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보여주는 모양새를 서로 나눠 보고, 그 안에 담긴 뜻을 서로 헤아려 보고, 그 안에서 내 세계를 그려보고, 그로부터 지적 유희를 즐기고, 그것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그 안에는 주류도 없고, 패거리도 없는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재미있게 말하자면, 이 땅에 숨겨진 고수를 찾아서 놀이를 하자는 것이다.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한 세상 멋지게 놀 수 있는 이 땅의 고수를 찾는 놀이다. 2016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6 '권철론'은 6월 20일부터 30일까지 전시된다. - 기자 말사진가 권철은 흔히들 말하는 사진 전공을 하지 않은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 갑자기 사진이 좋아 사진을 배우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보도 사진을 찍으면서 꽤나 이름을 날렸다. 사진전문 주간지인 <프라이데이> 등 매체에 기고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보도 사진은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을 주지 않았고, 이름을 알리는 데도 괜찮아 사진가로서 평탄한 앞날이 나름 보장되었다.
그러다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을 접했다. 보도 사진 몇 컷만 찍어서 보내면 나름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 그를 짓누른 뭔가가 그를 그렇게 두지만은 않았다. 그의 눈앞에 닥친 장면은 무너진 건물에 몸이 끼어 탈출하지 못한 어떤 여자 아이가 두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비참한 현실이었다.
사람에게 닥친 저 고난이 나에겐 밥벌이, 이름 팔이의 대상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를 수차례 되뇌면서 권철은 이내 보도 사진가의 길을 버렸다. 사진가 권철의 첫 번째 버림이다. 그 버림을 통해 사진가 권철은 사실 전달의 세계를 넘어 진실 추구의 세계로 들어갔다.
권철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일본에서 상당히 인정받아 왔다. 도쿄 최대 환락가인 신주쿠의 가부키초(歌舞伎町)를 18년 동안 기록한 사진집 <가부키초>로 2013년 일본 최고의 권위 있는 출판상으로 꼽히는 '고단샤 출판문화상 사진상'을 수상했다.
그러다가 그는 느닷없이 한국으로 귀국을 결심한다. 그 계기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였다.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졌을 때가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던 때였다. 일본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것을 버리고 오는 것이 만만치 않았으나, 그에게는 일보다 가족이 더 중했다. 사진가로서 두 번째 버림이었다.
두 번째 버림을 통해 사진가 권철은 사진으로 진실 추구를 위한 길에서 또 하나의 방편을 찾는다. 그는 제주에 정착하여 트럭으로 풀빵(국화빵이다. 국화는 야스쿠니, 일본 제국주의의 문양이고) 장사를 한다. 트럭으로 장사도 하고, 거리 전시도 한다.
세상을 겪고, 기록하고, 전시하고, 행위 하는 것이다. 이미지로서의 사진만을 고집하는 것을 버리고, 이 사회에 저항하는 행위 사진가의 길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한국 사진계에 대한 좌절에서 핀 꽃이다. 그의 사진은 독대(獨對)다. 도꼬다이. 사진가 권철을 일컫는 말로 이보다 더 적확한 것은 없다.
포토저널리스트의 사명, 진실을 알려야 한다사진가 권철을 있게 한 것은 '가부키초'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 속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마을 그래서 인간 세계의 모든 것이 다 존재해야 하는 곳이다. 일본 최대의 환락가, 인간 군상은 다 이곳에 있다. 권철은 18년 동안 이곳을 기록했다. 사진가 권철의 사진이 사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진가로서의 출발 그 자체가 보도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보도 사진은 사건의 사실을 알리는 방식이다.
그래서 한 장의 사진으로 사건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이 좋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야 하고, 사진가의 시각이 배제되는 것이 좋다. 결국 사실을 알릴 뿐, 그 뒤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진실을 캐내지는 못한다. 몸담고 매체가 원하는 대로 찍어주는 주문배수 시스템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보도 사진 밖의 세계에 놓여 있는 넓은 의미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또 다른 세계다. 사진가의 시각이 들어가야 하고, 사진으로 말하기 방식이 독자적이다.
그는 다큐멘터리 주제로 항상 역사와 사회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들을 삼았다. 많고 많은 문제의 주제들 가운데 그는 한국과 일본의 근대사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자신의 주제로 삼았다. 가부키초, 야스쿠니, 오오쿠보 코리안타운, 우토로 등 일제 식민의 경험 및 2차 세계대전과 연결된 사건들이다. 한국으로 들어와 제주에 정착하면서 작업한 이호테우 또한 마찬가지의 동아시아사가 만들어내는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중국 자본 침탈의 역사를 해녀라는 소재를 통해 기술하는 것이니, 결국 한일 간의 문제가 한중간의 문제로 바뀌었을 뿐, 가부키초나 오오쿠보 코리아타운이나 마찬가지로 식민, 전쟁, 자본 등이 얽히면서 밀고 밀리는, 먹고 먹히는, 뺏고 빼앗기는 추악한 인간 군상의 세계를 들춰내는 작업이다.
