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점심시간, 도서관으로 하나둘씩 아이들이 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승빈이가 보이지 않는다.
승빈이는 중학교 3학년생, 도움반(특수학급) 아이다. 남들보다 키가 유난히 작기도 하다. 남들보다 웃는 모습이 유난히 예쁘기도 하다.
그리고 매일 도서관에 와서 만화책을 읽는 아이다. 마법천자문, Who 시리즈, 만화 태백산맥 등을 소파에 누워서 또는 소파에 등을 기대어 자기만의 휴식을 취한다. 그런 승빈이가 며칠 전부터 도서관에 오질 않고 있다.
사실 며칠 전 일이 마음에 걸린다. 승빈이가 오래 전 빌려간 책이 계속 연체되어 한마디 했다.
"김승빈, 이 책 연체 중이야. 일 년이 넘어간다. 잃어버렸으면 이 책 사와야지."승빈이는 멀뚱멀뚱 듣다가 '알겠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도서관 문을 나섰다. 오자마자 연체 이야기를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제 점심시간이었다. 에어컨을 작동하기가 애매한 날씨라 창문을 열었다.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 사이에 승빈이가 우뚝 서 있었다. 매일 도서관에 오던 승빈이가 운동장에 떡하니 서 있었다. 작은 키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축구 리그전 '신나게 놀자'에 참가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점심시간만 되면 축구 리그전을 한다. 학년 간 팀을 편성해서 영국의 프리미어리그처럼 게임을 누적해 순위도 발표하고 득점왕도 뽑는다. 매일 도서관에만 있던 아이가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연체 때문에 도서관에 안 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신나게 놀자'를 운영하는 선생님이 일전에 승빈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떠올랐다. 승빈이에게 축구를 같이 하자고 해도 절대 안한다며 손사래 치는 녀석이라고 했다. 그때 당시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도서관 친구'를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승빈이가 갑자기 무슨 마음으로 축구를 하고 있을까? 독서를 통해서 마음의 용기를 얻었나? 하는 바람이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사실 승빈이가 도움반이라는 핑계로 일부러 많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똑같은 만화책을 두 번 세 번 보더라도 그러려니 했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만화책에서 글이 있는 재미있는 책으로 옮겨 갈 것을 권하기도 했고, 실제로 '만화책 홀릭'이던 아이가(를) 소설, 사회과학 등의 책으로 옮겨가는 것을 경험시키기도 했다(옮겨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꼭 만화책이 나쁜 것이라 보기 어렵지만, 생각의 깊이를 확장하는 데는 글 책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승빈이에게는 다른 기준을 제시했다. '만화책 읽는 것도 좋지.' 더 솔직히 말하면 승빈이가 만화책을 읽든 어떤 행동을 하든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도서관에 들어와도 서로 인사만 하는 평범한, 아주 평범한 사이였을 뿐이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묘한 거리감이었다. 어쩌면 승빈이가 도서관을 등진 채 축구공에 몰두하는 것은 나의 관심 부족 탓일지도 모른다. 오늘 점심에 '신나게 놀자'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승빈이 축구하더라고요?"
"맞아요. 제가 끈질기게 구애를 했어요. 친구들하고 함께 공을 차면서 웃는 아이의 얼굴이 너무 해맑지 않아요? 저 모습에 점심도 안 먹고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거예요."승빈이가 반드시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런데 도서관에 정을 붙이고 싶어 하는 '도서관 친구'를 내 손으로 몰아낸 거다. 이건 명백한 직무유기다. 어쩌면 승빈이가 평생 독자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박탈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 직무유기를 다른 선생님께서 메워주셨다. 그 선생님께서 승빈이를 친구와 함께 노는 아이로 만들었다. 그래! 책보다 사람이 먼저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배워가는 승빈이를 응원한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승빈이에게 다시 도서관 문을 열어줘야겠다. 다시 오는 승빈이에게는 이렇게 인사해야지.
"승빈아. 어서와! 정말 오랜만이다. 보고 싶었어."2016년 7월 6일학교를 옮기고 승빈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학교를 옮겨도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가득 메우는 것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니 승빈이가 떠오른다. 9월 이후로 승빈이가 도서관에 한두 번 왔다.
이제는 또다른 승빈이가 도서관 문을 열고 닫는다.
덧붙이는 글 | 청소년문화연대 킥킥에 송고한 글을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