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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까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문화유산은 600건이 넘습니다. 근대건축 문화재의 경우, 역사적인 형태를 살리면서 공공건물로 리모델링하는 사례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논리에 밀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근대 건축은 훨씬 많습니다. 한번쯤 그 시대의 건축가들을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일그러진 근대의 일그러진 건축가들을 말입니다. 잊혀진 건축가들을 통해 그 시대의 또 다른 이야기를 알게 되면, 개발에 대한 관점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보존 방식도 좀 더 다양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 기자 말

1919년 4월 1일 공주 장날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

 간사이공학전수학교 시절의 강윤(가운데), 출처: 김정동, <강윤과 그의 건축활동에 대한 소고>
간사이공학전수학교 시절의 강윤(가운데), 출처: 김정동, <강윤과 그의 건축활동에 대한 소고> ⓒ 한국건축역사학회

현해탄을 가르는 부관연락선(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 하관)를 연결하던 연락선) 갑판 위로 10월의 찬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화석처럼 서 있던 청년의 얼굴에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청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밤하늘은 맑고 고요했다.

그제야 청년은 빗방울이 아닌 눈물임을 알아챘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그의 감정이 허물어졌다. 새까맣게 타버린 스무 살 기억이 바다 위에서 넘실거렸다. 

한 해 전 1919년 3월, 공주 영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은 여름보다 뜨거운 봄날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에 강윤도 있었다. 그들은 영명학교 사택에 모여 공주 장날에 벌일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기숙사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대형 태극기를 만들었다.

드디어 4월 1일, 그들은 장터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선두에 섰다. 사람들의 가슴속에 갇혀있던 말들이 함성으로 터져 나왔다.

"조선독립만세!"

일제는 신속하고 강력하게 진압했다. 강윤은 체포되었고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동안 그의 어머니는 매일 아들이 갇힌 곳 앞에서 기도를 했다. 영명학교의 윌리암스 교장(Frank E. C. Williams, 1883~1962)은 구속된 교사와 학생들을 위해 일제 당국과 일본인 재판장에게 탄원을 했다.

영명학교는 그해 신입생을 받을 수 없었고, 가을이 되기 전까지 학교 문을 닫아야 했다. 다음해 1920년 강윤을 포함한 7명은 졸업식 없이 졸업장을 받았다. 

윌리암스 교장은 형을 마치고 나온 강윤을 미국인 보리스(William M. Vories, 1881~1964)에게 소개했다. 보리스는 일본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며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보리스는 영명학교 신축 문제로 공주에 와 있었다. 얼마 후 강윤은 일본으로 가는 부관연락선을 탔다.

1920년 10월 12일 시가현(滋賀県) 오미하치만(近江八幡市)의 보리스건축사무소, 그곳에서 강윤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었다. 자신이 저항했던 적국의 땅, 게다가 미국인 선교사의 건축사무소라니.

하지만 강윤에게 전혀 생소한 환경만은 아니었다. 공주 영명학교는 감리교 학교였고, 강윤은 독실한 신자였다. 그곳에서 미국인에게 영어를 배웠기에 영어 회화도 가능했다. 건축은 몰랐지만 학교에서 이미 드로잉이나 제도 관련 수업도 들은 적이 있었다.  

직장 동료들의 국적은 다양했다. 일본인뿐 아니라 미국인, 소련인, 중국인, 심지어 베트남인도 있었다. 베트남인은 프랑스가 통치하던 베트남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온 경우였다. 조선인으론 강윤와 비슷한 시기에 온 임덕수가 있었다.

그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의료 선교사의 소개로 왔다. 1930년대 후반에 이르면 김한성, 최영준이 입사하여 강윤과 함께 조선의 건축 공사를 맡았다.    

직원이 국제적인 이유는 보리스의 건축주가 일본, 조선, 만주, 중국, 동남아 등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던 미국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의뢰받은 일은 교회, 학교, 병원, YMCA, 복지시설 등 선교 관련 건축이었다.

