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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광주극장의 모습.
초창기 광주극장의 모습. ⓒ 광주극장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 46번길 10. 1935년부터 쭉 같은 자리에서 시간을 보태온 광주극장. 팔순이 넘은 나이, 세월의 더께로 미모는 사라졌으되 결코 초라하지 않고 고고하다.

사람도 세상풍파를 많이 겪다보면 단단해지다 못해 초연해진다더니, '가장 오래된 단관(스크린이 하나인) 극장', '856석의 최대좌석수' 같은 수식어로 알고 있던 광주극장의 첫 인상이 그렇다. 멀지않은 과거에 시간이 멈춘 듯, 이제 더 이상 무슨 일이 닥쳐도 독야청청할 것 같은 그런 느낌.

건물 보존 자체만으로도 반갑고 고마운 일이건만, 여전히 영화를 볼 수 있다니 감동이다. '뭘, 감동까지야'라고 한다면, 가보랄 밖에.

 1968년 1월 화재가 발생한 뒤, 재건축을 하면서도 일제강점기 건축된 건물 표석 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복원했다. 남다른 역사보존의식이다.
1968년 1월 화재가 발생한 뒤, 재건축을 하면서도 일제강점기 건축된 건물 표석 등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복원했다. 남다른 역사보존의식이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광주극장 객석은 3층까지 있다. 임검석(臨檢席, 일본어로 극장 등의 단속 경찰관·소방관 등을 위한 특별석)도 그대로 남아 있다.
광주극장 객석은 3층까지 있다. 임검석(臨檢席, 일본어로 극장 등의 단속 경찰관·소방관 등을 위한 특별석)도 그대로 남아 있다. ⓒ 광주극장

광주극장은 지정좌석제가 아니다. 좌석 위치에 따라 관람료 등급이 매겨지는 세상에 살다보니, 선택의 자유가 혼란스럽다. 앞서 표를 끊은 사람들이 모두 2층으로 올라간다. 이 극장은 2층이 로얄석인가 보다, 따라 올라가 앉는데 썩 그래 보이지 않는다.

"요즘 이렇게 복층으로 돼 있는 영화관이 없잖아요? 광주극장에서만 누릴 수 있으니까요."

옆에 앉은 청춘커플이 몰랐냐는 표정으로 말해준다. 홀로 앉아있는 여성, 정다워 보이는 노년부부,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는 중년여성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저마다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댕∼∼∼"

기억 속 익숙한, 낮고 긴 여운의 예비종이 울리고, 영화는 주저없이 시작된다.

비싼 관람료를 받고도 영화시작 시간을 어겨가며 상업광고를 틀어대는 무례와 파렴치가 이곳엔 없다. 대신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 머물러있던 내음, 낡고 삐걱거리는 의자, 스크린의 희미한 자국들이 함께 한다. 그리하여 같은 영화도 다른 느낌과 감동으로 다가온다. 광주극장에서 보면.

공간의 기운이 만들어내는 것

 시간을 간직한 극장은 매표소 안내문 마저 예스럽다. 컴퓨터 인쇄가 아니라 손으로 쓰고 모양대로 오려 붙인 각종 문구들이 ‘친절하게’맞아준다.
시간을 간직한 극장은 매표소 안내문 마저 예스럽다. 컴퓨터 인쇄가 아니라 손으로 쓰고 모양대로 오려 붙인 각종 문구들이 ‘친절하게’맞아준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단관극장을 경험한 세대라면 이곳에서 아주 익숙한 느낌을 받게 된다. 전국 어느 지역에나 하나 혹은 둘, 셋까지 있었던 극장의 형태와 구조들이 너무나 비슷했다는 사실에 연이어 놀란다.

"우리 동네 극장도 이렇게 생겼었는데. 그래, 표도 이렇게 유리로 막힌데서 줄 서서 끊고, 문 생김새, 화장실 위치…, 맞아."

그리고 깨닫는다. 그 많던 극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나고 보니 '순식간'의 일이었구나.

대자본은 '겉보기에 세련되고 화려하고 편안한 것'들에 대한 대중들의 허상을 정확히 겨냥했고, '멀티플렉스'라는 영어식 표현이 더 익숙한 복합상영관들은 거침없이 대도시부터 중소도시까지 평정해 버렸다.

