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군산군도 연결도로, 지난 2008년 착공을 시작하여 2016년 7월 5일 역사적 개통이 되었다. 이제는 누구나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고군산군도, 관문인 신시도를 거치면 바로 무녀도 2구 마을이 나온다.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산을 좌우로 끼고 마을공동체로 형성된 무녀도 2구, 흥미로운 이 곳의 문화관광거리를 찾기 위해 필자는 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 속살을 들여다 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기자의 입에서는 휘파람이 저절로 새어나온다. 예전엔 바다였던 이곳을 자동차로 운전하다니. 무녀도 2구로 가는 길에 적잖은 흥분이 떠오른다.
신시도 초입에서 얼만큼 왔을까. 웅대한 대교가 눈앞에 펼쳐 보였다. 이 고군산대교는 주탑이 1개인 현수교로, 신시도와 무녀도를 잇는 대교이다. 보통 2개의 주탑으로 구성된 일반 현수교와는 달리 주탑이 1개인 외팔이다. 특히 주탑은 돛을 형상화한 'D'자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1주탑 현수교로서는 세계 최장(L=400m)이다.
무당 巫, 여자 女, 그래서 무녀도
무녀도는 군산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신시도·장자도·선유도 등 주요 유인도와 함께 고군산군도를 이루고 있다. 이곳 무녀도에는 고려 말부터 전주 이씨가 모여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무녀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무녀봉(131m)에서 내려다 봤을 때 무당이 춤을 추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무당 무(巫), 여자 녀(女)를 써서 무녀도란다.
더 흥미를 끄는 이야기는 무녀도의 옛 이름인 '서들이'에 대한 내용이다. 재미있게도 '서들이' 명칭엔 '부지런히 서둘러서 일을 해야 살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현재 무녀도는 '서들이(1구)'와 '모개미(2구)' 두 개 마을로 구분이 되어 있다.
옛 명칭인 '서들이'에서 '모개미'로 따로 떨어져 나온 무녀도 2구, 초로의 마을 어른에게 "무녀도 2구의 옛 명칭이 모개미라고 하던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라 물었다. 어르신 말씀이 기가 막히다.
"모기랑 개미랑이 많아서 모개미인 게벼."이보다 더 재치있는 답변이 어디 있겠나? 모개미의 어원은 누구도 모른다. 다만 그곳의 관광거리에 관심이 갈 뿐.
무녀도 초입에 들어서면 좌측으로 보이는 무인도 섬.(섬 이름은 없단다) 해수면이 가장 낮아질 때인 간조가 되면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만들어진다. 기자가 방문한 시간은 간조를 지나 만조에 가까워 모세의 기적은 볼 수가 없었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간조시 길이 열리면 왕복 10분이 걸리고, 근처 갯벌은 바지락, 맛조개, 돌게 잡기 등 섬마을 체험활동 장소로 매우 활용도가 높단다.
기자가 직접 확인을 하지 못해 아쉽지만 간조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이곳만의 독특한 광경이다. 문화관광의 볼거리로 등재가 되어도 전혀 모자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섬마을 어린 아이들에게 놀이공원 '앞산'
작은 섬마을이 그러하듯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만한 안전한 곳은 없다. 섬마을 어린이들에게 놀이공원처럼 사용되는 '앞산', 이 '앞산'에 오르는 곳은 두 곳이다. 예전 초소(전투경찰 근무지)로 불리던 건물을 지나는 뒷길이 있고 바다를 끼고 오르는 앞길(사진)이 있다.
섬아이들에게는 놀이터, 외지인들에게는 힐링 장소(산에 오르면 사면을 둘러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심신을 달래준다는...)로 이용되었단다.
마을 장년층인 주민 이주호씨(남·41)에게 물어보았다. '앞산'은 어릴 때 어떤 의미었는지?
