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규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날마다 해야 하는 보충수업과 야자, 두 달 반 동안 고민한 제규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정규수업 끝나면 집에 가서 밥을 하고 싶다고요. 고등학교 1학년 봄부터 식구들 저녁밥을 짓는 제규는 지금 2학년입니다. 이 글은 입시공부 바깥에서 삶을 찾아가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기자 말
"엄마, 미용실 문 닫았어요!"제규는 밤마다 허탕을 치고 왔다. 학교 끝나고 장 봐서 집에 오면 오후 5시 40분쯤. 갖가지 음식을 해서 식구들(과 친구들) 먹을 저녁밥을 차리면 1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맛있게 먹고,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은 다음에 부엌을 정리하면 어느새 오후 8시, 제규는 잽싸게 나갔다. 아파트 정문에 있는 미용실로 갔다.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제규는 낭랑 18세. 근사할 때지만 더 멋져 보이고 싶은 나이. 저녁밥 먹고 나서는 헬스클럽에 다녔다. 두 달만. 성실하게 다니는 편은 아니라서 나는 "돈 아깝다"는 잔소리를 했다. 제규는 이모부한테 전화해서 "아령이요, 안 쓰시면 저 주세요"라고 했다. 밤마다 혼자서 '홈 트레이닝'을 한다. 샤워하기 전에 거울로 근육을 살피면서 머리가 길다고 푸념했다.
"제규야, 오늘 학교 끝나고 집에 친구 데려 올 거냐?""혼자 가는데요.""그러면 저녁밥 하지 마. 너 학교 간 뒤에(제규는 혼자 밥 차려먹고 오전 7시 반에 카풀버스를 탐) 아빠가 국도 끓이고 반찬도 해 놨거든. 미용실 갔다 와."지난 목요일 오후, 나는 제규에게 전화를 했다. 집에 온 제규는 손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와이파이를 켜고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떠받들었다. 노래를 들으면서 웹툰을 보는 청소년에게 잔소리 하는 건 무모한 행동. 나는 도전해야 했다. 제규의 외모가 덥수룩한 머리카락 때문에 가려지면 안 되니까.
제규는 "10분만 더요"라면서 버티기에 들어갔다. 나는 상냥하게 "꽃차남도 데리고 가서 깎고 와"라고 '혹'을 붙여줬다. 심심해하던 꽃차남은 제 형 방으로 가서 "형형, 미용실 언제 갈 거야? 지금 갈 거 아니야?"라고 조르기 기술을 썼다. 결국, 1일 5회 이상 티격태격 싸우며 무예를 익히는 '의좋은 형제'는 집을 나섰다.
"원장님한테 꽃차남 먼저 '투 블록 컷'으로 해달라고 했어요. 머리 깎는데 꽃차남이 계속 움직였어요. 그러니까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요. 미용실에 손님 없는 게 다행이지. 나는 금방 끝나는데, 꽃차남은 지루하다고 나갔어요. 놀이터에 친구가 있더라고요. 둘이 안다고 인사하는 거를, 내가 확실히 확인했어요."뭔가 만들려는 자세... 어찌 아빠를 쏙 닮았니
오후 7시 5분, 밥벌이를 마치자마자 나는 미용실로 갔다. 놀이터에서 그네 타는 꽃차남도 만났다. 파르라니 깎은 아이들의 뒤통수에는 멋짐이 가득하다. 햇볕에 바짝 마른 수건처럼, 만지면 고슬고슬하고 기분 좋다. 제규와 꽃차남도 머리 모양이 맘에 드는지 환했다. 나도 따라서 표정이 고와졌다. 3분을 못 갔다. 귀찮다고 낮밥을 안 먹어서 배가 고팠다.