 에스컬레이터가 없지만 힘들지 않다. 한걸음 한걸음 이 계단의 끝에 ‘시네마천국’이 있다.
에스컬레이터가 없지만 힘들지 않다. 한걸음 한걸음 이 계단의 끝에 ‘시네마천국’이 있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그래 이런 방음문이었어. 빛바래 분홍색이 돼 버린 비닐커버문은 타임머신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그래 이런 방음문이었어. 빛바래 분홍색이 돼 버린 비닐커버문은 타임머신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광주극장이 대단한 것은 건축양식이 별나거나, 눈에 띄는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다. 변치 않고 그 자리에서 극장 본연의 역할을 80년 넘게 해오고 있다는, 그것 하나다. 물론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2000년을 전후해 영화제작부터 유통까지 대기업이 손을 대면서 단관극장들이 멸종단계에 이르는 동안 광주극장이라고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가 왜 없었겠는가.

1년에 관객이 1만명도 안돼 적자가 계속되자 매각하라는 유혹도 있었다. 1998년 학교보건법 상 정화구역 내 유해업소로 지정돼 폐쇄명령이 내려졌고, 5년 동안 긴 법정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다중이용시설에 대한 관계법이 강화되면서 시설 개·보수비는 없는 살림에 큰 압박이 되곤 한다.

돈이 아닌, 문화를 택하다

 광주극장에서는 팝콘과 오징어, 추러스, 탄산음료 따위를 팔지 않는다. 전담 판매원도 따로 없이 커피와 차 정도만 싼값에 판매한다. “영화에 대한 예의, 뭐 그런 대단한 뜻이 있어서는 아니구요. 관람료를 내셨으니 적어도 영화를 보는 시간만큼은 관객의 공간, 관객의 시간으로 만들어 드리고 싶은 거죠. 옆 사람이 먹는 음식냄새, 소리 그건 것들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영화를 즐기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광주극장에서는 팝콘과 오징어, 추러스, 탄산음료 따위를 팔지 않는다. 전담 판매원도 따로 없이 커피와 차 정도만 싼값에 판매한다. “영화에 대한 예의, 뭐 그런 대단한 뜻이 있어서는 아니구요. 관람료를 내셨으니 적어도 영화를 보는 시간만큼은 관객의 공간, 관객의 시간으로 만들어 드리고 싶은 거죠. 옆 사람이 먹는 음식냄새, 소리 그건 것들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영화를 즐기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1년에 한 두작품만 그리지만 미술실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1년에 한 두작품만 그리지만 미술실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2002년 독립예술영화관으로 재탄생한 광주극장에서는 하루 다섯편 정도의 영화가 상영된다. 일부 복합상영관들에서 볼 수 있는 영화도 한두 편 있다. 다른 점은 관객이 적다고, 없다고, 바로 내리지 않고, 약속한 상영일을 지킨다는 것이다.

"저희 극장에서는 반드시 종영일을 명시합니다. 보통 2주는 가죠. 그래야 관객들이 각자 형편과 일정에 맞춰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위력과 대중의 외면이라는 위기에서 광주극장의 원칙은 오히려 더 견고해져만 간다.

지난달, 광주극장은 다시 한 번 큰 결단을 내렸다. 올해 영화진흥위원회(아래 영진위)는 영화산업의 다양성을 꾀한다며 독립예술영화 전용극장에 지원해 오던 '예술영화전용관사업'을 사전 심사에서 선정된 영화를 의무 상영하는 극장에만 보조금을 지원하는 '예술영화유통배급 지원사업'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광주극장은 이 사업이 관객의 영화선택 기회를 박탈하고 예술영화전용관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침해하는 사전검열이라고 판단,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극장 수입의 35% 정도를 차지했던 영진위 지원액을 포기한다는 것은 가난한 살림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광주극장은 '돈'이 아니라 '문화'를 택했다. 대신 정기후원회원을 모집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시작한 지 3주 만에 무려 200여명이나 모였단다.

"목표인원이나 액수는 정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극장은 내향적인 관객들이 많은데 후원에는 굉장히 적극적이세요. SNS를 통해 전국 각지에 알려 광주외 지역에서도 후원이 들어오고, 직접 다른 후원회원을 데려 오시기도 합니다."

