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그렇게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론 자꾸 겸손해지는 것 같다. 세상의 많은 것들을 저절로 우러러보게 된다. 글이 나를 저 아래 낮은 곳으로 번번이 인도하려 하므로.
치유의 의미로 글을 쓰는 사람이 많다지만, 난 사실 치유가 된 적보다 자신감을 잃었던 적이 더 많다. 못하는 걸 붙들고 어떻게든 완성하려 끙끙 대다 보니 그런 것 같다.
특히, 하얗디 하얀 백지를 눈앞에 두고 몇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다 보면 나에 대한 실망감이 커져만 간다. 아무것도 안 하고 이렇게 앉아만 있는 시간도 글 쓰는 시간에 포함해야 하는 거라며 자기 자신과 후대의 작가들을 위로했던 위대한 작가들의 말도 이럴 땐 사실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글쓰기는 포기하고 글쓰기 책이나 한 권 읽는 게 나을 때가 많다. 그래서 이 책 <나의 첫 번째 글쓰기 시간>을 읽었다. 내가 글쓰기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런 문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매 단계마다 '내가 이런 걸 이렇게 잘 쓰다니!'하고 감격했다가도 곧 '고작 이렇게 밖에 못쓰다니. 누가 보면 창피해서 어쩌지?' 싶어져 낙담하게 된다. 이렇게 자기 확신과 의심, 둘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락가락하다 보면 어느 순간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제대로 썼다는 확신이 온다. - <본문> 중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오락가락한다는 이 말이 그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다. 내게도 언젠간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제대로 썼다는 확신이" 찾아올지도 모르므로 계속 기다려보자는 의지 또한 슬며시 고개를 든다.
글쓰기 책은 보통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글쓰기가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좋거나 나쁜) 영향과 이를 (이해하거나) 극복하는 방법 등을 다루고 둘은, 글쓰기 수업을 옮겨 놓은 듯 기본 법칙이나 문법 등을 다룬다.
이 책은 두 번째 종류의 책이면서도 첫 번째 종류의 책처럼 포문을 연다. 글쓰기 초보가 쉽게 겪게 되는 고초로는 무엇 등이 있는지 나열한 후 힘을 북돋워준 뒤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으면 좋을 글쓰기 기본 지식들을 두루 설명한다.
예를 들면, 서사와 묘사의 차이는 무엇인지, 퇴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비유의 종류와 이는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지, 단문과 장문의 효과는 어떻게 다른지 등등.
책을 읽으며 난 내가 글쓰기 관련 기본 지식을 꽤 모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글쓰기를 배움의 영역이 아닌 감각의 영역이라 생각해왔던 탓이다. 물론 저자가 말하듯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몸익힘'이다.
말로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직접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책을 통해 그간 글을 쓰면서 익혀왔던 '감'을 '지식'으로 정리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그럼 글쓰기 앞에서 망설이던 최근의 이유가 조금은 분명하게 드러날지도 모르니까.
덧붙이는 글 | <나의 첫 번째 글쓰기 시간>(이남희/아시아/2016년 05월 06일/1만3천8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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