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예상치 못한 판결이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는 해석도 나왔다. 또 법원이 이재용의 삼성체제에 반기(反旗)를 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삼성은 곧장 '재항고' 의지를 나타냈지만,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지난해 미국계 헤지펀드의 엘리엇 파동을 불러온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논란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파장을 불러오고 있다. 삼성이 그룹 총수일가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삼성물산 주가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 것. 그동안 꾸준히 합병의 불공정성을 주장해 온 소액주주 등의 입장을 법원이 받아들인 것이다.
고법은 왜 1심 판결을 뒤집었나지난달 31일 서울고등법원 민사35부(윤종구 부장판사)가 내놓은 결정문을 보면, 삼성물산이 합병을 앞두고 의도적으로 주가를 관리해 온 정황 등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예를 들면 삼성물산 쪽은 자신들의 신규 주택 공급이나 건설 물량을 수주한 소식 등을 주주들에게 곧장 알리지 않았다. 작년 상반기 주택경기가 좋았을 때 다른 주요 건설사들이 주택 신규 공급을 크게 늘렸지만, 삼성물산은 300여 가구만을 공급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합병이 결정된 이후 지난 7월에야 서울에 1만994가구 아파트 공급 계획을 공개했다.
2조원짜리 카타르 복합화력발전소 공사를 수주해놓고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있다가 합병 이후에 공개한 사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작년 초 삼성물산은 자신들이 하던 공사를 삼성엔지니어링에 넘겨 주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합병 결의 직전인 지난해 5월 22일 삼성물산 주가(5만5300원)는 같은 해 1월 2일의 6만700원보다 8.9%나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같은 기간 다른 경쟁 건설사들의 주가는 적게는 17.2%(현대건설)부터 많게는 33%(지에스건설)까지 큰 폭으로 올랐다.
삼성물산 소액주주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선 '삼성 쪽에서 제일모직 합병에 맞춰 의도적으로 주가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물론 삼성 쪽에선 부인했지만, 시장의 의혹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엘리엇 펀드의 적대적 인수합병 시도와 소액주주의 반발 속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지난해 7월 가까스로 통과됐다. 옛 삼성물산 소액주주들은 회사 쪽의 낮은 매수가격으로 인해 손해를 봤다면서 법원에 소송을 냈다.
법원은 1심에서 삼성 쪽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삼성물산의 주가가 적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2심의 판단은 전혀 달랐다. 오히려 삼성이 합병을 앞두고 삼성물산 주가를 떨어뜨리려는 정황과 이유를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 재판부는 "시장 가격(주가)이 실제 삼성물산의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면서 삼성물산 실적 부진이 이건희 회장 등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됐을 수 있다는 의심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재판부는 당초 삼성물산이 주주에게 제시했던 보통주 매수가격 5만7234원을 6만6602원(2014년 12월18일 시장가격 기준)으로 올리라고 결정했다. 2심 판단이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될 경우 소송을 냈던 일성신약과 일부 소액주주들은 350억 원이 넘는 보상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의 삼성체제에 어떤 영향 미칠까
법원의 이번 결정에 대해 시장에선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는 반응이 나왔다. 국내 대형 사모펀드를 운영하는 한 고위인사는 "대형 로펌을 능가하는 삼성 쪽 변호인단을 상대로 소액주주들이 이뤄낸 대단한 사건"이라며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봐야겠지만, 이번 결정은 앞으로 기업합병이나 인수 등에서 큰 영향을 미칠수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이번 판결로 삼성의 이재용 체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있다. 그동안 삼성물산 합병이 이재용 부회장의 그룹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법원은 이번 합병 과정에서 삼성 쪽의 행위가 그룹 총수 일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점을 확인했다.
재계 한 고위 임원은 "작년 합병 과정에서 삼성이 국민에게 애국심을 호소하면서 (합병의) 정당성을 말하지 않았느냐"면서 "이번 판결은 그 같은 삼성의 입장을 뒤집는 것이며, 앞으로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이번 결정은 이재용 부회장 입장에선 큰 부담이다. 지난 2014년 이건희 회장의 유고 이후 2년째 그룹을 사실상 이끌고 있는 상황에서 지배권 강화의 정당성에 흠집이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이미 그룹 지배권을 둘러싸고 각종 편법, 불법 의혹을 받아왔다. 지난 1990년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인수 논란부터 2000년대 삼성에스디에스 일감몰아주기를 통한 막대한 부(富)의 이전 등이다.
한편 삼성 쪽에선 "합병의 모든 과정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뤄졌다"고 항변했다. 삼성 관계자는 "2심의 판단을 면밀히 검토한 후 대법원에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 결정을 그룹 지배권과 연결시키려는 것은 너무 나간 이야기"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