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생산한 농산물을 하나라도 더 팔겠다는 욕심으로 하는 건 아닙니다. 농촌에 활력을 불어넣고, 나와 내 주변 모든 농민들이 노력하고 고생한 만큼의 보상을 얻길 바라는 마음이죠. 농업도 이젠 변해야 해요. 사회적 농업으로,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위해서요."여러 해 전부터 사회적 농업을 실천하며, 사회적 농업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는 정재근(59) 씨의 말이다. 지난 6월 11일 정씨를 만났다. 정씨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에서 '풀향기미술관 딸기농원'을 운영하고 있다.
"간단해요. 생산자인 우리 농부들이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확해서 소비자와 거래를 하는데요. 여기서 얻은 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나눔의 농업을 하자는 거죠. 그게 사회적 농업이에요."
정씨는 농사를 짓기 전, 시쳇말로 잘 나가는 미술 사업가였다. 하지만 IMF 여파로 부도가 나면서 경제사범 신세가 됐다. 징역을 살고 나와서 피붙이 하나 없는 고향 장성으로 내려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동안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자살을 시도하고, 후유증으로 한쪽 눈을 잃었다. 지인의 격려로 마음을 다잡고 새벽마다 마을청소를 했다. 낮에는 농사기술을 익혔다. 그를 눈여겨 본 마을 어르신들의 도움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땅을 빌리고 정부 지원도 받아 '풀향기미술관 딸기농원'을 꾸렸다. 9년 전이었다. 정씨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하우스에서 먹고 자고 한다. 가까운 거리에 집이 있지만, 단 하루도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자지 않았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사는 농업입니다. 농업인과 소비자가 함께 공감하고 공유하며 소통하는 농업이요. 그렇게 하면 소비자도 농촌 생활을 어느 정도 느끼고, 사회 공헌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정씨는 농사를 시작하면서 사회적 농업을 염두에 뒀다. 이를 위해 마음이 맞는 농민 몇 명과 들녘영농조합을 만들었다. 혼자였더라면 생각을 달리 할 수도 있었겠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힘을 낼 수 있었다.
정씨는 조합원들의 농작물 판매대금 가운데 7%를 적립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소비자들에게도 판매 대금의 일부를 적립하고, 그 돈을 장학금으로 쓰겠다고 알렸다. 소비자들이 반기고, 후원금을 보태기도 했다. 자연스레 조합원들의 소득이 올라가고 적립금도 쌓였다. 적립금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과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소비자들에게도 적립금의 사용 내역을 소상히 알려 드렸어요. 자신들이 간접적으로 기부에 참여했다는 생각이 들도록이요. 소비자들은 단순히 농산물을 샀을 뿐인데, 사회적 공헌으로 이어졌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끼셨어요."정씨는 판매 수익금 적립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재능 기부를 시작했다. 자신의 미술 재능을 살려 지역 장애인을 위한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컨테이너 하나를 들여놓고 장애인 미술교실을 열었다.
장애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관리하고 재배·판매할 수 있도록 딸기하우스 한 동을 장애인 자립농장으로도 제공했다. 어린이들에게 딸기 모종을 심고 따는 법을 가르쳐 주며 함께 농사를 지었다.
수확도 어린이들이 하고, 포장·판매도 직접 해 수익금을 쓰도록 했다. 딸기밭이 장애 어린이들에게 노동의 재미를 안겨주고, 경제적인 자립을 경험하는 체험의 장이 됐다. 모두 들녘영농조합의 적립금 덕분에 가능했다.
정씨는 귀농 희망자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전달하는 일에도 팔을 걷었다. 처음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시작했다. 요즘엔 한 달에 네댓 번씩 강연도 나간다. 자신의 시설하우스를 귀농인 무료 체험학교로 운영도 한다.
귀농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며칠이든 몇 달이든 머물면서 직접 농사를 체험하고, 귀농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농사기술도 가르쳐준다.
"9년 전, 제가 농사를 시작하면서 마을 어르신들한테 큰 도움을 받았거든요. 그 고마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다행히이 귀농체험을 한 사람들이 실제 장성으로 많이 내려와 정착하고 있어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정씨 나름대로 사회적 농업의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는 방식이다. 시작은 비록 크지 않았지만, 앞으로 크게 퍼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작은 불씨 하나가 광야를 불사르듯이, 시골의 한 작은 농원에서 발아된 사회적 농업의 씨앗이 광야를 서서히 뒤덮고 있음을 직감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