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7일 국회법 개정안에 재의를 요청(거부권)하면서 정국이 얼어붙고 있다. 사실상 19대 국회의 임기가 종료됨에 따라 야권은 20대 국회에서 재의 절차를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본회의에 상정되더라도 재의결(재적인원 2/3 찬성)은 불투명하다. '청문회 활성화'를 골자로 하는 개정안이 폐기된다면 20대 국회에서 야권이 추진하려는 각종 청문회도 무산될 가능성이 커진다.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의 자금 유입과 청와대 개입 논란이 벌어진 '어버이연합 사건'의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청문회를 추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검찰 수사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국회가 진상규명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더민주 '어버이연합 등 불법자금지원 의혹규명 진상조사 TF' 간사를 맡고 있는 박범계 의원은 지난 19일 전경련을 방문한 후 기자간담회에서 "국회 차원에서 청문회가 활성화되면 전경련이 현재 입장을 고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청문회가 열리지 않더라도 3분의 1만 결의하면 자료 제출 요구를 할 수 있게 된다"라고 밝혔다.
박 의원이 이러한 전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국회법 개정안의 내용 때문이다. 현행법상 청문회 개최 조건은 '중요한 안건의 심사와 국정감사 및 국정조사에 필요한 경우'라고 명시돼 있다. 개정안은 여기에 '현안 조사에 필요한 경우'를 추가한 것이다. '어버이연합 사건'과 같은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는 게 더민주 측의 판단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재의 요구에 따라 법안이 폐기되는 수순으로 간다면, '어버이연합 사건'은 청문회 추진 조건이 되기 어렵다. 여당에서 이를 명분으로 청문회 개최 안건 자체를 반대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문회를 추진하려면 본회의 의결이 필요한 '국정조사'라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어버이연합의 '관제 데모'와 청와대 인사의 개입 의혹이 핵심 사안인만큼 여당이 국정조사를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국민의당과 정의당이 추진하고 있는 '백남기 농민 사건'에 대한 청문회도 마찬가지다. 백씨는 지난해 11월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지금까지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들 야당은 당시 경찰이 물대포 사용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점과 백씨의 가족들이 '미필적 고의에 따른 살인미수' 혐의로 구은수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고발했지만 수사가 진행되지 않고 있는 점을 들어 청문회와 특검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현행법상 청문회 조건이 되기 어렵다. 국정조사가 이뤄지거나 오는 9월 정기 국정감사에 가서야 청문회 개최가 가능해진다. 이 역시 경찰의 공권력 남용과 '국가 폭력'을 핵심적으로 다뤄야 하는 사안으로 정부와 여당에게는 불편한 주제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여야의 합의가 없으면 국정조사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국정감사에서도 청문회 개최는 불투명해진다.
정부, "국정 부담 초래" 이유로 불리한 청문회 사전 제거?
이날 박 대통령을 대신해 거부권 행사 취지를 밝힌 황교안 국무총리는 "행정부의 모든 업무가 언제든지 청문회 대상이 될 수 있다"라며 "국정에 큰 부담을 초래하고 청문회 과정에서 공무원은 방대한 자료제출·증인 출석 등 많은 부담을 안게 돼 결국 행정부의 업무 마비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국정에 부담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권에 불리한 청문회를 사전에 제거하는 모양새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긴급기자간담회에서 "국회 운영에 관한 법률을 왜 대통령이 앞장서서 거부하나, 이는 의회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라며 "(박 통령은) 평소에 국회가 일 좀 하라고 닦달하더니 국회가 어렵게 일하겠다고 만든 법을 행정부가 귀찮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중대한 권한 침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