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나도 통신사 외주업체 파견직 노동자로 살았다. 100만 원이 채 안 되는 급여, 당시 80만원을 받았다. 누구에게 따지기도 참 뭐했다. 다 같이 파견 나왔다. "나도 몰라 임마" "나도 몰라, 이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야"라고 말하며 흔들리는 눈동자에 어쩔 도리가 없다. 파견직에서 노동자의 상사라고 별다를 것이 있겠나. 아무런 체계 없이 그저 방치되었다.
똑같은 약자들끼리 생계 앞에서 물어뜯고 살아야만 했다. 당시에 일했던 우리는 노동 영양실조 상태였다. 정신, 육체, 물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채워지는 것 없이 그저 겨우겨우 끼니를 잇고 월세를 내고 한 달 치 교통비를 충당하기에 급급했다. 목숨만은 이어가게 해주겠다는 사회의 횡포였다. 스크린도어가 없던 지하철, 나는 그 플랫폼에만 서면 뛰어내리고 싶은 잘못된 충동을 느낄 지경이었다.
창문 없는 방에서 휴일을... 지금의 청춘들은?
다수의 안전을 책임지려 세워진 스크린도어가 없던 시절, 나는 세상에서 내 직업이 가장 힘들게 느껴졌다 누굴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나는 80만 원의 급여를 받으며 1시간 30분 거리를 오가며 30만 원의 월세 ,10만 원의 교통비, 5만 원의 공과금, 3만 원의 통신비, 10만 원의 밥값, 양말값... 어려웠던 가족에게 용돈도 안 되는 금액의 생활비를 되는대로 보내고 나면 아무것도 모을 수가 없었다. 그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꽃다운 스무 살에 나는 단돈 10~20만 원의 여유라도 내어보려고 세간을 옮겼다. 당시 18만원 이었던 가장 싼 고시원에서 잠을 잤고 고시원 밥에 라면을 사서 1주일에 절반의 허기를 채웠다. 밥을 해먹기 귀찮아서가 아니다. 반찬값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건강을 돌보는 것은 그저 사치였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창문 없는 방에서 며칠 되지 않는 대부분의 휴일을 지냈다.
십 년을 넘기니 세상이 바뀌었다. 그런데 강산만 신기하게도 바뀌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갯냄새 나던 인천에는 유럽처럼 운하가 생겼단다. 도시에 63빌딩보다 높은 건물들이 여기저기 꺽다리를 내디딘다. 지하철엔 스크린도어가 생겼고, 경전철이 생겼다. 강남엔 트롤리버스라는 전차가 다닌단다. 도시의 거인 괴물 같은 건물들은 아름다운 야경을 빌미로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하지만 야경은 반짝 반짝 빛나는 죄 없는 회색 도시에 그려진 풍경이 아니라, 사람이다.
나의 아버지기도 한, 친구의 아버지이기도 한 야간 경비들은, 늙음을 인질로 잡은 갑의 횡포에 제대로 된 임금도 휴게시간도 변변찮게 일하다가 '아웃'된다. 노동 약자 계층에게는 나이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기를 한 사람만이 여전히 노동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한편에선 청년은 젊으니까 사서하라는 말을 등에 업고, 떠밀려 나왔든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했든 각자의 가정에서 혹은 홀로 외로이 총대를 메고, 안대를 쓴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보인다는 최면을 걸며 꿈을 꿔야 한다. 14년 전의 나도 그랬다.
14년이 지나도 노동자의 위치로서의 나는 정지상태다. 시를 써도 모자란 청춘을 나도 살았다. 나도 제대로 된 임금을 받는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다. 직장에 다니며 수난을 당하는 미생의 '안영이'도 남의 일이다. 나는 결국 노동자의 쓰디 삶을 포기했고 쓰는 것을 배우는 것을 선택했다.
세상 참 아름답다. 곳곳이 소금바다처럼. 나는 어디어디 포구에 서서, 결국은 포기를 한다. 어깨를 옥죄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야 만다. 여행 가방을 반납하고 맨몸으로 여행길을 이어가는 여행자 신세다. 누구 하나 믿어볼 사람 찾기 어려운 세상에 어디 시원하게 쉽게 말하기도 어렵다.
"
니들의 무관심이 이 사람을 죽였다"
그래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다른 사람을 위로하려는 사람들이 이제는 마음을 모아 자유롭게 표현을 할 수 있는 방법이 훨씬 많아진 세상이 왔다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다.
꽃다운 나이의 젊은 청년이 미소가 아닌 허기를 머금은 채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의 주인이 되어보지도 못한 채. 처음으로 사회에 나와 어른처럼 일을 시작한 앳된 얼굴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매일 긍정적인 주문을 건 채 견뎌내는 청춘들. 고된 일이 끝나고 멋쩍은 얼굴로 가족과 함께 구워 먹을 삼겹살 한 근 사 가지고 집에 들어오는 풍경은, 한때는 대통령이 꿈이었을 그들의 소박한 희망이다. 피로에 지쳐 우울에 지쳐 혹은 사회의 반복적 거절로 상처 난 가슴을 안고, 은둔해 골방에서 나오지도 못하며 제 할 말도 못하고 살아야 하는 시대. 적어도 여기에 용기 있게 나와 그 억울한 영혼에게 인사를 하러 온 우리는 그런 삶에 대해 안다. 모두 다 다른 삶을 살고 있어도 우리는 안다.
'니들만 지나치게 잘 먹고 잘 살면서 함부로 우리라고 우리나라라고 부르지도 말아라. 니들의 과욕이 이 사람을 죽였다. 칼을 들어야만 살인이 아니다. 니들의 무관심이 이 사람을 죽였다. 냉동 창고 같은 사회에 방치시키는 것도 살인이다. 우리는 안다. 니들이 조금이라도 우리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면 당신들은 이제부터라도 용서받을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