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걷기'가 관심받는 요즘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아파트 200만 세대 제공", "서울까지 교통 시간 단축" 등 요란하고 거친 개발이 이루어진 반면, 정작 사람이 걷기 좋고 살기 좋은 동네 만들기에는 관심이 적었다. 또한 거대한 고속도로와 고속 전철은 그토록 잘 만들면서 정작 동네 작은 길은 제대로 못 만들거나 방치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걷기 좋아 살맛 나는 동네에 대해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담은 <동네 걷기, 동네 계획>(박소현 외 지음)이 나와 무척 반갑다. 새로운 교통수단이 아무리 발달해도 걷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걷기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깔린 근간이니 말이다. 이 책은 걷기에 주목하는 이유와 장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동네를 걸으며 느끼게 되는 장소에 대한 애착, 그리고 집 밖으로 걸어나가 이웃, 타인과 접하게 되는 사회적 교류 가능성, 더 나아가 잃어버린 공동체 가치를 근린환경에서 새롭게 느끼게 되는 계기와 기회도 동네 걷기의 중요한 가치다."(26쪽)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걸었더니, 늘어난 보행량으로 결국 몸과 마음의 건강이 좋아지고, 자동차를 그만큼 덜 타니 대기환경의 질도 높아진다. 더불어 공동체 교류 기회가 많아지며, 지역의 상업 이용도가 높아지니 지역 경제도 나아지는 등 걷기로 얻어지는 직접, 간접의 오만 가지 장점이 나열 가능하다."(44쪽)
동네에서 어디로 어떻게 왜 걸을까? 실증 데이터로 밝힌다
그렇다면 걷기 좋은 동네, 걸어서 좋은 동네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 책은 우선 실증 보행 데이터부터 수집한다. 동네에서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며 동네 생활을 가장 많이 하는 인구 집단인 30, 40대 전업주부를 대상으로 GPS 기기와 가속도계를 이용해 걷기 행위에 대해 실증 데이터를 구축해 연구한다. 이 점이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별성이다. 이 흥미로운 연구 성과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 미국과 한국은 평균 보행량에 얼마나 차이가 날까? 한국 서울에 사는 주부들은 하루 평균 약 39분을 걷는데 비해, 미국 시애틀에 사는 주부들은 고작 6분 정도를 걷는다. 무려 6~7배나 차이가 난다. 철저한 자동차 중심의 나라인 미국에서는 별로 걷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실제 결과는 훨씬 더 충격적이다.
두 번째, 우리나라에서 자동차가 보급되기 전에 형성된 역사 주거지와 자동차의 흐름을 중시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보행량에 얼마나 차이가 날까? 이 책에서는 자연발생적 역사 주거지인 북촌과 대규모 개발로 조성된 계획단지인 상계의 보행 데이터를 비교해 본다.
아파트 단지보다는 북촌 같은 동네가 보행량이 더 많은 거라 예상되지만, 뜻밖에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데이터는 역사 주거지는 걷기에 좋고 자동차 위주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삭막할 것이라는 편견을 깬다.
세 번째, 주부들은 대형할인점과 동네 가게 중 어디를 더 많이 이용할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북촌, 상계, 성산, 행당에서 보행 데이터를 분석한다. 대형 마트가 아니라 동네 장보기를 통해 식재료나 물건을 구매하는 비율이 모두 60퍼센트 이상, 심지어 84퍼센트까지 나온다. 예상과는 달리 자동차를 끌고 외부의 대형 마트를 가기보다는 동네에서 걸어서 물건을 구매했다. 이 역시 예상이 빗나가는 흥미로운 결과다.
평균적으로 동네 가게 이용은 주 3회 이상인 것에 비해, 외부 대형 할인점 이용은 주 1.5회 미만이다. 동네에서 걸어서 물건 사기나 장보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1킬로미터 반경 안 '다양성'이 동네 걷기를 부른다!
북촌처럼 오밀조밀한 동네 가게가 많은 곳에서는 동네에서 걸어서 물건 사기나 장보기가 훨씬 더 많이 이루어질까? 꼭 그렇지는 않다. 북촌, 성산, 행당 모두 동네 가게 이용률은 비슷했다. 오히려 상계가 동네에서 물건을 사고 장보는 비율이 더 높았다. 이유가 뭘까?
