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 말산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 백두에서 산마루 꼭지삼아 힘차게 내딛던 백두대간은 태백에서 낙동강을 피해 내륙심장부 소백산, 지리산으로 향하고 태백산 아래 구봉산에서 낙동강 줄기 따라 새로운 정맥이 남으로 흐른다. 낙동정맥이다.
이번에 찾은 고을은 낙동강 동쪽, 낙동정맥을 비집고 들어선 고을, 청송 영양, 영덕이다. 역사에 한 번도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았고 나라를 구한 큰 인물은 없더라도 이 고을에 살붙이고 산 민중들의 말과 행동, 행적은 거칠고 소박한 고을 치고는 혁명적이었다.
교육, 사회, 언어민주화 운동가 이오덕 선생과 신분제약을 뚫고 평민의병장으로 활약한 신돌석 장군, 남녀차별을 딛고 여성성을 극복한 독립군 어머니, 남자현과 최초로 한글 조리서를 지은 장계향은 이 고을에서 나거나 활동하였다. 굴뚝을 핑계로 나선 길이지만 이들을 만나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야말로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송의 인물, 이오덕(李五德 1925~2003) 맨 처음 찾은 고을은 청송. 예전에는 험하고 골이 깊어 들어갈 때 울었다가 나오기 싫어 울었다는 청송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낙동정맥의 한 마루인 주왕산이 그럴싸하고 주산지 절경은 마음을 달뜨게 한다. 이 정도로도 청송에 오면 가기 싫어 울 법한데 이곳에서 일군 사람들의 삶과 자취, 여기에 깊은 문화가 더해져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는다.
진성이씨가 낳은 걸출한 인물, 퇴계의 본향이 본래 청송 진성(진보면의 옛 지명)이고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의 내향(內鄕 왕비의 친정이 있는 고향)이 청송이다. 작은 안동이라 불리는 영해(영덕군 영해면)와 안동 사이에서 퇴계의 학풍을 잇는 고을이 청송이다.
<객주>의 저자 김주영은 청송 진보출신이고 글과 언어의 민주화로 우리를 충격에 빠트린 이오덕 선생이 청송 현서에서 났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마당 집', 성천댁이 청송읍 청운마을에 있고 '조선 땅에서 가장 넓은 집', 청송심씨 송소고택이 파천면 덕천마을에 있다. 이제 청송은 울며 오가는 고을이 아니라 설레어 와서 아쉽게 떠나는 청송이다.
이오덕 선생을 만나러가는 전날 밤, 잠을 설쳤다. 선생은 나를 모르고 나는 선생을 사랑하는 외쪽사랑이지만 마음이 설렜다. 선생 책을 늘 가까이 두고 글 쓸 때마다 선생을 떠올렸으니 마음이 더 달떴는지 모른다. 선생의 책, <우리문장쓰기>는 나에게는 회초리 같은 존재다.
누구도 한마디로 선생을 말하지 못한다. 아동문학혁명가로 부르는 이도 있고 교육운동가, 우리말(살리기)운동가, 사회운동가, 언어민주화운동가, 언어민중주의자, 언어민족주의자로 부르는 이도 있다. 혁명가, 운동가가 귀에 거슬린 사람들은 그냥 아동문학가로 부르기도 한다.
말이 곧 글이라며 누구나 아는 쉬운 우리말로, 누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말을 글로 옮기는 것이 글쓰기요, 이런 글이 참글이라 했다. '누구나'가 중요하다. 시골할머니, 어린아이,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도시민, 농민, 도시근로자, 부자, 가난한 사람, 일하는 사람, 노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과 언어의 민주화다.
현서면의 중심지, 화목
청송 현서는 청송 남서 끄트머리에 있다. 우리나라에 또 이런 곳이 있을까 싶다만은, 현서면은 청송과 영천과 의성, 그리고 군위와 영일(포항시)까지 여섯 고을이 맞닿아 있다. 현서에 들어가려면 청송에 있다 해도 의성군 사곡면으로 들어가야 편하다. 사곡에서 재(사곡재) 하나 넘으면 화목. 화목 댓골로 가려고 <몽실언니>의 몽실이가 친어머니를 따라 넘은 고개다.
