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없이 겨울을 보내고, 입춘과 함께 찾아온 환절기의 격렬한 일교차마저 잘 견디고, 봄을 맞은 나의 몸은 초여름, 드디어 탈이 나고 말았다. 한 달쯤 전 일이다. 지나친 냉방, 찬 음료 또는 시원한 맥주 등이 원인이라고 짐작된다. 열이 나고 기력이 빠지더니 의욕도 사라지는 기분 나쁜 병증이 덮친 것이다. 과한 외부의 자극에 대한 몸의 반응은 정확하다. 어느 과학자의 말이었던가? 우리의 몸은 25세가 넘으면서 노화가 시작된다는 정보를 떠올린다.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 신간, <몸의 일기>는 다니엘 페나크라는 소설가의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사실은 그의 저작만은 아니다.
그의 친구인 '리종'이라는 여성의 부친이 쓴 '일기'를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이 <몸의 일기>가 된 이유는 일기의 주인공이 리종에게 일기 뭉치를 유산으로 물려주며 전하는 말을 참고한 듯하다.
"내가 매일 일기를 쓴 건, 우리의 길동무,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에 관해서란다. 열두 살 때부터 여든여덟 살 마지막 해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일이 생길 때마다 – 우리 몸은 놀랄 거리를 제공하는 데 인색하지 않지 – 기록을 한 거란다."(본문 11쪽)개인적 역사와 철학, 일기'일기' 하면 <안네의 일기>와 <백범일지> 등을 떠올리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이 글들은 사실 편지글이다. 안네는 가상의 친구 키티에게, 김구는 아들에게 쓰는 편지글 형태다. 그러고 보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친구에게 로테에 관해 쓰는 편지들로 이뤄져 있다.
결국 일기는 '나'의 내면에게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타인에게 보여질 운명을 타고 났다. 부끄러워서 자물쇠까지 채워놓고 외부와 단절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시간이 흘러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나면 일기는 개인의 역사가 된다. 창피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내용이 감춰야 할 비밀의 것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일기 속 내용은 다른 인간들도 겪은 감정이거나 사건들이기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몸의 일기>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12살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으로 나무에 묶여 있다가 똥을 싸는 바람에 몸을 '배설의 펌프'로 생각하기도 했고, 사춘기 무렵의 어느 날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흘러나와 속옷을 적시고 만 정액 때문에 몸을 기이한 생명체로 여기기도 했다. 또, 원인 모를 이유로 고통을 겪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게도 했던 유기체로 생각되기도 했던 것이다.
어린이는 호기심이 많다. 호기심은 질문으로 이어지고 질문은 또다시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이들의 지적 성장은 어른들 하기에 달렸다. 사소한 것에서 뭔가를 느끼게 해주는 것 말이다. 일기 주인공의 아버지는 그런 어른이었던 모양이다.
"청결함에 관해선 아빠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어느 날 내가 아빠 등을 때수건으로 밀어주고 일을 때 아빠가 말했었다. 우리가 벗겨낸 이때는 다 어디로 갈까? 너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니? 우리 몸을 깨끗이 하느라고 우린 또 뭘 더럽히고 있는 건지."(본문 31쪽)일기를 통해 본 프랑스 사회10살 무렵 동네 어르신이 돌아가셨다. 마당 앞 평상에서 말없이 햇볕을 쬐고 계시던 할머니였을 것이다. 시골 동네의 어린이들을 보시며 우두커니 앉아계시던 그 할머니의 부고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 집의 안팎을 둘러쌌다. 어린 나는 생각했다. 항상 홀로 계시던 그 할머니를…, 언뜻 <몸의 일기>와 관계없어 보이는 에피소드가 생각난 것은 왜일까?
1923년에 태어난 일기의 주인공은 태어나서 87세가 되는 2000년까지 일기를 썼다. 일기에서 주인공은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더 나이 들어서는 손주도 봤으며, 노환으로 세상과 이별했으니 축복받은 인생으로 기록될 만하다.
그런데 주인공의 삶 순간순간엔 찢어지는 고통으로 얼룩진 순간도 있었다. 코에서 매일 한 사발씩 피가 쏟아지는 희귀한 병에도 걸렸고, 70세 무렵에는 전립선 비대증으로 고생했다. 요도에 소변줄을 꼽고 발목엔 소변주머니를 차고 다니기도 하고 심지어는 요도 절개술까지 받았다. 또 사랑하는 손주가 동성애자인 것임을 알게 되기도 했다. 편견은 오래가지 않았고 곧 파트너까지 받아들인다. 그런 손주가 전염병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평생을 함께 한 이웃 동생의 죽음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럼에도 주인공의 인생이 전체적으로 볼 때 행복한 것으로 기억되는 것은 왜일까?
일기의 주인공이 외롭거나 경제적 궁핍으로 고통 받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요즘 도심 속에서 발견되는 노인들을 보자. 노년의 그들이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은 또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나는 이 일기를 읽는 내내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 뻔한 이치, 인간은 누구나 늙는다는 것이다. 노후를 대비한다면 지금의 노인들을 돌아봐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둘째,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연대감과 사랑의 감정은 튼튼한 공동체 속에서만 자라날 수 있다.
<몸의 일기> 속 주인공이 시대를 달리 하면서도 끝까지 행복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면서도 딸에게 자신의 일기를 물려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또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나의 몸은 매년 찾아오는 환절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것이고, 내부에 예고 없이 질병을 키우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며, 꾸준히 노쇠한 세포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늙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외롭지 않으려면 공동체 속에 있어야 한다. 신간, <몸의 일기> 재미있다.
덧붙이는 글 | <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2015년 7월,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