이 책은 다양한 상점의 유형과 수에 주목한다. 중소 규모의 슈퍼마켓, 특화된 개별품목 마켓(유기농 슈퍼, 정육, 청과 등), 프랜차이즈 생활용품, 편의점, 협동조합식 가게(생활협동조합, 되살림가게, 아름다운가게), 재래시장과 장터 등등. 다양한 상점 유형이 얼마나 다르게 분포되고 배치되는가에 따라 동네 걷기를 유발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이런 점에 주목해 보면, 1킬로미터 반경 안에 가장 많은 유형의 장보기 장소가 있는 상계에서 걸어서 장보기 행동이 가장 많이 일어난 것이 이해가 간다. 이런 연구 결과는 동네의 활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어 소중하다.
또한 동네 작은 가게의 잠재력에 대해서도 다시 인식하게 한다. 주부들은 대형 할인점을 한정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그날그날 필요한 먹거리 등을 조금씩 사서 소비하는 패턴을 예상보다 많이 보여준다.
신선하고 품질 좋고 가격이 적절한 식재료를 파는 곳, 맛있는 빵이나 만두 등을 그때그때 만들어 파는 곳, 편안한 동네 카페나 식당, 믿을 만한 재활용품점 등을 이용한다. 즉 작지만 특별한 동네 가게에 대한 수요가 분명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 계획에 있어 미리부터 사람들이 자동차를 끌고 대형 마트로 갈 것이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지역 특유의 상업 공간을 기반으로 하는 동네 계획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겠다. 이는 살아 있는 동네 만들기와 지역경제 활성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일상생활 동선에서 다양한 곳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이 책은 대부분의 재래시장이 쇠퇴하는 가운데 유독 활성화되고 있는 특이한 사례도 그 이유를 걷기 좋은 동네 측면에서 짚어본다.
지금도 잘 되는 재래시장은 주거지와 주 교통로로 연결되는 주 가로에 위치한다. 즉 걷기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재래시장과 연결되는 지점에 중규모 슈퍼마켓이 있다는 점이다. 취급하는 상품의 차별성이 있다면 둘이 꼭 경쟁관계만은 아니며, 오히려 상생관계일 수 있다. 그리고 시장 초입에 마을버스가 있는 것도 중요한 요소다.
결국, 동네 걷기 측면에서 적절한 위치, 다양한 슈퍼나 가게와의 연결성, 걷기의 보완책이 될 수 있는 동네의 마을버스 등이 갖추어져 있다면 재래시장은 대형 할인점, 동네 슈퍼, 편의점 등과 상생하며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초등학교 통학로도 동네 설계에 신경써야 할 지점이다. 초등학교가 동네의 중심 시설들이 모여 있는 생활가로와 연계되어 있을 경우 걸어서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된다. 엄마는 아이의 학교 쪽으로 가면서 동시에 생필품이나 식료품을 구입하고 외식이나 친목 모임을 하거나 은행 업무 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책은 동네의 다양한 장소가 일상생활 동선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한 번 걸어서 나간 김에 여러 가지 일을 모아서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보행목적시설이 세심하게 연계되어, '걸어서 많은 것을 편하게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니 많이 걷게 되어 좋은 동네'가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길의 자체 환경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길을 매개로 하는 지역과 가로체계 그리고 가로환경의 복합적인 동선 체계와 가로 위계에서 다양한 동선의 선택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해진다."(41쪽)
나아가 이 책은 마을버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해 흥미롭다. 저자는 마을버스는 걷기의 보조수단으로 일상 걷기의 영역을 확장하고, 결과적으로 더 많이 걷게 된다고 밝힌다. 그리고 마을버스의 역할을 생활권 계획의 차원에서 재조명할 것을 제안한다. 이 역시 동네 계획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소한 일상생활에 대한 애정과 우리 현실에 맞는 도시 계획 자극마지막으로, 이 책은 '돌아가기'와 '머무르기'에도 세심한 관심을 보인다. 사람은 목적지를 향해 무조건 일직선으로 걸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러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 머무르기도 한다.
볼거리가 많거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길 또는 편안한 길로 돌아가기도 하고, 걸터앉을 자리나 예쁜 꽃 화분이 있는 곳에서 머물기도 한다. 돌아가기와 머무르기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길이 아름다운 길이며 생동감 넘치는 길일 테다.
한편 이 책에는 동네 풍경을 담은 많은 컬러 사진이 있는데, 이 사진들을 보는 재미 또한 기대 이상이다. 마치 동네 일상생활의 생생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소소한 일상생활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느껴져 기분이 좋아진다.
이 책은 서구의 도시 계획을 모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우리의 현실에 맞는 건강한 도시 계획을 하도록 자극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도시에 대한 막연한 추정과 편견을 바로잡으며, 지역 주민이 살기 좋은 동네를 어떻게 만들지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소중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