국적도 인종도 사연도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보리스건축사무소는 직원들이 출근하면 다 같이 예배부터 본 후 일과를 시작하던 기독교 공동체였다. 그럼에도, 아주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신앙보다 민족문제가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평소 잘 지내다가도 어느 일본인이 조선인을 비하하는 말을 하면 강윤은 가만있지 않았다. 일본 헌병의 고문으로 생긴 이마와 머리의 상처를 들이대며 맹렬하게 싸웠다. 신앙과 민족은 강윤이 치열하게 살아야 할 이유였다.

1933년 귀국한 강윤, 이화여전 신촌 캠퍼스 조성 맡아

 태화기독교사회관 사진과 도면, 출처: 김정동, <한국 근대건축의 재조명>
태화기독교사회관 사진과 도면, 출처: 김정동, <한국 근대건축의 재조명> ⓒ 대한건축사협회

강윤은 입사 5년 후 오사카 공사 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정식으로 건축교육을 마쳤다. 비록 3년제 야간과정이었지만 현장 근처 간사이공학전수학교(현재 오사카공업대학) 건축과를 졸업했다. 입사 7년 후에는 프로젝트 책임자가 되었다.

드디어 1933년 강윤은 귀국을 했다. 이화여전이 정동에서 신촌으로 옮기면서 캠퍼스 조성사업을 보리스건축사무소에게 의뢰했기 때문이다. 강윤은 부족한 공사비에 헌금을 하면서까지 헌신을 다해 공사를 마쳤다.

1935년에 본관(등록문화재 제14호), 음악당(현재 대학원관), 중강당, 체육관을, 1936년에는 기숙사(현재 진선미관), 보육관(현재 대학원 별관), 영어실습소(현재 영학관), 가사실습소(현재 아령당)를 준공했다. 그 밖에 공주 공제의원, 태화기독교사회관, 대천 외국인선교사 수양관 등을 했다. 

그 중에서 강윤이 가장 애착을 가진 건축은 태화기독교사회관(1939, 1979년 철거, 아래 태화사회관)이었다. 일제말기, 해방공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태화사회관이 고비를 맞을 때마다 강윤은 평생 그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왜 그랬을까? 

태화사회관이 들어선 터에는 원래 태화관이 있었다. 그곳에서 3·1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체포되었다. 이것만 보면 태화관은 저항의 역사를 가진 장소이다. 하지만 당시 태화관은 친일파들이 득실대던 고급 요릿집이었다. 직전에는 이완용이 살았고, 그 전에는 조선의 순화궁이었다.    

그런 태화관을 남감리회 여선교부가 인수해 1921년부터 여성교육과 복지 사업을 실시하였다. 1930년대 들어 사업이 확대되자 새 건물을 지으려고 보리스에게 의뢰를 했다. 그동안 보리스건축사무소에서 해온 선교 시설을 보면 고딕이나 로마네스크 등 양식주의 건축이 나올 만하다.

그런데 강윤이 설계한 태화사회관은 지하1층, 지상 2층, 옥상층으로 된 한양절충식이었다. 강윤은 자신에게 고난과 기회를 준 3·1운동, 그 운동이 선언되었던 장소의 흔적을 남겨두고 싶었다. 태화관의 다른 역사보다 그 하루의 의미가 그에게는 중요했기 때문이다. 마침 현장에 옛 한옥 기와들이 있었다. 그것을 흔적의 소재로 재활용하여 기와지붕을 만들었다.

내부공간은 건축주가 요구하는 기능을 충족해야 했다. 예배와 교육을 위한 공간은 서양식 평면으로 구성했다. 예배당은 고딕풍으로 꾸미고, 구조재인 목조 트러스와 나무의자마다 조선을 상징하는 암호처럼 태극 문양을 새겨 넣었다.

