고, 기술을 업그레이드하고, 일을 찾고, 서비스와 제품을 팔고, 기술을 이용해 모바일하게 만들고, 서비스를 런칭하는 일을 하는 이들을 의미"하며, 자신 역시 "원격근무가 바로 내가 가장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직장을 바꿀 수 있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If you can change the workplace, you can change the world)'는 스위스 비즈니스 이론가 알렉 오스왈드(Alex Osterwalder)의 말을 인용하며 "가족을 돌보고 안정적으로 살라고 교육받는 아시아 문화권 젊은이들에게는 주변의 시선 등으로 인해 힘들 수도 있겠지만, 디지털 노마드라는 삶의 방식에 자신을 몰아넣어 보는 희열을 느껴보라"고 독려했다.
디지털 노마드 다큐멘터리 <
원 웨이 티켓> 제작자 도유진씨는 동영상을 통해 오토매틱 창업자이자 CEO인 맷 뮬렌웨그, 베이스캠프 공동 창업자 데이비드 하이네마이어 핸슨, 그 외 업워크라는 세계 최대 프리랜서 플랫폼 마케팅팀에서 원격으로 일하며 함께 여행하는 부부 등 다양한 디지털 노마드의 삶과 일을 조명했다.
'주말에 프라하 거리를 걸어볼까?'... 여가를 보내는 방식이 다르다
디지털 노마드의 업무형태는 여느 직장인들과 다르지 않다. 풀타임 직원의 경우 회사가 업무 시간을 칼같이 체크하기도 하고, 또는 할당된 업무량을 철저하게 정해진 시간 안에 완수해야 하기도 한다. 시차로 인해 늦은 시간 화상 채팅 등으로 팀 미팅에 참석하기도 한다.
일주일에 4~5일 일하는 것은 여느 직장인과 같지만, 다른 점은 바로 여가를 보내는 방식이다. 만일 디지털 노마드로 일하는 당신이 프라하에 있다면, 소파에서 TV를 보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대신 새로운 거리를 걷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지 않겠는가.
한편 '아무리 여행이 좋다지만 생활터전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지 않을까, 또 조직에 소속되지 않으면 외롭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도유진씨는 "그렇게 느낀다면 언제든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고, 또는 움직이는 속도와 기간을 자신이 원하는 만큼 조정하면 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살아갈 장소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자유"라고 말한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므로 디지털 노마드 역시 대안적 삶의 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갈 장소를 택하는데 일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점, 일 때문에 장소를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디지털 노마드의 행복감은 훨씬 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20년간 일(job)과 이동성(mobility)의 상관관계를 연구해온 쏘렌슨(Dr. Carsten Sørensen)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교수는 변화하는 일자리 패러다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는 세계화와 함께 원격으로 협업하는 경험을 이미 했다. 한 회사의 뉴욕 지사, 도쿄 지사, 런던 지사 등이 한 공간에 있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신뢰하고 함께 일을 하는 경험을 이미 해온 것이다. 정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지금 세대는 일에서 장소의 개념이 극히 희박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일(Job, Work, Career)의 정의 자체가 변하고 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여러 조직 또는 여러 클라이언트를 위해서 일을 한다는 것, 더 이상 사람들이 일하는 이유가 돈이 아닌 시대가 올 것이다."자동화와 일자리 부재로 인해 모든 사람이 일할 수 없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개인이 생계 때문에 허겁지겁 아무 일이나 하지 않고 더 많은 예술활동, 창작활동, NGO활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국가나 사회의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최근 기본소득(Basic Income) 도입 문제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억지로 일자리를 만들 수는 없으므로 법인세를 걷고 자동화로 인한 세이빙 비용을 기본소득으로 돌리자는 것이다.
1020 미래세대라면 반드시 준비해야 할 역량
같은 아시아권인 이웃 나라 일본만 해도 원격근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는 일본 사회가 육아나 간병 등 경력단절 여성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기업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 역시 적극적이다. 2012년 기준 11.5%인 재택근무 도입 기업 비율을 2020년까지 3배로 늘인다는 방침을 지난해 6월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바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젊은층을 중심으로 디지털 노마드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세대들이 갈구하는 이상은 높지만 현실과의 간극은 너무 크다. 국내에는 원격근무를 시행하는 기업이 거의 전무한 탓에 해외로 눈을 돌려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제주에서 원격근무 스타트업을 운영 중인 소준의 카일루아 대표의 이야기에는 한국 디지털 노마드의 현실적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초중고교 12년 동안 모두가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것을 배우는 한국의 교육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결코 창조적이지도 않고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원격근무로 함께 일하기 적합한 사람들을 찾기 어려워 힘들었지만, 점차 디지털 솔루션에 익숙해지면서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내고 프로젝트를 만들기 시작했죠."이제 스스로를 들여다보자. 정규직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명백한 현실을 외면하며 도둑같이 다가올 미래를 팔짱만 끼고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좁은 땅덩어리, 보스와 협상할 여지가 없는 문화적 차이를 핑계로 거부만 할 일은 아니다. 생각이 젊은 당신이라면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 도태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디지털 노마드에 도전해볼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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