집에 와서 제규는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고기부터 꺼냈다. 뭔가를 만들려는 자세, 솔직히 속 터진다. 나를 안 닮았다. 제 아빠만 닮았다. 분식집 김밥을 사서 먹을 때도 남편은 기어이 밥상을 차린다. 애들이 시킨 치킨이 왔는데도 상을 차리는 사람이 남편이다. 그런 태도를 이해하는 척 하려면 배부르고 느긋해야 한다. 나 먼저 밥을 먹었다.
"나도 배고팠죠. 그래도 '에그 인 헬'을 먹고 싶었어요. 초간단 요리예요. 먼저 쇠고기를 얇게 썰어요. 그 위에 미리 만들어 놓은 토마토소스를 뿌리고요. 달걀이랑 베이컨도 넣어요. 토마토소스 속에 빠진 달걀이 지옥 불에 있는 것 같다고 '에그 인 헬'이래요. 원래 이름은 이스라엘 아침 메뉴 '삭슈카'예요. 나는 쇠고기를 썼는데 그 나라는 닭 가슴살을 쓴대요."
사람은 직립보행, 굴러다니지 말아야 하는데 제규가 보는 책 중에 <악마의 레시피>가 있다. 칼로리가 높은 음식만 나온다. 제규는 사진만 보고도 입맛을 다신다. 나는 '에그 인 헬'도 칼로리가 높아서 붙은 이름인 줄 알았다. 어쨌든, 지옥 불에 빠진 달걀 요리 사진을 찍었다. 회원 세 명이서 노는 인터넷 카페에 올렸다. 한 친구가 "이렇게 먹고 살면 나는 굴러다니겠다"고 댓글을 달았다.
인간은 수십만 년 동안 진화해서 직립보행을 이루었다. 십만 년에 한 번 꼴로 빙하기에 접어들면, 덜 추운 곳을 찾아서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굴러다니는 존재로 살아가라고?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저항할 거다. 어느 날에는 '이렇게 사육당하고 사는 것도 괜찮지'라고 체념하고 만다. 꽃 같은 아들이 해주는 음식을 어떻게 마다하겠는가.
제규는 한 가지 음식에 꽂히는 편. 어릴 때는 애호박전이나 김치전을 한 달간 먹은 적도 있다. 지난 봄에는 간장마늘치킨이었다. 제규가 처음으로 만든 날에는 "까야!" 소리를 질렀다. 동생 지현까지 불러서 맛있다고 난리를 쳤다. 와인까지 곁들였다. 꿀의 양으로 풍미를 조절한 간장마늘치킨을 연속으로 며칠간 먹었다. 그 뒤를 이은 건 멘치카츠였다.
"일본 정육점에서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갈아서 판대요. 거기에 다진 양파를 넣고, 후추랑 소금 간을 해요. 그렇게만 하면 으스러지니까 빵가루도 넣어서 단단하게 하고요. 밀가루, 계란 물, 빵가루 순으로 묻혀서 튀기는 게 멘치카츠예요. 모양이 동그래야 해요. (사진을 가리키며) 예쁜 거는 내가 만들고, 나머지는 애들이 만든 거야. 재밌는 요리예요. 같이 하니까." 다다익선. 소년들에게 멘치카츠는 그렇다. 그 많은 걸 튀길 때, 기름은 손이 닿는 가스레인지나 싱크대 상판에만 튀지 않는다. 부엌 틈새 여기저기로 파고든다. 그것들은 마침내 찌든 때가 되어 '쩐내'를 풍긴다. 딱 그때쯤 제규는 분식에 꽂혔다. 친구들도 먹고 싶단다. 그러나 같이 저녁밥을 먹는 내게는 의견을 묻지 않았다. 메뉴 통보만 했다.
분식의 꽃은 '라볶이'. 맨 나중에 해야 한다고. 제규는 장봐 온 냉동 순대를 해동시켰다. 밑간을 해 둔 닭 가슴살, 버섯, 대파를 친구들이랑 같이 꼬치에 꽂았다. 오븐에 넣고 돌렸다. 그 사이에 떡볶이를 만들고 라면 사리를 넣어서 끓였다. 옷 갈아입으러 잠깐 집에 들른 남편이 초토화된 식탁을 보고는 아이들에게 볶음밥을 해주었다.
