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전 10시께 서울 종로 선거연수원에서 1987년 구로을 우편 투표함이 열렸다. 개표 결과 1번 노태우 후보가 3133표(73.84%)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일각에선 이를 두고 당시 군 부재자 부정투표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중앙선관위 한 관계자도 "개표 결과를 봤을 때 정상적인 투표함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밝혀, 향후 이 투표함을 둘러싼 부정선거 논란이 어떻게 일단락될지 지켜볼 일이다.
지난 1987년 12월 16일 오전 11시 20분께 13대 대선 투표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구로구을선관위 관계자들이 구로구청에 있던 선관위 사무실에서 구로을 우편 투표함을 약 5km 떨어진 개표소(구로구시립부녀복지관)로 옮기고자 트럭에 싣는 작업을 하다가 이를 '부정투표함'으로 의심한 시민들에게 제지당했다.
당시 구로을 우편 투표함은 빵과 과자, 귤 상자, 선거 서류 등 밑에 실려 있었다. 투표함 이송에 동행해야할 참관인도 없는 상태였다. 더욱이 선관위 사무실에서는 아직 기표되지 않은 투표지 1500매, 붓두껍 60개, 인주 70개, 손 장갑 6켤레 등도 발견됐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선관위가 '투표함 바꿔치기' 등 부정선거를 꾸미다 발각됐다고 본 수많은 시민이 구로구청을 점거했다. 이후 시민들은 18일 새벽 백골단의 폭력 진압 때까지 사흘간이나 부정선거 규탄 농성을 하였다. 선관위는 선거인명부, 투표록 등 선거관계 서류 분실 등을 이유로 구로을 우편 투표함을 무효처리한 뒤 이 투표함을 지금껏 보관해 왔다고 밝혔다.
선거기록보존소 사무관 "정상적인 투표함이라 보기 어렵다"
드디어 29년 만에 구로을 우편 투표함이 열리고 한국정치학회와 중앙선관위 선거기록보존소,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이 참여해 수작업 개표와 검증 작업에 들어갔다. 개표 결과 부재자투표 신고인수 4529명 중 전체 투표수는 4325표였고 1번 노태우 후보 3133표(73.84%), 2번 김영삼 후보 404표(9.52%), 3번 김대중 후보 575표(13.55%), 4번 김종필 후보 130표(3.06%), 기타 1표(0.01%), 무효 82표, 기권 204표로 집계됐다.
이는 13대 대선 전국의 후보자별 득표 총계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최종 개표 결과는 노태우 후보 828만2738표(36.6%), 김영삼 후보 633만7581표(28.0%), 김대중 후보 611만3375표(27.1%), 김종필 후보 182만3967표(8.1%) 등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서울지역에서 노태우 후보는 30%, 김영삼 후보 29.1%, 김대중 후보 32.6%를 보였다. 그 당시 구로구을 투표구의 개표 결과는 노태우 28.05%, 김영삼 25.36%, 김대중 35.66%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번에 개함한 구로구을 우편 투표함의 노태우 후보의 득표율은 같은 투표구 일반투표의 평균 득표율보다 무려 45.79%p 높은데다 전국 평균보다는 37.24%p, 서울지역 전체 평균보다는 43.84%p나 높은 결과다.
이 개표 결과에 대해 중앙선관위 선거기록보존소 김수진 사무관은 "13대 대선 개표 당시에는 부재자 투표함을 오늘처럼 별도로 개표하지 않고 일반 투표함 하나와 섞어 개표하는 혼합 개표 방식으로 개표하였다"고 설명했다. 그 혼합개표 결과의 전국 평균 통계를 보면 "노태우 후보가 60.43%를 얻었기에 그 전국 평균치에 비춰보았을 때는 저희가 생각했던 수치에서 벗어났다고 보긴 어렵다고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1987년 대선의 부재자 투표함만을 별도로 개표한 건 구로을 우편 투표함이 유일하다고 한다. 기자는 "이번 개표 결과에서 노태우 후보의 득표율이 전체 서울 평균치 30%보다 월등하게 높게 나온 이유는 당시 만연한 군 부재자 부정투표 때문으로 보인다"며, "결과적으로 정상적인 투표함이라고 보긴 힘들지 않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김 사무관은 "결과치로 봤을 때 그건 맞다, 인정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지문 중위의 군 부재자 부정투표 폭로 이후인 1992년에야 부재자 투표소를 따로 설치하는 제도가 생겼다는 설명도 하였다. 그는 이번 87년 구로을 우편 투표함의 개표 결과는 "군 부재자의 문제점이 나타난 것이고 그것까지 부정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구로동지회가 '부정투표함'이라고 주장하는 말도 맞지 않는지 묻자 '그렇게 보실 수도 있다'고 하였다. 다만 당시 선관위가 의도적으로 투표함을 바꿔치기 하거나 부정선거를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구로동지회 "투표함 어떻게 보관했는지 이력 불분명"
1987년 13대 대선 당시 대통령 선거법(제17조 2항)에 따르면 부재자 우편 투표 대상자는 "1. 선거인명부에 등재된 투표구밖에 장기여행하는 자, 2. 법령에 의하여 영내 또는 함정에 장기기거하는 군인, 3. 병원·요양소·수용소·교도소 또는 선박등에 장기기거하는 자"로 돼 있다. 한국정치학회와 중앙선관위 선거기록보존소는 구로을 우편 투표함의 전체 투표수 4325표 중에 대부분이 군 부재자의 표였을 것이라고 본다.
구로동지회(구로구청부정선거항의투쟁동지회) 이해관 대변인은 중앙선관위 한 관계자가 구로을 투표함의 개표 결과에 대해 군 당시 부재자 투표의 문제점이 드러났고 '부정투표함'이라는 구로동지회측 주장에 대해서도 '그렇게 보실 수 있다'고 했다고 전하자 "허탈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렇다면 당시 군 부재자 부정선거에 대해 철저하고 공정한 투개표 관리를 하지 못한 선관위가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구로동지회 윤두병 회장은 이번 투표함 개함 자체를 '쓸데없는 일'이고 '선관위의 정치적 쇼'라고 주장했다. 그 당시의 선거인 명부, 개표록 같은 선거 서류가 없어졌고 선관위가 1987년부터 1997년까지 20년간 이 투표함을 어떻게 보관해왔는지 그 이력조차 불분명한데 투표지만 갖고 개표해 무엇을 알 수 있느냐는 지적이다. 윤 회장은 이번 행사를 계기로 조만간 87년 구로구청 사건의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하는 학술심포지엄을 열어볼 계획이라고 하였다.
87년 구로구을 투표함을 둘러싼 오랜 '부정선거' 논란은 한국정치학회의 '최종 결과 보고서'가 나온 뒤 일단락될지 아니면 증폭될지 그 추이를 더 지켜봐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