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 6-7번지(도로명주소 : 김해시 가락로 108-17)를 찾아가면 나라 안에서, 아니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인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구 전체의 약 6만여 기 고인돌 중 2만 9510기(49.2%)가 남한에 있고, 또 북한에도 2만여 기(33.3%)가 있기 때문이다(<한국지석묘유적종합조사연구>, 문화재청·서울대박물관, 1999년). 즉, 우리나라 고인돌 가운데서 특이한 것이라면 세계적으로도 특이한 것일 개연성은 충분하다.
서상동 고인돌은 어떤 점에서 특이한가?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굄돌이 있고 그 위에 윗돌이 얹힌 구조가 보통인데, 이곳 고인돌은 윗돌 위에 뭔가가 또 있다. 비석이다. 비석에는 '贈吏曹參判淸州宋公殉節紀蹟碑(증 이조참판 청주송공 순절 기적비)' 열네 한자가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고인돌에도 '宋公殉節岩(송공순절암)' 다섯 한자가 붉게 새겨져 있다. 따라서 고인돌과 비석 두 군데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송공순절'이 핵심이다. 현지 안내판의 해설에 따르면 '김해 시내의 중심부 주택가에 있는 이 지석묘는 윗돌의 크기가 4.6mX2.6m로, 규모가 비교적 큰 편'이기는 하지만, 한반도 내에 약 5만 기나 있는 고인돌 중의 하나이므로 그 자체만으로 특이한 문화재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윗돌 위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의 비석을 세워놓은 점이 여느 고인돌과 다른 두드러진 특징인 것이다.
고인돌 위에 세워진 임진왜란 의병장 비석
아무리 임진왜란 순절 의병장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경상남도 기념물 제4호인 문화재 위에 세운 것은 잘못이 아닐까? 누군가는 그렇게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고인돌이 문화재로 지정된 때는 1974년인 데 비해 비석이 세워진 시기는 그보다 10년 전인 1964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리 대단한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 4월 15일 동래부를 함락한 일본군은 17일 김해로 밀려왔고, 주장(主將)인 김해부사와 부장인 초계군수가 도주해버린 상황에서 송빈(宋賓, 1542~1592), 이대형(李大亨, 1543~1592), 김득기(金得器, 1549~1592), 류식(柳湜, 1552~1592) 등은 의병 1백여 명, 일반 백성 수백 명과 함께 왜적에 맞섰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 봉기였다. (
'임진왜란 최초 의병, 누군지 정확히 아십니까' 참조)
17일과 18일 이틀에 걸쳐 소규모 공격을 개시했다가 실패한 일본군은 19일 마침내 대군을 투입하여 김해읍성을 두들겼다. 적들은 김해 들판의 보리를 베어 읍성 아래에 높게 쌓고는 그것을 타고 올라왔다. 1만 3천여 명이나 되는 대병력이었으니 못할 일이 없었다.
결국 20일 성은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적들은 송빈에게 투항하라고 권했다. 송빈은 최후까지 남은 몇 명 의병들과 함께 끝까지 칼을 휘두르다가 마침내 순절했다. 마지막 순간 송빈은 고인돌 위에 올라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한 뒤, 적에게 사로잡혀 목이 달아나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송빈 의병장의 아들 송정백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휘하에 들어 화왕산성 등 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는 등 부자 2대의 창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송정백은 전란이 끝난 후 과거에 합격하지만 끝내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생애를 바쳤다.
서상동 6-7번지에 서린 임진왜란의 역사를 알고 보니 윗돌 위에 비석을 세운 후손들이 도리어 이 고인돌의 문화재적 가치를 높였다는 판단이 든다. 서상동 고인돌이 비석 없이 그냥 남아 있다면 우리나라 5만 고인돌 중 하나에 머물렀을 터이다.
그런데 후손들은 이곳 고인돌이 임진왜란 당시 송빈 의병장이 순절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정신사적 의미를 북돋우기 위해 윗돌 위에 비석을 세웠다. 그 결과 청동기 시대의 상징인 고인돌과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송빈이 보여준 선비정신의 표상 순절비가 한몸이 되었다. 둘이 하나가 됨으로써 특별한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하나가 돼 더 의미있어진 고인돌과 비석현지 안내판은, 서상동 고인돌은 '윗돌[上石]이 땅에서부터 1.4m 가량 떠 있는 점으로 보아 그 아래에 굄돌[支石]이 받쳐져 있는 남방식 또는 바둑판식 구조로 판단된다. 무덤방은 지석 아래 땅속에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해설한다. 하지만 '윗돌의 주위를 모두 시멘트로 발라버려서 정확한 구조는 파악하기 어렵다'라고 덧붙인다. 그 시멘트가 눈에 거슬렸던 것일까? 지금은 자연석들로 윗돌 아래 사방을 덧붙여 놓았다.
고인돌과 순절비를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보았으니 이제 사충단(四忠壇)에 가보아야겠다. '그래도 김해까지 왔는데 임진왜란 최초 순절 의병들께 참배는 하고 나서 소시민으로 돌아가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어난 탓이다. 송빈, 이대형, 김득기, 류식 등 임진왜란 최초의 네 분 의병장을 기리는 사충단이 김해에 세워진 때는 1871년(고종 8)이다. 사충단은 경상남도 기념물 99호로, 동상동 161번지 송담서원 경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