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까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문화유산은 600건이 넘습니다. 근대건축 문화재의 경우, 역사적인 형태를 살리면서 공공건물로 리모델링하는 사례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논리에 밀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근대 건축은 훨씬 많습니다. 한번쯤 그 시대의 건축가들을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일그러진 근대의 일그러진 건축가들을 말입니다. 잊혀진 건축가들을 통해 그 시대의 또 다른 이야기를 알게 되면, 개발에 대한 관점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보존 방식도 좀 더 다양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 기자 말
저건 소·돼지 기르는 축사가 아니라 민가입니다"저것 좀 보시오, 조선은 목축이 상당히 발달했나 보군요."
"아, 저건 축사가 아니라 민가입니다."탁! 김윤기는 읽고 있던 신문을 책상에 내리쳤다. 얼굴보다 심장이 먼저 화끈거렸다. 신문을 노려보았다. 방금 읽었던 기사에서 일본 글자들이 꿈틀거렸다. 꿈틀거리다가 키득키득 비웃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말해줄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였어. 프랑스의 어느 장군이 너희 나라에 들렀지. 그가 기차를 타고 가는데 차창 밖으로 농촌 풍경이 보였어. 삐죽하게 자란 풀 사이로 짚과 흙으로 만든 물체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지. 프랑스 장군은 한눈에 알아봤어.
소와 돼지를 기르는 축사구나! 조선은 목축업이 발달한 나라구나! 그랬더니, 옆에 있던 일본 기자가 뭐라고 말했게? 어이쿠, 저건 가축이 사는 축사가 아니라 조선 사람이 사는 집입니다요! 일본 기자는 이런 말도 덧붙였겠지. 그래서 일본이 조선에 온 겁니다. 조선인을 계몽하고 조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김윤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뚜렷해졌다. 얼마 후 그는 조선인 최초로 와세다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원래 그는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부친의 권고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다. 그때가 1920년, 그의 나이 17세였다. 그런데 이미 3·1운동 이후부터 조선의 청년들은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물산장려운동' '실력양성운동' '문화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고등교육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일제가 유화적인 통치정책을 펴면서 그동안 차단됐던 해외유학도 가능해졌다. 학비가 없는 학생은 없는 대로 유학을 가려고 했다. 국내보다 일자리가 많아 고학이 가능한 데다, 훨씬 자유롭고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김윤기는 그때를 이렇게 느꼈다. "청년들의 기개는 해외유학을 해서 대정치가가 되어 조국을 구하겠다는 풍조가 충만"했다고. 그래서 자신도 "그 풍조에 동조하게 되어 일본 유학을 결심"했단다.
결국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그만뒀다. 동경으로 건너가 중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당시 일제의 교육차별 정책으로 조선과 일본의 학제가 달랐다. 일본보다 3년이 짧은 교육기간을 보충해야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신문 기사를 읽었고, 한참을 부들부들 떨다가 자신의 진로를 정했다.
'건축이다. 건축을 공부해서 조국동포를 위해 주거 향상책을 세우자. 정치는 동경제대의 김준연같은 쟁쟁한 사람들에게 맡기고, 나는 기술자로 조국광복에 힘쓰자!'(김윤기, 남기고 싶은 이야기, 대한건축학회지, 1975.8.) 건축이란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대였다. 그 시절 건축을 선택했던 사람들은 대개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미술을 좋아해서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를 하셨지. 굶어 죽기 십상이라고. 그때 학교 선생님이 건축을 소개해줬어. 건축은 미술도 기술도 다 있으니 일거양득이라고." "앞으로는 기술자 시대라는데 건축을 배워 두면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설마 일본 순사가 건축하는 사람을 잡아갈 일이야 생기겠어?" "기술자 자격증이 있으면 징병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동아일보> 보도, '조선인 최초 철도국 기사 승진'시작이 달랐기 때문일까. 김윤기의 건축 행보와 활동 범위는 다른 건축가들과 점점 달라졌다. 1928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김윤기는 조선총독부 철도국 공무과에 취직했다. 건축과 출신이 웬 철도국? 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철도와 체신 관련 건축은 철도국이 따로 맡아서 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갈 곳이 마땅치 않고 별로 없어서" 들어간 곳이었다. 하지만 철도국은 총독부 산하 다른 건축조직보다 월급이나 대우가 좋았고,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일본인이 판치는 건축계는 민족 차별뿐 아니라 학력 차별도 있었다. 그로 인해 승진과 임금 차별도 생겼다.
그런 상황에서 김윤기가 철도국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학력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학부과정을 마친 공학사, 그것도 와세다대학 졸업생이었다. 1939년 10월 12일 그는 <동아일보> 기사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기사 제목은 '김윤기씨 철도국 기사로 승진, 조선인으로서 최초'였다. 그는 광복이 될 때까지 철도국에서 근무했다.
