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의 다양한 문명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라는 의문의 답을 찾는, 장장 752페이지에 달하는 여정을 따라나섰던 적이 있다. <총, 균, 쇠>라는 길고 긴 여정이었다. 이 책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하나의 의문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기어코 그 궁극까지 파고들었다.
의문이 생기면 눈에 쉽게 보이는 근인이 아닌 현상 모두를 껴안는 하나의 궁극인까지 찾아 들어가는 방식. 이게 그의 방식인가 보다. 이 책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걸 보면.
하지만 이 책은 <총, 균, 쇠>보다 덜 치열하다. 고작(?) 272페이지의 책에서 7개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궁극인을 찾아나서는 자세는 <총, 균, 쇠>와 같았지만 그보단 덜 깊고, 덜 세밀하다. 책을 읽으며 어쩌면 이 책은 제레드 다이아몬드에겐 가벼운 에세이 정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나 같은 사람에겐 어려운 세계사이지만 말이다.
7가지 주제 중 특히 흥미로웠던 두 가지는 '왜 어떤 국가는 부유하고 어떤 국가는 가난한가'와 '세계가 직면한 중대한 질문들'이었다. 이 두 주제는 결국은 맞닿는 면이 있다. 심화되고 있는 국가 간 불평등이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꼽은 세계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 왜 노르웨이와 예맨의 국부 차이는 400배나 되는 것일까. 보통 얘기하듯 노르웨이엔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어서? 그래서 노르웨이는 부자 나라가 됐을까? 놀랍게도 천연자원은 국부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한다. 석유가 풍부한 나이지리아와 앙골라, 광물이 풍부한 콩고, 다이아몬드 생산지 시에라리온, 은이 풍부한 볼리비아 다 가난하다.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천연자원의 저주'라는 역설 때문이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가난하다는 역설. 가난한 이유는 첫째, 천연자원이 나는 일부 지역의 사람들이 그 자원을 독점하기 위해 내란이나 분리독립운동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둘째, 천연자원에서 나오는 수익을 자기 주머니에 챙기려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국가에 부패와 비리가 만연해 정부조직이 와해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해 앞바다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된 노르웨이는 어떻게 부자나라가 됐을까. 세계에서 부패지수가 가장 낮은 국가답게 노르웨이 정부는 유전에서 얻는 수익은 국민 모두의 것이라고 선언하고, 그 수익을 장기신탁기금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노르웨이의 정부조직이, 그러니까 잘 정비된 제도가, 노르웨이의 국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부자 나라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이 '좋은 제도'이다. 천연자원보단 좋은 제도가 나라 경제에 더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한 단계 더 파고든다. 그렇다면 왜 어느 나라는 좋은 제도를 갖추게 되었고, 다른 나라는 그러지 못했을까. 그러니까 좋은 제도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걸까. 바로, 오래된 농업 역사이다.
농업으로 인해 정주생활을 시작한 특정 지역 사람들은 잉여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 덕분에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특정계층이 생겨날 수 있었다. 왕족부터 해서 관료집단, 상인, 발명가, 교사 등등. 이들이 문화와 금속 도구, 시장경제, 법, 정치, 대학 등을 만들었고 여기에서 복잡한 제도가 탄생했다. 복잡한 제도의 역사가 긴 나라일수록, 그러니까 농업의 역사가 긴 나라일수록, 현재 '좋은 제도'를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가 꽤 많이 언급되는데, 우리나라를 두고 서구 경제학자들끼리 내기를 한 적이 있단다. 1960년대 당시, 그들의 내기 주제는 한국과 가나, 필리핀 중 어느 나라가 빈곤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였다. 대부분이 한국을 예상했다. 열대지역에 포함돼 있고 천연자원이 풍부한 가나와 필리핀보다, 춥고 천연자원도 별로 없는 한국의 가능성을 낮게 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을 보라. 우리나라는 제1세계 경제 수준까지 올라서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간 특정 산업, 특정 인물, 현대사 등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우리가 최빈국에서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더 먼 과거에서부터 찾는다. 역시나 농업 역사.
세계에서 농업이 가장 일찍 발달한 나라 중 하나인 중국 옆에서 많은 것을 전달받았고, 기원후 700년경에 단일 중앙정부 하에 통일이 되기도 했던 나라 한국. 저자는 "한국은 오래전부터 복잡한 제도를 경험했"던 나라이기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비록 해방 후 1950년대에도 여전히 가난했지만 제도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이미 부국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좋은 제도'와 함께 부자 나라가 되는 데 필요한 두번째 조건은 '좋은 기후'이다. 온대지역에 분포된 나라가 열대지역에 분포된 나라보다 부국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계가 직면한 중대한 질문들저자는 이어 중국의 부상과 개인과 국가의 위기관리 등에 대해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설명하거나 의견을 표한 후, 마지막으로 '세계가 직면한 중대한 질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계적인 석학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보기에 우리 앞에 닥친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세 가지가 있단다. 기후변화, 국내 그리고 국가 간 불평등, 환경자원 관리.
보통 지구온난화로 대변되는 기후변화는 이미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5월 날씨가 32도인 우리나라도 현재 기후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기후 변화가 몰고 올 가장 부정적인 영향에는 그럼 무엇이 있을까. 가뭄, 식량 생산 감소, 해수면 상승이다. 그렇다면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화석연료 소비를 줄이면 된다.
국가 간 불평등 문제 또한 크다. 상대적 박탈감에 빠진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줄을 잇는 이민과 테러, 그리고 국내 폭동.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지금은 딱히 없다. 그래서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허울뿐인 자선활동에서 벗어나 가난한 나라들이 '진짜'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난한 나라들에서 비롯된 각종 문제가 부자 나라에 고스란히 전가될 테니까.
무절제한 남획으로 어장, 숲, 토양, 물 등 재생 가능한 자연자원이 줄어들고 있는 것도 큰 문제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참 좋아하는 참다랑어의 경우에는 자멸적 남획으로 인해 5년 안에 어장이 붕괴될 것으로 내다 보인다.
이에 저자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왜 우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것일까요?" 저자의 답은 이렇다. "단기적으로는 이익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국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렸더라도 그런 결정을 내린 정치 지도자들을 지켜주는 정치제도" 때문이라고. 인기에 영합해 근시안적 정책에만 열을 쏟는 정치인들의 태도와 이를 막지 못하는 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저자가 보듯이 지금 이 지구, 이 세계는 기후도 망가지고 있고, 질병과 테러도 확산되고 있으며, 자원마저 고갈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우리, 장밋빛 미래를 기대할 수 있긴 한 걸까.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의견은 이렇다.
"인류에게 장밋빛 미래가 가능하냐고요? 가능합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보다 나은 선택을 한다면 말입니다." - 본문 중에서
여기서 나은 선택이란 일부 기득권층이 자기희생을 통해 과감히 단기적 이익을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 이 세계의 기득권층은 그럴 마음이 있을까? 마음이 있다면 빨리 선택해야 할 테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은 것 같진 않으니까. 이 책이 아닌 다른 인터뷰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스티븐 호킹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겐 고작해야 50년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 (재레드 다이아몬드 /김영사/2016년 04월 29일/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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