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고 믿음직한 검찰이 되기를 바라는 국민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린 점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입니다."검찰수장의 대국민 사과문이다. 18일 김수남 검찰총장의 사과문일까. 아니다. 지난 2006년 8월 정상명 검찰총장이 법조비리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출신 검사가 구속된 뒤 발표한 내용이다.
"검찰이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치고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마음 속 깊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그럼, 이 발언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번에도 김수남 총장의 사과문은 아니다. 2010년 6월 김준규 검찰총장의 대국민 사과문이다. 당시 '스폰서 검사' 논란으로 떠들썩했을 때였다.
김수남 검찰총장은 18일 "국민들에게 큰 실망과 분노를 안겨드린 데 대해 검찰 수장으로서 마음 깊이 죄송하고 송구스러우며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국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앞서 김현웅 법무장관 역시 같은 날 대국민 사과에 나섰다.
검찰총장은 검찰의 비리가 드러날 때마다, 국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난 2006년 이후 10년 동안 검찰총장이 국민에게 사과한 것은 김수남 검찰총장의 사과를 포함해 6번이다. 여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사과하며 사퇴한 임채진 검찰총장도 포함됐다. 검찰총장은 10년 동안 1년 8개월에 한 번씩 사과를 한 셈이다.
검찰총장은 사과와 함께 검찰 개혁안도 함께 내놓았다. 하지만 개혁안은 흐지부지됐다. 여소야대인 20대 국회에서 "검찰의 셀프개혁,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검찰총장의 말뿐인 사과를 정리했다.
[2006년 8월] 정상명 총장 사과①
2006년 8월 9일은 사법 사상 치욕의 날로 불린다. 사건 개입을 요구하는 법조브로커에게 돈을 받은 차관급 고등법원 부장판사와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 등이 구속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사건이 불거지자 사표를 냈지만, 사실상 현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국민에게 고개를 숙였고, 정상명 검찰총장 역시 대국민 사과를 했다.
정상명 총장은 사과와 함께 법조비리 근절대책을 발표했다. "국민 여러분께서도 깨끗한 검찰로 거듭나는 저희들의 노력을 지켜보아 주시고, 애정 어린 비판과 성원을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라고 말했다.
대책의 첫 번째는 법조브로커 발본색원을 위해 카드를 작성해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말뿐이었다. 최근의 '정윤호 게이트'에서 보듯, 법조브로커는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검찰 비리를 수사할 때 '제 식구 감싸기'가 되지 않도록, 대검찰청 감찰책임자를 외부에서 데려오는 방안도 나왔다. 하지만 현재 정병하 감찰본부장은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 출신인 '검찰 식구'다.
[2007년 2월] 정상명 총장 사과②정상명 총장은 5개월 만에 다시 국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당시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들이 제이유 그룹 사기·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 관련자들을 조사하면서 거짓 자백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녹취록이 보도되면서 파장이 커졌다.
정 총장은 "국민들께 죄송하다"면서 "검찰의 수사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수립하겠다"라고 밝혔다. 조사할 때 경어를 사용하고, 진술거부권 행사를 존중하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것도 말뿐이었다. 현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근무하는 한 관계자는 "검사들은 조사받는 사람이 국가인권위원회 등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조사한다. 하지만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 반말로 윽박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2009년 6월] 임채진 총장 사과·사퇴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이듬달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대국민 사과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상상할 수 없는 변고로 인해 많은 국민을 슬프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번 사건을 총 지휘한 검찰총장으로서 진심으로 국민에게 사죄드린다. 원칙과 정도, 절제와 품격의 바른 수사, 정치적 편파 수사 논란이 없는 공정한 수사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한 단계 높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그는 "수사와 관련해 제기된 각종 제언과 비판은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 개선해 나갈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떠나는 검찰총장의 말은 휴짓조각이었다.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노 전 대통령의 피의사실을 공표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처벌을 받지 않았다. 또한 정치적 독립성 논란을 야기하는 대검 중앙수사부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지만, 검찰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검 중수부가 폐지된 것은 2013년 4월 채동욱 총장 때였다.
[2010년 6월] 김준규 총장 사과2010년 검찰은 '스폰서 검사' 사건으로 조롱을 받았다. 그해 4월 부산·경남에서 검사들이 건설업체 사장으로부터 성접대와 금품 등을 받았다는 의혹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두 달 뒤, 김준규 검찰총장은 국민에게 사과하면서 재발방지 대책을 내놓았다.
"검찰이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치고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마음 속 깊이 죄송하게 생각한다.""제도도 고쳐서 앞으로 검찰권 행사는 국민의 통제를 받겠다."대책의 주요 내용은 검찰시민위원회 구성이다. 국민이 주요 사건에서 검사의 기소·불기소 처분이 적절했는지 살펴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검찰시민위원회가 이같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검사의 기소를 합리화하는 기구에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김준규 총장은 4년 전 감찰 책임자에 외부 인사를 임명하겠다는 정상명 총장의 대책을 베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 시민사회와 야당에서는 공직자비리수사처와 같은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검찰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2012년 11월] 한상대 총장 사과·사퇴2012년 11일 김광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가 구속됐다. 단군 이래 최대 사기극의 장본인인 조희팔씨쪽으로부터 수억 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한상대 검찰총장은 사과와 함께 사퇴했다. 검찰개혁안도 발표하려고 했지만, 후임 검찰총장이 개혁을 이끌어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발표하지 못했다.
후임인 채동욱 검찰총장은 검찰개혁심의위원회를 구성한 뒤 검찰 개혁의 의지를 불태웠다. 검찰총장 직속 수사팀인 대검찰청 중수부 폐지 등의 성과를 거뒀지만, 채 총장이 혼외자 의혹으로 물러난 뒤 이같은 검찰 개혁 조치들은 흐지부지됐다. 중앙수사부도 지난 1월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