외관은 조선인에게 친숙한 분위기가 좋을 것 같았다. 뒷골목에서 볼 수 있는 조선식 토담이 생각났다. 벽체의 내구성을 위해 하부는 화강석으로 하고 상부는 회벽으로 마감했다. 그 사이에 한옥 문양의 띠를 돌렸다.   

그렇게 만든 건물에 대하여 강윤은, 막상 만들고 보니 "어중띠기"이고 "사이비"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태화사회관이 무슨 양식이냐고 물으면, "무양식"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1940년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 4월호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이 '양식'이 우리 건축가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일까. 그 지방에서 나오는 재료로서 그 지방의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는 모양의 집을 세우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일본총독부에 강윤은 비협조적이었다

사실 형태만 보면 태화사회관은 당시 일본이나 중국에서 하던 절충식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1930년대 일제가 각종 관공서 현상설계에서 필수사항으로 지정한 '일본취미'류의 절충식처럼 보일 수도 있다. 소위 '제관양식(帝冠樣式)'이라고 불렸던 '일본취미'의 건축은 전통적인 입면 구성과 지붕 형태, 근대적인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가 결합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절충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하지만 '의도'와 '의미'가 다르다. '제관양식' 뒤에는 일제의 제국주의가 있었다.

일본이 서양의 침탈로부터 동양을 구원하고 번영을 이룩한다는 식민지배 이데올로기, 서양의 문명화 능력과 동양 문화의 진수를 동시에 가진 우월한 정체성, 그것을 건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에도시대의 건축 형태와 근대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접목했다. '제관양식'으로 만든 관공서와 공공건물은 화려하고 웅장하며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태화사회관은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건축가, 기독교라는 외래종교, 교육과 복지라는 공공 기능, 전통건축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결합하여 태화관 터의 장소성을 표현한, 피지배자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일제의 '제관양식'처럼 지배 이데올로기를 위해 전통을 불러낸 건축은 오히려 해방 후 군사정권 시대에 등장했다.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를 '전통성'으로 풀려고 한 '의도'와 '의미' 때문이다.   

1940년 말 총독부는 미국 선교사들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태화사회관을 몰수하여 종로경찰서로 사용했다. 일경은 복음과 복지의 공간에 유치장을 설치하는 등 개조를 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강윤을 불렀지만 그는 비협조적이었다.

강윤에게 목조 트러스의 태극 문양을 제거하라고 명령해도, 그는 구조적인 문제가 생긴다며 거부했다. 그 일로 강윤은 자신이 지은 건물 유치장에 갇히곤 했다.

짙어가는 전쟁 분위기로 조선에서 보리스건축사무소의 사업은 중단되었다. 보리스는 강윤이 독자적인 건축 일을 하도록 했다. 1941년 강윤은 보리스건축사무소 경성출장소를 '강윤건축'으로 바꾸었다. 총독부에 기업 등록을 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미쓰코시 백화점의 일본인 점장을 이사로 하고, 회사 이름도 오하라공무소(大原工務所)로 바꿔서야 가능했다. 오하라는 강윤이 창씨개명한 大原沇에서 따온 것이었다. 일본인 점장은 강윤과 친분이 있던 기독교 신자였다. 전시상황이라서 일거리는 별로 없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강윤은 회사 이름부터 강윤건축설계사무소로 고쳤다. 해방공간은 불안정하게 요동을 치고 제대로 된 건축 일은 없었다. 일제말기에 추방되었던 윌리암스 교장이 미군정청 농업고문으로, 그의 아들은 해군 중령이 되어 귀국했다.

그 인연으로 강윤은 미군 공병대 자문 건축가로 임명되어 복구재건 사업을 도왔다. 하지만 그 자리를 빌어 미군이 발주하는 공사나 입찰에 참여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맡은 자문 역할에만 충실했다.

