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8일 밤 당신은 어떤 프로그램을 보았나? 아, 인기리에 방송 중인 월화 드라마 <닥터스>가 있으니 그걸 봤을 수도 있겠다. 마지막 대미를 장식한 <또 오해영>도 있으니 이걸 보았나?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겠다. 혹시 이들 프로그램이 아닌 동시간대 다른 프로그램을 본 사람이 있다면 무엇을 보았나. <시사 기획 창>을 보았나, 아니면 <PD수첩>? 또 다른 질문을 해보겠다. 29일 당신이 클릭할 기사는 어떤 것일까? <PD수첩>에서 방영한 박유천씨 관련 기사일까? 아니면 <시사 기획 창>에서 방영한 대우 해양 조선 구조 조정과 관련된 기사일까? 

하루 하루 자신의 삶을 살기에도 바쁜 당신이지만, 그래도 '고소녀 인터뷰'라고 잔뜩 홍보를 했던  박유천씨 관련 기사는 놓칠 수 없었다고? 아니다. 이 또한 전제가 잘못되었다. 28일 방영된 <PD수첩>은 방영 전부터 이날 프로그램과 관련된 홍보 기사를 다수 냈다. 어디 그뿐인가? 방송 시간을 전후해서, 이날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내용은 캡처본과 함께 '무수한' 기사로 재양산됐다. 물론 당신은 흥미로웠다고 했지만, 이 '흥미'는 다분히 '조장'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한 도시와, 그 도시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일가들이 하루 아침에 길거리로 나앉게 생긴, 그리하여, 차후 한국 경제의 진앙지가 될 대우 해양 조선을 다룬 <시사 기획 창>에 대한 후발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아니 난다 하더라도 '박유천'씨의 기사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일 것이다. 이 상황이야 말로 <곡성>의 '무엇이 중하냐고? 무엇이 중한디?'라는 대사가 딱이다.

 대우 해양 조선
대우 해양 조선 ⓒ KBS1

길을 잃은 조선업, 그리고 갈 곳을 잃은 사람들

28일 <시사 기획 창>은 '긴급 르포, 구조 조정 현장에서 길을 묻다'를 방영했다. 프로그램 제목에 '긴급'이란 수식어가 들어갔듯 최근 한국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을 진원지가 될 조선업의 구조 조정 위기를 다룬 것이다. 격세지감이다. 1972년 조선소도 지어지지 않은 울산 백사장에서 현대 조선 기공식으로 첫 삽을 떴던 우리나라의 조선업, 1989년 대우 조선 직장 폐쇄라는 위기를 겪으면서도 2000년 세계 1위의 혁혁한 성과를 이루었던 한국의 대표적 산업이 '위기'를 겪고 있다니 말이다.

카메라가 처음 향한 곳은 거제의 인력소개소다. 새벽 인력 시장, 카메라가 거기서 만난 것은 'dsme'라는 대우 해양 조선 이니셜이 새겨진 작업복을 아직도 입고 있는, 한때 그곳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다. 이 새벽 인력 시장을 찾은 일용직 노동자들의 60%에 해당하던 이들은 대부분 '물량팀'이라는 이름으로 대우 조선 인력의 70~89%를 채웠던  협력업체 직원들이거나, 재하청 계약직들이다.

'구조조정'의 파고는 이들에게 제일 먼저 들이닥쳤다. 이제 이들은 조선소에서 일하던 그 복장으로 새벽 인력 시장을 찾는다. 거리로 내몰린 것은 하청업체 직원들만이 아니다. '단가 후려치기' 등으로 피해를 감당했던 하청업체들도 휘청거리거나 연쇄 도산 중이다. 그들이 머물던 주거지와 상가 거리는 이제 적막에 싸여 네온사인만 빛난다. 정규직이라고 안심할 것은 아니다. '솔선수범'을 외쳐보지만, 하반기부터 들이닥칠 구조조정으로 위기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그저 조선업계의 불황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시사 기획 창>의 진단은 다르다. 이미 <썰전>을 통해 '해먹어도 너무 해먹었다'는, 주인 없는 기업의 도덕적 해이로 말미암은 총체적 부실은 물론, 근본적으로 '해양 플랜트' 사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기술력 부족'등으로 빚어진 경영 전략의 부재 혹은 판단 미스는 '분식 회계'를 불가피하게 만들 정도로 너무나 치명적이란 분석이다. 그리고 그런 말 그대로 '부실' 경영은 고스란히 '경영 손실'로 이어지고 이제 '구조 조정'이란 이름 하에 조선업계 노동자들과 그 일가족, 그리고 한국 경제의 몫으로 귀착된다고 다큐는 밝힌다.

심각한 것은 이런 대우 해양 조선의 침체가 그저 한 도시 '거제'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큐는 거제를 떠나 전남 광양으로 카메라를 돌려, 조선업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하지만 역시나 낙하산 경영진의 무책임한 경영이 문제가 되었던 전남 광양의 포스코로 향한다. IMF 시절에도 불황을 몰랐던 포스코. 하지만 779만톤의 생산 능력을 가진 포스코는 작년 자체 생산량을 577만톤으로 줄이며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체감 온도는 그 지역의 경기로 곧장 전해진다.

