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원전 밀집 지역인 울산 인근에서 지진이 발생해 원전 안전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 가운데, 정부의 비상시 대응 매뉴얼이 총체적으로 부실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원자력안전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부가 작성하는 표준매뉴얼은 '현장대응 및 주민안전보장'보다 '언론대응'에 더 많은 비중을 할애했고, 일부 부처는 관련 매뉴얼조차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14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경기 화성병)에 따르면 정부의 '원전안전 분야 위기관리 표준매뉴얼'에는 사고 발생시 주민대피요령과 관련해 "건물 내에서 생활", "외출시 비를 맞지 않도록 주의"와 같은 기초적인 대응 방침만 2쪽 분량으로 적시돼 있다. 권 의원은 "민방위 훈련 정도의 초보적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사고 발생시 언론대응요령은 9쪽 분량으로 여러 가지 상황을 예시로 들며 각 상황에 맞는 대응 요령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특히 세월호 당시 논란이 됐던 초기 브리핑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여성의 경우 화려한 액세서리, 짙은 화장 등 거부감 있는 차림 자제', '감동적 휴먼스토리 발굴'과 같은 다소 황당한 지침도 포함됐다.
또 지난해 연말 개정 전까지는 '위험한 질문에 전략적으로 답하는 요령'이라는 지침에는 '여러 질문을 동시에 할 경우', '예, 아니오로 답하게 할 경우', '감정을 자극하는 표현을 할 경우' 등 언론의 질문에 답하는 상세요령까지 담고 있었다. 현재 매뉴얼에는 삭제돼 있지만 부실한 안전 대응 지침과 비교해 "본말이 전도 됐다"라는 게 권 의원의 지적이다.
이와 함께 '파업에 의해 가동 중단 시 비상연락망'에는 청와대 재난안전비서관실이 들어가 있지만, '방사능 누출 사고 관련 비상연락망'에는 빠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가 노동자들의 파업 상황은 보고 받으면서, 정작 비상 상황에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초적인 체제가 마련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 될 수 있다.
'원전안전 분야 위기관리 표준매뉴얼'은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 '원자력시설 등의 방호 및 방재 대책법',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에 근거해 정부의 위기관리 목표, 의사결정체제, 위기경보체제, 부처와 기관의 책임과 역할을 규정하는 최상위 지침이다. 세월호 참사 때도 정부의 재난대응매뉴얼 부실이 지적됐지만 여전히 '안전 불감증'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진 교육과학기술부가 대책본부 구성?
정부의 표준지침이 부실하다보니 각 부처의 '실무매뉴얼'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권 의원이 정부 12개 부처의 '실무매뉴얼'을 취합해 분석한 결과 국방부는 '방사능 테러 대비 매뉴얼'만 보유 중이고 국토교통부와 농수산식품부 등은 사실상 대응매뉴얼 자체가 없어 '인접국가 방사능누출사고 실무매뉴얼'을 제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 재난 상황의 주무부처인 국민안전처 역시 2014년 11일 출범한 이후 정부 표준매뉴얼이 네 차례 개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차례 개정돼 '급조된 매뉴얼'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전체 분량도 59쪽으로 다른 부처의 실무매뉴얼보다 부실했고, 10쪽 가량은 표준매뉴얼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으로 나타났다.
이밖에도 다수의 부처 실무매뉴얼에 비상연락망이 잘못 기재 돼 있는 등 정부의 원전안전 분야 대응 전반이 부실상태였다. 한 부처의 비상연락망을 표준매뉴얼과 비교해 본 결과 17곳의 비상연락망이 다르게 기재돼 있었고 방송통신위원회, 국토교통부, 해양수산부 등은 40여 곳의 담당부서가 서로 일치하지 않거나 다른 부서가 추가돼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 매뉴얼뿐 아니라 안전대응 일선 현장의 매뉴얼 역실 부실했다. 권 의원 분석에 따르면 원자력의학원의 현장방사선비상진료소 운영매뉴얼은 지난 6년 동안 한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2010년 이후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국민안전처가 출범하는 등 정부의 재난관리체제와 표준매뉴얼에 변화가 있었지만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해당 매뉴얼에는 지금은 사라진 교육과학기술부가 중앙방사능방재대책본부를 구성하게 돼 있다. 또 현장방사능방재지휘본부 역시 교육과학기술부가 운영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현장방사능방재지휘본부는 각 지방자치단체의 대책본부를 총괄하게 돼 있는데, 이러한 기본적인 재난관리체계가 틀린 것이다.
권칠승 의원은 "표준매뉴얼 작성순서를 살펴보면 '보고'가 첫 번째 대목으로 나오고 '현장수습활동'은 마지막으로 밀려있다"라며 "IAEA(국제원자력기구) 기준에 따라 일반인들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하는 일괄된 방호조치를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여전히 현장대응 보다 언론 평판을 중시하고 있다"라며 "현장대응을 보강하는 방향으로 매뉴얼이 개선돼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