"엄마, 근데 내가 피자에도 꽂혔잖아요. 대관이랑 상현이, 성헌이가 내가 해준 거 맛있대요. 피자는 진짜 일도 아니야. 완전 쉽다니까요. 토마토소스만 미리 만들어 놓으면 돼요. 양파 다져서 볶다가 투명해지면 익힌 토마토를 껍질 까서 넣어요. 바질도 넣고, 파마산 치즈 가루도 넣어서 40분 동안 끓이면 토마토소스가 돼요. 도우 위에 토마토소스 바르고, 치즈, 버섯, 베이컨, 고기 넣고 오븐에 돌리면 끝이에요. 엄마랑 저번에 간 레스토랑에서는 피자가 '바게트 도마'에 나왔잖아요. 그 도마를 아빠가 사 줘서 좋아요. 우리 집은 오븐이 작으니까 도마가 길어서 안 들어가거든요. 다 만들고 나서 피자를 잘라서 도마 위에 올려도 좋더라고요. (웃음) 기분 나잖아요."
프랑스 보양식에 도전하다날씬한 나무 도마 하나에도 기분이 산뜻해지는 제규는 자기 생활을 마음에 들어 한다. 7월 7일은 생일, 지난해와는 다르다. 사달라는 물건이 없다. 요구하는 특별용돈도 없다. 친구가 물려준, 6년 된 '공 기계'를 개통해서 쓰면서도 최신폰 타령을 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우기면, 엄마 아빠가 사줄 수 있는데도 "필요한 거 진짜 없어요"라고 잘라 말한다.
후텁지근 비 오는 날. 제규는 학교 끝나고 오면서 따뜻한 홍합국물이 먹고 싶었다. 마트에 갔더니 아예 어패류가 없었다. 시장에 갔더니 찬바람 불어야 나온다면서 아주머니가 생합을 권했다. 제규는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었다. 프랑스의 보양식, 달팽이 요리 '에스가르고'를 흉내라도 내보기로 했다.
"조개를 데친다는 느낌으로만 삶아요. 칼을 넣어서 조개 입을 벌려서 국물은 따로 모으고요. 거기에 마늘, 올리브유, 파슬리를 섞으면 굉장히 예쁜 색깔이 나오거든요. 그걸 다시 조갯살 위에 끼얹어요. 치즈까지 올려서 오븐에 굽고 나서는 발사믹 크림을 뿌려요. 음식에 다 어울리거든요. 참, 나 화이트 와인 필요해요. 아직 나이 안 되니까 엄마가 사 줘야 하는데, 알았다고만 하고 왜 안 사 주세요?"
화이트 와인 사다 준다고 말한 게 몇 달 전이다. 제규는 "알았어"라고 말만 하는 엄마를 향해 복수에 들어갔(다고 짐작한)다. 6월 내내 고칼로리 음식만 했다. "오늘은 건강한 느낌의 쌀국수예요"라고 한 저녁에는 설거지 마치고 바로 감자튀김을 했다. 바삭한 튀김 위에 파마산 치즈가루, 설탕, 파슬리 가루를 뿌려서 내놓았다. 나는 먹고 말았다.
누구도 앞날을 알지 못 한다. 밥상만 들어오면 먹기 싫다고 울었던 내 별명은 '갈비씨'. 서럽다고 느낀 시집살이는 "많이 좀 먹어라". 이제 그런 말은 나랑 상관없다. 제규가 만든 숱한 음식을 골고루 먹는다. 옆구리에 살이 잡힌다. 물건을 덜 사고 살겠다는 포부도 내년 여름쯤에는 무너질 것 같다. 왜? 내가 가진 단 한 벌의 수영복은 옆구리가 보이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