하지만 그런 포스코와 달리, 선제적인 구조 조정을 한 '동국제강'은 조선업계의 불황에도 4분기 연속 흑자를 내며, 불황의 늪을 벗어나고 있었다. 결국 세계적 불황이 조선업계 구조 조정의 '면피'가 될 수 없음을 다큐는 밝힌다. 나아가 현재 조선업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감당하기 힘든 '해양 플랜트 사업'에 대한 향후 전략과 경영 방식이 현 조선업계 불황 해소의 관건이 될 것임을 다큐는 밝힌다. 덧붙여, 현재 정부가 '능사'로 삼고 있는 '인력 감축' 등의 구조 조정 방식이 유일한 '해답'이 아니라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대우 해양 조선
대우 해양 조선 ⓒ KBS1

법보다 앞선 가십 

이렇게 새벽 인력 시장으로 내몰린 대우 해양 조선 노동자의 모습을 담으며 거제, 그리고 우리 사회에 몰아닥친 조선업계 구조 조정을 생생하게, 하지만 차분한 분석과 대안까지 마련하려 애썼던 <시사 기획 창>과 달리, 28일 방영된 <PD수첩>은 그야말로 '가십'의 결정판이다.

그간 <PD수첩>은 연예인과 관련된 사건은 다루지 않았지만 박유천씨 사건은 워낙 중한 사건이라 다루었다 라고 스스로 밝혔지만, 아직 '법률적 판단'이 내려지지 않은 이 사건이 왜 '시급한'지 이날의 <PD수첩>은 설득하지 못했다. 박유천씨와 그의 소속사가 법률적 판단 이전 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또 한 명의 피해자를 앞세워 박유천이란 연예인의 '관뚜껑'을 덮기에 급급했던 이날의 방송이 과연 필요했는지 여러모로 의문스럽다.

박유천씨의 고소 사건이 드러난 후 종편 방송 분량의 70%가 여기에 할애되고 있다는 민언련의 분석이 나온 상황에서, 정통 시사 프로그램이라는 <PD수첩>이 왜 철저하게 한쪽의 입장에 의거하여, 자신들이 밝히듯이 '한류 스타'라는 연예인을 파렴치범으로 단죄하는 방송을 했는지 의문스럽다.

최근 박유천씨의 국내외 팬클럽 등은 성명서를 통해, 아직 법률적 판단이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분별한 보도로 박유천씨의 인권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 28일의 <PD수첩>은 종편의 방식을 고스란히 되풀이했다. 해외의 한류 팬들조차 불공정한 한국의 언론을 개탄하고 있는 상황에서 <PD수첩>은 같은 양상을 반복했다. 이미 박유천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일말의 범죄 사실이 법적으로 인정될 경우 '은퇴'를 하겠다고 밝히고 있는 상황이며, 그게 아니라도 범죄가 성사될 경우 '처벌'을 받게 될 것인데 방송들은 서로 앞다투어 '여론의 뭇매질'을 선동하기에 급급하다.

 세월호
세월호 ⓒ 오마이 뉴스

문제는 <시사 기획 창>에서 다룬 정말 우리가 심각하게 지켜보아야 할 대우 해양 조선 등 조선업계의 구조 조정이 이런 일련의 '가십'성 기사로 인해 묻히거나, 아예 주목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희한한 일은 한국 사회의 '위기'라 할 만한 사건들이 연일 터지고 있는 가운데, 마치 작정이라도 한듯이 연일 '연예인'들의 '가십'성 기사가 함께 터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유천씨의 고소 사건 이후, 종편의 방송분 70%가 그것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은 물론, 수천 건의 관련 기사들이 양산됐다. 마치 사람들이 시들해져서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릴까봐, 종편에 이어, 이젠 공중파까지 '가십' 보도에 가세한다. 어디 그뿐인가? 박유천에 이어, 이미 법적으로 의미가 없는 홍상수-김민희의 불륜이 수면 위로 올라 왔다. 대중들이 신선해 하지 않자, 홍상수 감독 부인과 김민희 어머니의 카톡 내용까지 만천하에 공개됐다. 이미  김현중과 그의 약혼녀 사이, 그리고 이병헌과 그의 고소녀들 사이의 '카톡' 내용에 이어 같은 방식이다. '정보 공개법'이나 '사생활 침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이것도 시들하자, 이젠 주식 투자와 관련된 아이돌 경제사범까지.

인류는 진화론적으로 '풍문'에 약하다고 한다. 일찍이 '언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신석기 시절', 생존을 위해 '소문'에 귀기울였던 유전자 정보가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여전히 그 신석기적 유전자로 살아가고 있다지만, 우리에겐 언론이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 대중의 언론은 '정론' 대신, '가십'으로 연명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진실'에 대한 예리한 시선 대신, '유병언'과 관련된 '가십'으로 대중을 인도했다. 그 결과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에야 우리는 그 당시 세월호에 실려있던 것이 제주 해군 기지로 가는 철근 400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그조차도 제대로 보도되지 못한 채 여전히 세월호 가족들은 청와대로 향하다가 잡혀가는 신세가 될 뿐이다. '박유천으로 인해 덮인 7가지 사건'이라고 하자, 누군가는 박유천이 아니라도 다 볼 건 찾아본다고 비아냥거린다. 하지만 수천 건의 박유천 가십을 뚫고, 세월호 400톤 선적을 찾아볼 눈밝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세월호 승객을 구조하기 위해 애쓰던 잠수사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마찬가지다. 한 건도 제대로 기사화되지 않는 대우 해양 조선 구조 조정에 대한 르포를 역시나 쏟아져 나오는 박유천 기사를 뚫고 찾아볼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러니 다시 정치의 세월이 돌아와 그 구조 조정조차 '정치'의 흥정거리로 뒷방에서 거래가 된다 한들, 사람들은 또 누군가의 '가십'에 정신팔려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현실처럼. '가십'에 길들여 지는 사회, 그것이 바로 '박유천'과 관련된 기사를 클릭하는 우리의 현주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피디수첩 #시사 기획 창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