뒤이은 한국전쟁은 그에게도 시련이었다. 부산 피난을 끝내고 돌아온 그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집과 사무소, 잃어버린 자료들이었다. 강윤은 '고려토건사'라는 건설회사를 만들어 다시 시작했다. 한국전쟁 후 강윤은 이화여대 대강당(1956),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본관(1956) 등을 설계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쇠퇴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이화여전 본관과 이화여대 대강당
이화여전 본관과 이화여대 대강당 ⓒ 이화여대 블로그 이화투데이

해방 전 일본인이 휘두르는 건축계에서 조선인 건축가들은 비주류였고 피지배자였다. 일제가 물러가자 그 동질감도 퇴색했다. 대신 새로운 주류와 비주류가 형성되었다.

주류의 조건은 과거 일제가 설립했던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 출신자, 총독부나 관련 기관에서 건축 실무를 했던 사람, 해방 후 경성고공 건축과를 이어받은 서울대학교 건축과 출신자. 강윤은 그들과 아무런 공통분모가 없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강윤은 건축계를 주도하던 '대한건축학회'로부터 멀어졌다. '대한건축학회'의 전신은 '조선건축기술단', 해방직후 기쁨에 들떴던 건축가들이 처음으로 조직했던 단체였다.

그 단체의 첫 모임이 열렸던 곳은 강윤의 사무실이었다. 당시 그는 창립 멤버로 총무부 이사를 맡았다. 한때, 가장 어수선한 시절에 강윤은 그들 속에 있었다. 건축계가 자리를 잡을수록 그는 그들 밖의 존재가 되었다.    

1960년대에 들면 건축실무마저 접어야 했다. 압축적 근대화와 불도저식 개발로 건설 붐이 일어나던 시대, 그만큼 혼탁해진 건축 현실에 그는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건축 역시 그를 원하지 않았다. 경제적이고 기능적이며 합리적인 건축이 유행하던 시대에 보리스건축사무소에서 익힌 고전주의 양식은 통할 수가 없었다.  

1967년은 더욱 가혹했다. 그해 초 강윤은 뇌출혈로 반신불구가 되었다. 여름엔 평생 신앙의 동반자였던 아내가 심장마비로 그의 곁을 떠났다. 오래전 그가 직접 설계하고 가족과 함께 보냈던 팔판동 주택은 은행에 넘어갔다.

1975년 1월 30일 새벽, 강윤은 잠결에 한 여인을 보았다. 생계를 위해 행상을 다니는 여인이었다. 그녀 옆에 어린 아들이 따라다녔다. 모자가 물건을 파는 곳은 교회 근처였다. 부흥회가 열릴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느 날 장사를 일찍 마친 모자는 부흥회에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른 세상을 보았다. 얼마 후 두 사람은 기독교인이 되었고, 아들은 미국 선교사가 세운 영명학교에 입학을 했다. 영명학교 앞, 아들을 자랑스럽게 쳐다보던 여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희미해졌다. 강윤은 뻣뻣한 몸을 뒤틀며 사라지는 여인을 향해 소리쳤다.

"어머니!"

그날 강윤은 76년의 생애를 마쳤다. 장례식은 태화사회관 옆 중앙감리교회에서 치러졌다. 4년 후 태화사회관은 철거되었다. 그도 잊혀졌다. 27년 후, 2002년 그는 독립운동 공훈으로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30년 후, 2005년 대한건축학회는 그에게 공로상을 수여했다. 33년 후, 2006년 그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참고자료>
1. 김정동, 강윤과 그의 건축활동에 대한 소고, <춘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한국건축역사학회, 2008. 5. 
2. 김승제, 한국의 건축가-강윤(1)~(3), <건축사>, 대한건축사협회, 1996. 10~12. 
3. 이정선, 일본의 건축선교사 보리스의 생애와 사상 연구, 감리교신학대학교 석사논문, 2006.


#강윤#보리스건축사무소#근대건축가#태화기독교사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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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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