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모양새다. 이념적으로 편향되었다고 비판받던 박승춘 보훈처장은 이념보다 실제 행적이 중요하다 외치고, 이념적 편향성을 비판하던 야당의원은 '행적보다 이념'을 내세운다.
지난 27일 <뉴스타파>에서 항일독립운동가 강진석에 대한 서훈 수여가 보도된 이후 3일 동안 벌어진 일이다. 비판하던 이와 비판받던 이는 같은데, 공격과 방어의 논리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애초 <뉴스타파>의 관련 보도는 뉴라이트 출신의 보훈처장이 자기 사람을 앉히려고 공적심사위원을 무리하게 교체하면서 심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비판의 근거로 강진석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김일성의 외삼촌이기 때문에 서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보지 않았다면, 국회 정무위원회에서의 속기록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이런 논리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과 진보매체에서 나왔다는 것을 선뜻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28일 국회 정무위원회에서는 마치 우익정당 의원이 과거 노무현 정부의 보훈처장을 꾸짖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의 대화가 오고 갔다.
강진석의 항일운동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그가 일제시기 옥살이한 독립운동가 중 가장 오래 산 급에 속할 정도로 얼마나 치열하게 독립을 위해 싸웠는지의 사실 따위는 그의 조카가 그가 사망한 뒤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묻어야 할 것으로 치부되어 버렸다.
한때 진보정당운동에서 촉망받는 젊은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야당 의원은 보훈처장을 혼쭐내면서 '김일성 아버지에게도 서훈 줄 수 있는가, 그게 국민정서에 맞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반공웅변대회가 아니다. 국회 정무위였다.
강진석 서훈 논란에 숨어있는 연좌제, 종북 혐오의 논리
이런 대화와 공박 속에는 두 가지 사회적 사실이 개입되어 있다. 하나는 연좌제이며 다른 하나는 종북주의적 혐오다. 어떤 개인의 인생과는 상관없이 그의 친인척의 공과로 재단되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는 강한 고집이 진보매체와 야당의원에게서도 발견되고 있다.
일생을 항일전선에 바친 독립운동가는 자신이 알 수도 없는 사후의 역사 때문에 과거가 부정되어 버렸다. 이것이 연좌제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대통령을 비판하는 이유 역시, 그가 누군가의 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행적 때문이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등장한 이후 더욱 노골화된 종북 혐오주의 역시 이 사건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 스스로 진보, 개혁을 자처하는 이들에게조차 뿌리깊게 자리 잡혀 있는 혐오의 논리는 이제 자기 스스로 그 논리에 올라타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종북주의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종북 감별사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다. 이런 행태를 지켜보는 것은 경기 종료 5분을 남겨놓고 응원하는 팀이 1-10으로 지고 있는 장면을 끝까지 지켜봐야 하는 것만큼이나 허탈하다.
보훈처는 30일 반론보도를 냈다. 김일성 일가친척에 대한 서훈 취소를 포함해 서훈수여 원칙도 재논의 하겠다는 취지다. 그리고 사회주의 계열 서훈 수여자의 명단을 제시했다. 이들은 서훈이 취소될 가능성이 높다.
* 주요 사회주의 계열 독립유공자 포상 상황- 주세죽 (박헌영 남로당 책임비서의 부인): '07년 건국훈장 애족장- 김철수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05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동휘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 창당): '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권오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05년 건국훈장 독립장- 장지락 (조선민족해방동맹 결성) : '05년 건국훈장 애국장보훈처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이 꺼내든 칼이 실은 무엇이었는지, 또 어디로 향해 갈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지난해 '우리를 잊지 말아줘'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남겼던 영화 <암살>에 등장한 독립운동가들 중 많은 수는 약산 김원봉처럼 해방 후 친일경찰에 시달리다 월북을 감행했다.
이제 우리는 '국민 정서상' 그들을 '공식적으로' 추모하거나 기억할 수 없게 됐다. 평생을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도 자신의 사후 친인적의 행적 때문에 서훈이 박탈될 처지에 놓였는데, 실제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이들은 오죽할까?
보훈처장을 몰아세운 논리가 바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독립운동가의 서훈이 그가 죽은 후의 일 때문에 취소가 논의되는 와중에도,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 수많은 친일파와 독재의 화신들의 서훈 취소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국가 정체성을 논하려면 이런 문제부터 제기해야 한다. 번지수가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