"저희 어릴 적엔 이곳이 최고의 놀이터였습니다. 육지 아이들이 갖고 노는 로보트 같은 장난감류는 없었지만 목검을 만들어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했고, 대나무를 잘라서 낚싯줄을 매달아 물고기를 잡기도 했고요. 겨울이면 썰매를 타기도 했던, 어릴적 추억이 많이 묻어나는 곳입니다."
동네 여사님들 소통의 장소 '우물가'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 섬마을은 물이 참 귀하다. 먹는 물은 물론이고 생활용수 또한 매우 귀하다. 그래서 빨래도 쉽사리 하지 못한다.
동네 딱 중간에 있는 이 우물은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서 먹을 물로는 사용이 불가하고 빨래를 하거나 잔칫날 식기세척용 등 생활용수로 사용되었다. 삶을 이야기 하고 이웃간 가정사를 공유하는 소통의 통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선비의 기개가 느껴지는 대나무 군락지대나무는 줄기가 곧게 뻗고 마디가 뚜렷하다. 마디 사이는 속이 비어 통을 이루고 마디는 막혀 강직함을 유지한다. 이런 연유로 선비의 지조와 부녀자의 절개에 비유되었다. 고려말 정몽주의 선죽교나 구한말 민영환이 자결한 곳에 대나무가 돋아났다는 이야기는 괜한 것이 아닐 것이다.
무녀도 2구엔 대나무 군락지가 두 군데다. 산 속이 아닌 집터에 있다. 대나무 종류 중 이곳에 있는 종은 '업평죽'으로 낚시대 외에는 쓰임새가 없다. 주인장 말로는 전부 다 베고 싶지만 다시 자라니 괜한 수고만 하는 것 같아서 그대로 놔둔단다.
대나무가 있는 무녀도 2구 마을, 지조나 절개와 상관 있는 뭔가를 찾아 내려 했지만 괜한 수고였다. 고즈넉한 섬마을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대나무와 맞닿으면서 내는 소리가 정겹다.
마을주민 부부의 순박한 마을사랑동네 초입을 거치고 마을 중심을 지나자 허기가 밀려온다. 횟집 앞에 놓여진 활어 수족관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가는 것은 신이 주신 본능일 터. 수족관 속 활어를 쳐다보고 있으니 주인장이 "한 사라 하세요" 그런다. 지갑 속 돈은 있으니 마다할 리가 없다. "좀 썰어주세요"라 답하고 회가 나올 때까지 잠시 대화를 나눴다.
20대 초반 외지에서 이 동네로 김 양식 책임자(주인 대리인)로 와서 산 지가 30년째라 한다. 고향보다 더 오래 산 이곳 무녀도가 너무 너무 좋단다. 정작 자신의 고향은 잊은 지 오래고 누가 고향이 어디냐 물어도 무녀도라고 말을 한다는 '근택이네쉼터' 주인장 임근택씨(56세). 그의 무녀도 사랑은 마을 원주민 누구와도 비견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회 한 접시를 뚝딱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돈을 안 받겠다고 한다. 장사하시는 분에게 실례가 될 수 있어 거듭 돈을 계산하려는 나에게 주인장은 말을 건넨다.
"오늘 아침에 예상치보다 훨씬 많은 활어가 걸려들었네요. 오늘 반가운 분이 방문하려나 했는데 꼭 손님이 그 반가운 손님 같아서 기분 좋게 서비스하고 싶네요."허기진 배를 회로 채우고 거기에 인심까지 채웠으니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무엇이랴...
재미있는 명칭, '똥섬'"저기 보이는 돌산요.. 뭐로 보이나요... 우리 섬 사람들은 '똥섬'이라고 부릅니다."매우 재미난 이름이다. '똥섬', 왜 앞에 보이는 섬을 '똥섬'이라고 했을까? 혹시 옛 주민들이 화장실이 없어서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전용 섬(?). '똥섬'에 대한 기원을 모르는 주민들.
한 어르신께서 흥미있는 말씀을 하신다.