그가 보기에는 제주 땅을 중국에 팔아 돈 버는 사람들은 모두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다음 작업은 자연스럽게 중국인들이 제주에서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을 침탈하는 주제로 연결될 것으로 보인다.
'텟짱'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진실을 찾아내서 밝히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것이다. <텟짱>은 소외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소외를 일제 식민 시기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동포들로부터 찾았다. 그런데 그는 그 소외를 또 다른 데서 찾는다.
일본에서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일본 내 한 한센병회복자 요양원에서 찾은 것이다. 주인공은 일본 구사쓰(草津)의 '한센인 요양소 낙천원'에 살았던 시인이자 한센병 회복자인 텟짱(가명 사쿠라이 데쓰오)이다. 권철은 1997년부터 텟짱이 사망한 2011년까지 14년간 그의 삶을 사진에 담았다. 한센병은 전염병도 아니다.
그 요양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완치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아직도 그들을 환자로, 전염병을 옮길지 모르는 사람으로, 격리해야 하고 우리 가까이에 두지 않아야 할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 오해와 멸시 그리고 그로 인한 소외와 고독을 권철은 세상에 말하고자 한다.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은 사진가 권철이 알려야 하는 일본의 핵심을 담고 있다. 10년 동안, 일본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기록한 이 사진집을 통해 그는 극히 일부 정치인의 극단적 파시스트적 정치 행위를 담았다. 사진들을 통해 권철이 던지는 메시지는 한국에게는 친일의 역사, 일본에게는 전쟁 범죄의 역사를 기억하자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자부심, 강하게 전달해야 한다사진가 권철에게, 다큐멘터리 사진을 한다는 것은 역사를 기록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지, 멋진 작품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비겁하지 않고, 에둘러 말하지 않는 작업을 하는 일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그것은 돈은 물론이고 '가오'까지도 없는 '우리'가 자꾸만 늘어가기 때문이다. 권철은 독설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독설을 말로 하는 게 아니고 사진으로 하다 보니 사진이 독하다.
피가 터지고, 술에 취해 쓰러지고, 여자가 가랑이를 다 벌리고 하는 따위의 장면이 독한 게 아니고, 그 장면들로 말하는 방식이 독하다.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인다. 가부키초를 정면으로 응시해서 그렇다. <텟짱>도 마찬가지다. 텟짱의 '흉측한' 얼굴은 콘트라스트가 센 흑백의 사진으로 더 흉측하게 담는다. 너무 독한 이미지로 말하는 다큐멘터리는 대중들로 하여금 지치게 만들고 이내 떠나게 만든다는 말은 호사가들의 말일 뿐이다. 세상은 아직 들춰내 만방에 알릴 독한 모습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
사람들이 가진 오해와 그 위에서 피어난 멸시와 소외에 대해 반박하는 사진이라서 역시 그의 사진은 무겁다. 이미 완치되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정상인이라는 사실을 이미지로 보여주되, 세상이 그들을 오해하니 사진가는 그보다 더 독하게 모습을 찍어 강공법으로 내보이는 방식이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연을 맺은 정미라는 여성의 '아름다운' 얼굴과 텟짱의 '흉측한' 몰골을 대조시켜 한 프레임 양 쪽에 위치시킨 이미지는 권철의 독한 사진의 압권이다.
<야스쿠니. 군국주의의 망령>에 수록된 사진은 단독적이다. 전체가 하나의 내러티브를 위해 장면들을 잇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신문이나 저널 읽듯이 각각이 독자적 영역을 구축한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무겁게 진행되다가 끝부분을 씁쓸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마치 디스토피아를 넌지시 보여주는 느낌이다.
그것은 사진가 권철이 끝부분을 벚꽃놀이 철에 행락객으로 붐비는 야스쿠니 신사의 평일의 모습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들 행락객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벚꽃놀이가 어떻게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일상의 놀이가 망각의 산물이고, 그것이 앞으로 전쟁의 대가로 이어질 수 있음을 사진가는 직시한다.
권철은 디아스포라 사진가로서 그는 두 나라가 처해 있는 공동의 역사적 문제에 대해서도 카메라를 들이대고자 한다. 2011년 일본 동일본대지진 피해지와 후쿠시마 원전을 취재한 그는 국내 노후 핵발전소 수명 연장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국내 핵발전소도 찍는 중이다. 두 나라의 핵발전소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만으로 그의 메시지 전달은 분명하다. 문제는 가부키초나 야스쿠니에서 했던 방식으로 이곳 핵발전소를 통해 사진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장면을 포착해서 기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문제는 핵발전소 안, 그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잇을 것이지만 그곳은 사진가에게 허락되지 않는 곳이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표현의 방식을 강화시키면서 말하기의 방식을 비유나 전유 혹은 패러디와 같은 문학의 방식을 쓸 수밖에 없다. 이런 표현의 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기록 위주의 한국의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 가장 어려운 작업 중의 하나가 핵발전소 문제일 것이다.
