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노인의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디어마이프랜즈>(아래 디마프)는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인 노인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달인'의 경지에 이른 시니어 배우들 자신도 '노인'이기에, 노인이 직접 표현하는 노인의 이야기는 진실되게 다가왔다. 작가 노희경의 필력이 그 진실함에 묵직한 무게를 더하며 '디마프'는 한국 드라마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디마프'가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
나는 노인복지센터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로, 어르신들과 함께 이 드라마를 흥미롭게 시청했다. 그런데 노인의 이야기니까 어르신들의 공감을 쉽게 얻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의외로 어르신들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왜 그럴까.
'디마프'의 꼰대들은 판사 출신의 엘리트, 화려한 여배우, 성공한 식당 사장, 자수성가한 재력가, 평범한 주부로 비교적 안정적인 노후를 보내고 있다. 개인사, 가정사에 굴곡은 있을지언정 인생 종반전을 보내는 주인공들은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50년 지기 초등학교 동창들이다. 드라마는 혈육보다 더 진한 그들의 관계와 우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실제 현실에서 이런 관계는 흔하지 않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나이들수록 사회적 관계망의 축소와 단절을 경험한다.
한국의 대다수 노인들은 아프고 외롭고 가난하다. 노인들의 인생 종반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늙으면서 맞딱드리게 되는 여러 위협 요인들, 이를테면 신체 능력의 상실이나 사회 관계망의 축소 등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그 노인이 어떤 사회 계층에 속하느냐에 따라 위협 요인에 대처하는 방식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쉽게 말해 강남에 사는 노인이 몸이 아플 확률보다는 쪽빵촌에 사는 노인이 아플 확률이 더 높다. 노인의 지위는 그 노인이 속한 사회적, 계급적 위치에 좌우된다. 결국 노인의 지위는 사회가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차원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디마프'는 젊은이의 시선에서 노인을 바라본다. 꼰대를 꼰대라고 무시만 하지 말고 그들의 인생 그 자체를 존중하자고 이해하자는 취지에서 볼 때 드라마는 충분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디마프'로 부터 한 걸음 진전된 노인 담론을 만들어 내야 할 몫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과제로 남아있다.
사회 속 노인의 운명은 어떠한가?시몬느 드 보봐르는 책 <노년 :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에서 '노년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에 관해 날카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보봐르가 보기에 어떤 이유에서건 노인들은 인간적인 범주의 밖에 위치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팽창과 풍요가 노인들에게 가난과 고독, 불구, 절망의 형을 언도하고 노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침묵의 공모를 깨버려야 한다고 했다. 또한 "수많은 거짓과 신화, 부르주아 문화의 상투적인 사고와 상투적인 문구들에 의해 왜곡되어 우리가 잔상을 알 수 없게 된 것, 즉 노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지"(9쪽)를 말하고자 했다.
노쇠가 시작되는 나이는 언제나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계급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오늘날, 광부는 50세에 벌써 끝난 인간이지만, 특혜자들 중에서는 많은 이들이 80세에도 경쾌하게 지낸다. 노동자들의 사양길은 더 일찍 시작되고, 훨씬 빠르게 진행된다. '생존' 기간 동안에도 손상된 그의 몸은 질병과 불구에 시달리게 된다. 다행히도 자기 건강에 유의해 온 노인은 죽을 때까지 거의 그대로 그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착취당한 사람들은 늙으면 비참해지거나 아니며 적어도 빈곤과 불편한 거처와 고독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실추된 감정과 전반적인 불안감이 뒤따른다. 그들은 멍청하게 얼빠진 상태에 빠져드는데 그것은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에게 큰 폐해를 끼치는 정신질환들은 대부분 체제의 산물이다. (758~759쪽)
인간은 말년에도 계속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보봐르는 "노동자 착취, 사회의 원자화, 소수의 특권적 지식 계급에 문화가 국한됨으로 인한 문화적 빈곤, 이러한 요인들이 종국에는 비인간화 된 노년기를 초래한다"고(16쪽) 강조한다.
노년은 우리 문명의 모든 실패를 고발한다. 노인의 조건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온통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 인간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재창조해야 한다. 한 인간으로 하여금 말년을 빈손으로 외롭게 맞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760쪽)
결국 노인의 지위는 사회가 부여하는 것이다. 노화란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한 인간이 노년에도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사회가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사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 종반전에도 '인간'이기 위해 사실 노년은 곧 청년의 연장이다. 보봐르는 이 책 서론에서 붓다의 일화를 통해 노년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싯다르타 왕자가 궁을 빠져나와 처음으로 백발의 꼬부랑 노인을 만나는 이야기다. 노인이 손을 내밀며 알아들 수 없는 말을 하자 싯다르타는 깜짝 놀란다. 옆에 서 있던 마부는 싯다르타에게 "저 사람이 노인이라서 그런다"며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를 본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한다.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놀이며 즐거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의 내 안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도다."
노년기란 우리의 직접적인 가능성들 중의 일부이며, 어느 나이에고 노년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어떤 때 우리는 노년과 매우 가까이 있기도 하다. 그럴 때면 우리는 종종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한순간 늙은이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절먹나 한창 나이 일 때 우리는 붓다처럼, 우리의 내면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현재의 우리와 우리의 노년기를 갈라놓고 있는 시간은 너무나도 길어서 우리 눈에는 그것이 영원으로 착각되는 것이다. 그 머나먼 미래는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여겨진다. (12~13쪽)
노년은 정태적이지 않으며 어떤 과정의 결말이자 연장이다. 늙는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변화는 삶의 법칙이다. 질병과 달리 노화는 생명의 운동 과정이다. 늙는다는 것을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면 노인 담론은 노인 계층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세대를 아우르는 담론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우리가 노인들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 우리 안에 있는 노인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면 불행한 노후를 걱정만은 하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노년 :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 (시몬느 드 보봐르 지음 / 책세상 펴냄 / 1994.5. / 29,000원)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