"저기 똥섬에 가믄 문양석이라고 있는디.. 돌판에 그림 같은 거 그려져 있는 돌이요... 겁나게 귀한 돌이어서 무녀도 2구 허믄 '문양석'이었죠. 예전에 사람들이 많이 가져갔지요. 그려서 지금은 많이 없어졌어요. 돌 구경하고 싶으면 함 가봐요."
퇴적암 속 진주 '문양석'마을 어르신이 이야기한 '문양석' 도대체 어떤 돌이길래, 많은 사람들이 무수하게 가져갔단 말인가. 무녀도 2구 앞바다의 몽돌를 밟으면서 '문양석' 구경에 나섰다. 수억년 전부터 켜켜이 쌓인 점토와 모래 등이 층별로 굳어져서 만들어진 퇴적암.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고 수채화의 수려함으로 다시 태어난 돌에서 자연의 신비한 섭리를 느끼며 그저 감탄한다. 지금은 돌 유출이 금지되었지만, 예전에는 유출에 대한 금지 규정이 없어서 수석 전문가들이 많이 주워갔다고 한다.
아트월 같은 문양석, 요 물건이 왜 한때는 무녀도 2구를 대표했는지 그 풍경이 말해주고 있다. 퇴적암과 곳곳의 주상절리가 합쳐져 야외 자연 갤러리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외갤러리에서 문양석 구경으로 흠뻑 취해 있다. 계속 이어지는 문양석의 파노라마식 비주얼 덕분에 눈을 뗄 수가 없다. 한참을 걸어갔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동굴이었다. 몽돌이 입구를 막고 있어서 내부가 깊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동굴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민들이 동굴의 존재를 몰랐던 것인가. 그러하다면 최초의 발견자는 본 기자일 것이다. 찬찬히 입구에서 동굴 안쪽을 살펴 보았다. 파도에 의한 침식으로 만들어진 것임에 분명할 터. 침식이 되면서 이어 밀려온 몽돌이 입구를 막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동네로 나와서 지나가는 주민한테 좀 전에 본 것이 동굴인지 아닌지 질문을 던졌다. 주민분의 말이 걸작이다.
"동굴처럼 생겼응게 동굴이지요."
또 하나의 무녀도 2구, '버럭샘이'현재 1구와 2구로 나누어진 무녀도, 1960년도까지는 1구와 2구 중간에 세 가구만 사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1930년대 외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정착하여 60년대 십이동파도 주민 북한 납치사건을 계기로 2구 마을로 이전하기 전까지 거주지 역할을 한 곳으로 1, 2구 주민들은 그곳을 '버럭샘이'라고 불렀다.
그 지명에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왜 '버럭샘이' 일까. 해답은 당시 버럭샘이 거주자였던 어르신한테서 들을 수가 있었다.
"버럭샘이는 원래 바닷가였는디 1930년대 초에 우리 할아버지가 군산 비행장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농사를 지어먹을라고 제방을 막었어요. 내가 태어나기 전이라서 현장을 보지는 못혔는디 울 아버지가 말씀 허기로는 근 1년간 했답띠다. 돈은 없응게 할머니가 담은 막걸리를 일당 대신혀서 막은 제방여요. 참말로 돈도 없이 막걸리로만 일꾼들 부렸다는 게 신기허지요. 제방을 막었응게 그 다음은 거주를 해얄꺼 아니오. 그려서 우물을 팠는디 그 샘물이 하도 버럭버럭 잘 나와서 '버럭샘이'라고 했다네요.(웃음)"꼬박 하루 머물렀던 무녀도 2구... 앞서 기술한 내용으로 관광거리를 다 말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미흡하다. 더 많은 흥미로운 거리가 있는 듯... 이 동네는 나의 맘을 계속 붙들어 놓는다. 여전히 순수함이 살아있는 인심과 무한한 관광자원, 무녀도 2구 재방문 개봉박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