권철 또한 이 작업을 하면서 표현 방식을 약간 문학적으로 하였다. 개 두 마리가 서성거리는 이미지에서 세상이 망하고 인류가 사라진 후의 지구 묵시록을 보았고, 새끼줄로 묶인 죽은 굴비들의 구부러진 모습에서 인간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미래를 보았다.
다큐멘터리 행위사진가의 저항, 거리에서 전시하고 불태워버린다그가 한국으로 귀국을 한다고 할 때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사진으로 돈을 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평소 그의 지론이지만 사진 인프라가 일본보다 상대적으로 빈약한 국내에서 그가 겪어야 할 고난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2015년 제주의 여름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사진가 권철이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을 사진으로 고발하기 위해 제주시 제주목관아 안에서 사진전을 열겠다고 제주시에 요청을 했고, 제주시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허가를 해줬다.
그런데 느닷없이 광복회 회원 몇 사람이 일장기가 드러난 사진을 '감히' 어찌 광복 70주년 되는 날에 걸려 하느냐고 제주시에 강하게 항의했고, 이에 제주시는 그들의 항의를 받아들여 사진전을 취소해버렸다. 사진가 권철은 항의를 했지만, 제주시는 요지부동이었다.
일장기가 있으면 친일이라는 그 단순 무지한 문맹자들이 지배하는 세상, 문자는 해득할 수 있으나 뜻은 해득하지 못하는 그 눈 뜬 봉사들이 권력으로 활개 치는 세상. 그 안에 도사린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친일에 대한 광기. 사진가가 이렇게 당하고 있을 때 그 자리에 동료 사진가들은 없었다.
권철은 이호테우 사진을 해녀 탈의장에서 전시하였다. 사진의 주인은 그 일의 터전을 잃어버릴 해녀들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야스쿠니 사진들을 이호테우 해변에서 길거리 전시 한 후 모두 불태워버렸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항거다. 그는 이제 있는 사건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건을 이미지화 한 후 그것을 퍼포먼스를 통해 새로운 사건으로 만들어가는 사진가다다.
사건을 기록하는 사진가를 다큐멘터리 사진가라 할 때 사건을 기록하고 나아가 기록의 메시지를 행위로 실천해내는 사진가를 다큐멘터리 행위사진가라 부른다면, 그것은 권철을 일컫는 규정이다. 그는 야스쿠니 사진을 불 태웠던 곳 이호테우 매립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제주 전 지역을 순회 전시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에서 행동하는 사진가로 발걸음을 옮기는 지점이다. 사진가들이 예술을 위해 장르를 넘나드는 퍼포먼스를 할 때, 권철은 역사를 위해 기록을 넘는 행동을 한다.
권철이 세상을 독대한다는 것은 곧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망각해버린 역사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그의 독대는 중의적이다. 거리 전시를 한 후 사진을 불태우는 행위는 시인 엘리어트가 말하는 바,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생명이 태어나니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는 그 메시지를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 말고 또 한 가지가 읽힌다. 그가 태운 것이 사진인데, 그 사진이란 한낱 이미지일 뿐이다.
그 본질을 갖지 못하는 허탄한 이미지를 가지고 작품성이 있네, 없네라고 평가하고, 그것도 부족해 줄 세우고, 자기들끼리 짜고, 나눠 먹고, 예술이라 부르는 이름으로 노닥거리는 한국 사진판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다. 이미지 숭배라는 그림자놀이에 침을 뱉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금 당신들이 즐기는 그 연줄이라는 게 곧 불타 없어지고야 말 한 줌 재도 안 되는 권력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다.
권철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걸 후회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사진계가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그가 20년간 살아온 일본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나쁘고, 저질스럽고, 무식한 나라가 아니다.
일부 정치인들이 극우 파시스트적이어서 아직도 제국주의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여서 이웃 나라와의 평화를 깨는 일을 하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에 대해 배려할 줄 알고, 돈이 없거나 힘이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무시하곤 하지 않는다. 실력이 있으면 그만큼의 대접을 받는다.
그렇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약육강식의 정글이고, 철면피의 세계다. 비단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진계가 더욱 그렇다. 권철이 귀국한 것을 후회한 것은 이규상이 염려하듯 인프라가 부족해 고난을 겪어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한국의 사진판이 돌아가는 법칙, 바로 '그들만의 리그' 때문이다. 권력이 있는 자는 권력 행사를 못해 안달이고, 어중간한 사진가들은 그 주변을 서성거리고 싶어 안달이다. 한 사진가로 하여금 좌절하게 한 이유가 바로 이 한국 사진계의 연줄과 인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