80년 광주극장의 힘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1960년대 의자와 1990년대 의자 비교체험. 보기와는 달리 현재 의자보다 1960년대 비닐커버 의자가 훨씬 더 폭신하고 편안하다는 사실에 모두 놀란다.
1960년대 의자와 1990년대 의자 비교체험. 보기와는 달리 현재 의자보다 1960년대 비닐커버 의자가 훨씬 더 폭신하고 편안하다는 사실에 모두 놀란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광주극장에서 보여주는 것은 영화만이 아니다. 로비와 복도 곳곳에 영화와 극장의 역사를 몸소 느낄 수 있는 설치물들이 있다. 80년 극장역사의 편린들이 사진액자에 담겨 전시되고, 실사프린트가 아닌 나무에 직접 그린 추억의 영화와 단색 인쇄된 포스터, 1968년까지 돌아갔던 영사기도 만날 수 있다.
광주극장에서 보여주는 것은 영화만이 아니다. 로비와 복도 곳곳에 영화와 극장의 역사를 몸소 느낄 수 있는 설치물들이 있다. 80년 극장역사의 편린들이 사진액자에 담겨 전시되고, 실사프린트가 아닌 나무에 직접 그린 추억의 영화와 단색 인쇄된 포스터, 1968년까지 돌아갔던 영사기도 만날 수 있다. ⓒ <무한정보신문> 장선애

80년 광주극장의 힘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광주극장은 설립당시부터 주식회사(문화법인)로 출발했다.

"아마 전국 최초의 주식회사가 아니었을까 해요. 현재 최용선 대표님은 설립자의 4대손입니다. 운영은 직원들에게 전적으로 맡기지만, 극장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이 강하시죠."

그리고 마치 자신의 일부처럼 이곳을 가꾸고 있는 극장사람들. 영사실과 극장 기획 및 홍보 등을 담당하는 상근자 4명과 지금도 1년에 영화 한두 편은 손간판그림 봉사를 하는 박태규 화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매표소 근무자들이 있다.

어떤 각오로 힘든 현실을 견뎌내는지 궁금했다. 광주극장의 역사와 현실, 우리나라 영화산업과 정부의 정책들에 대해 막힘없이 생각을 풀어내던 김형수 이사는 "뭐 대단한 각오는 없어요. 제가 여기서 20년이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여기까지 온 것처럼 광주극장이 계속되는 한 누군가 여기에 있겠죠? 그게 저든 다른 누구든"이라며 웃는다.

사람도 공간을 닮아가는가. "광주극장을 지켰다. 지키겠다"는 말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이곳에 있다"는 말에 진정성이 더 느껴진다.

또 하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힘, 관객이다.

"1년에 150편 정도 영화를 상영하는데 한 편도 안 빠지고 보는 분들도 계세요. 심지어 관객을 모아 오기도 하고."

광주극장의 한달 평균 관객수는 2000여명, 상업영화가 아닌 독립예술영화만 상영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선전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영화를 보며 함께 울고, 함께 웃고, 정의가 승리하는 장면에서는 함께 박수를 치며 가슴 벅차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단체관람이나 해야 그나마 영화 한편 볼 정도로 문화적으로 척박했지만, 오히려 감수성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살아있던 때였으니. 지금도 1년에 4~5회 학교단체관람이 이뤄진다고 한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영화를 보며 함께 울고, 함께 웃고, 정의가 승리하는 장면에서는 함께 박수를 치며 가슴 벅차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단체관람이나 해야 그나마 영화 한편 볼 정도로 문화적으로 척박했지만, 오히려 감수성은 그때가 지금보다 더 살아있던 때였으니. 지금도 1년에 4~5회 학교단체관람이 이뤄진다고 한다. ⓒ 광주극장

광주극장이 있는 충장로에는 복합상영관이 3곳이나 있다. 그런데도 굳이 이 낡은 극장을 찾는 팬들, 그들에게 이 곳은 광주문화의 자존심이다. 그리고 외지인의 눈으로 봐도 80년 광주극장은 금남로에 있는 지상4층, 지하4층, 연면적 15만6817㎡ 규모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보다 더 위대한 문화의 성전이고, 랜드마크다.

80년 넘는 세월 동안 수천여편 영화와 함께 관객들이 느꼈을 사랑과 꿈, 눈물과 위로, 고난과 용기, 고통과 행복들이 공간 어딘가에 면면히 흐르는 광주극장엔 2016년 오늘이 더해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제 광주극장은 광주사람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이들의 추억의 장소다. 공간의 보존은 그 자체가 문화의 융성이고, 사람간의 유대이고, 또 다른 미래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광주극장#단관극장#독립영화#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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