댓골은 이오덕 선생의 평생 글벗인 권정생 선생(1937~2007)이 2년 가까이 살던 마을로 <몽실언니>의 주요무대다. 일본에서 태어난 권 선생이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은 1946년, 댓골에 외삼촌이 살고 있어 여기에 몸을 붙였다. 아홉 살에 돌아온 권 선생은 조국 땅이 왜 그토록 정이 들지 않았는지, 소외당한 이방인 같다고 토로하였다. 두 해 살다 떠난 댓골이지만 그에게는 '댓골삶'이 강하게 배어있었다.
화목은 현서면의 중심지다. 1921년에 세운 화목초등학교가 한가운데에 있고 골목 안에 100년이 넘은 화목교회가 있다. 화목초등학교는 이오덕 선생이 나온 모교면서 선생이 1945년 12월 31일부터 1947년 7월 31까지 교사로 몸담았던 곳이다.
이오덕 선생은 1925년 11월14일,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 574번지에서 났다. 이름 오덕은 태어난 해, 오(五)와 덕계리에서 덕(德)을 따온 것이다. 화목개울 건너 사과밭 언저리, 화목초등학교에서 초등학생이 해작거리며 걸어도 10분이 채 안 걸린다.
선생 집을 찾았으나 아무런 표시도 돼있지 않아 한참을 헤매다 김순복(83) 할아버지를 만났다. 선생의 동네 후배며 제자라고 소개하였다. 선생 집을 찾는다고 하니 아주 반가워하며 집까지 같이 가주었다. 선생 집은 양옥집으로 바뀌어 짐작한 것과 많이 달랐다.
청송사과가 처음 재배된 화목할아버지는 오덕 선생의 아버지에게 세배한 얘기를 하며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려는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 마을이 청송에서 사과를 제일 먼저 재배하기 시작하였다지요?" 내가 묻기 무섭게 할아버지는 감은 눈을 반쯤 뜨고는 이 마을에 사과묘목을 처음 들여온 박치환 선생(1878~1968)의 손자가 저 아래에 살고 있다며 앞장섰다. 다리가 불편한 듯하여 사양도 해보았지만 기어코 손자 박효일(73) 선생을 만나게 해주었다.
박효일 선생 집은 선생 집 가까이 있었다. 박효일 선생을 만났다. 반갑게 맞이하며 선생 조부께서 사과묘목을 처음 들여온 얘기며, 1919년 3월 26일 김기수, 조병국, 조현욱이 중심이 되어 화목장터에서 벌인 만세운동 얘기를 들려줬다. 권정생 선생과 댓골마을, 몽실언니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지금까지 연구한 마을역사를 다 쏟아낼 심산이었다.
진보에 있는 객주문학관 얘기를 곁들이며 이오덕 선생에 대한 대접이 좀 소홀하지 않느냐며 푸념 섞인 말로 물으니 앞으로 선생이 태어난 집을 구입, 정비하고 마을길을 곱게 꾸밀 생각이라 하였다. 나는 선생이 다니던 화목초등학교와 화목교회까지 사과밭 길을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이름은 '오덕길'로 했으면 좋겠다.
마당 작은 집, 성천댁
시간이 꽤 흐른 뒤 청송 옛집, 성천댁에 들렀다. 청송읍 청운마을에 있다. 성천댁은 집 안마당(뜰)을 가운데 두고 안채, 사랑채, 부속채가 사방을 막고 있는 뜰집이다. 'ㅁ' 자 평면 안에 안뜰(마당)이 있어 뜰집이라 부른다. 뜰집은 안동 동쪽, 청송, 영양, 영덕에 많아 이번 여행에 자주 보게 될 집이다.
내 생각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마당집이 아닌가 싶다. 300년 되었다는데 옴팡한 마당에 거문 윤나는 마루, 정교한 이음과 맞춤, 곧은결에 낀 해묵은 때까지 마당은 작더라도 속은 깊어 보였다. 허세라고는 없고 스스로 몸을 낮추는 겸손이 배어있다. 조용히 맑게 늙어가는 한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양옥집으로 바뀐 이오덕 선생 집에서 보이지 않던 선생이 보였다.
결 좋은 반 곱슬머리, 진한 눈썹, 주름진 얼굴, 쑥 들어간 눈, 볼웃음 짓는 선생의 얼굴이 성천댁 마루에서 보이는 한 뼘 하늘에 맴돌고 있었다. 입가에 번지는 볼웃음의 주름살이 하늘 멀리 멀리 번져나갔다. (굴뚝기사(청송 덕천마을)는 다음 기사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6/27~29에 청송, 영덕, 영덕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