광복 후 김윤기는 행정가로 변신했다. 1948년 2월 낙동강철교 준공식에서 공사경과를 발표하던 건설과장 김윤기는 1960년대에 이르면 다섯 번의 장관직을 맡은 인물이 되었다. 교통부 장관 두 번, 건설부 장관, 정무담당 무임소장관과 경제담당 무임소장관이었다.
신문 기사에는 정무각료 중 보기 드문 이공계 출신, 철도국 평직원 출신이라는 수식어가 붙곤 했다. 그는 대한건축학회 회장(2대, 6대), 대한주택영단(대한주택공사 전신) 이사, 한국건축가협회 회장(2대), 한국국립공원협회장,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초대회장도 지냈다.
출세. 말 그대로 대단한 출세였다. 1960년대 어느 신문기자는 그를 두고 "억세게 관운이 좋은 장관"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바로 그 억세게 화려한 이력 때문에 건축가의 면모는 잊혔다. 다른 건 몰라도, 그의 초심, 조선을 비하하던 기사에 분통을 터뜨리고 주거 향상책을 세우겠다던 초심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와세다대학 졸업설계는 '민중회관'이었다. 대강당과 체육관을 둔 공공 집회시설로, 다른 학생들도 많이 선택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졸업논문의 주제는 달랐다. 그만이 선택했던 논문의 제목은 '조선주가(住家)에 대해'였다. 가축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 사는 집, 그를 건축으로 이끈 동기였고 졸업 후에도 놓지 않았던 화두였다.
논문 내용만 해도 당시 민가에 대한 웬만한 정보들을 다 담고 있었다. 조선의 지리적 환경과 생활양식부터 조선 주가의 유래, 건물 배치, 각 실의 명칭 및 실 배치, 외관, 구조, 실내장식, 지방적 특질과 도면, 온돌 및 마루의 기원, 건축비, 조선 주가의 장단점, 개선 사항까지. 그는 일본인 학자들의 보고서를 참고하면서도, 여름방학 때마다 귀국해 직접 답사를 다니며 사례조사를 했다(김용범, 건축가 김윤기의 초년기 교육과정과 건축활동에 관한 고찰,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2013. 6.).
그는 철도국에 입사한 후에도 민가와 주택개량을 계속 연구했고, <조선과 건축>,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 발표했다. 1930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글에는 '건강주택'을 거론하며 여러 계획안을 소개했다. 위생적이고 경제적이며 쾌적함에 초점을 둔 '건강주택'은 11평의 5인용 주택부터 3대가 함께 사는 26평형까지 네 종류였다.
이상적인 주택지의 지세와 방위, 대지의 모양, 채광과 환기, 구조, 마감재, 각 방의 위치와 가구 등, 그는 주택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꼼꼼하게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일제강점기 건축이라는 한계는 어쩔 수가 없었다. 민가에 없던 현관을 도입한다든지, 실내에 복도를 만들어 방들을 배치하는 방식은 일본식 영향이었다. 문화주택 풍에 조선의 온돌과 일본식 평면, 서양식 구조와 재료를 절충하는 방식도 다른 조선인 건축가들과 유사했다.
어쨌든 그의 초심은 살아 있었다. 1950년대 그가 대한주택영단 이사가 되었을 때 10평대 국민주택 등 공영주택을 건설하고 보급했다. 새마을 기술봉사단 중앙 회장이었을 때에는 농촌지역 주택개량 사업을 펼쳤다. 오래 전 주거 향상책을 세우겠다던 초심이 그렇게 연결되었다.
그는 과학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와세다대학 재학시절에는 조선인 유학생들과 '사이언스 클럽'을 만들었다. 그들은 방학이면 귀국해 '고려공업회'라는 이름으로 순회강연을 하며 일반인들에게 과학지식을 보급했다. 철도국에 재직할 때는 박길룡과 함께 '조선공학회'의 간사로 당선되었다.
그렇게 다양한 활동을 했던 그가 훗날 가장 뿌듯해하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일제강점기에 한옥형 철도역사(驛舍)가 자신의 건의로 세워졌다는 것. 조선의 문화라면 폄하하기에 바빴던 총독부가 한옥형 철도역사(驛舍)를 지은 적이 있었다.
북청역사(1927), 수원역사(1928), 서평양역사(1929), 전주역사(1929), 남원역사(1931), 남양역사(1933), 경주역사, 내금강역사 등.
그때 그가 조선 문화재 애호가였던 일본인 상사를 설득한 내용은 이랬다. 역사(歷史)적인 지역에 한옥형 역사(驛舍)를 지으면 조선인들에게는 익숙한 형태라서 위화감이 덜고, 일본인에게는 이국적인 정취로 철도 여행객을 더 많이 유치할 수 있다. 그러자 일본인 상사가 일리가 있다며 어디 몇 군데 해볼까, 하며 지은 것이 수원, 전주, 남원, 경주 등의 한옥형 역사였단다. 그는 그 에피소드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왜정시대에 한국정신이 들어있게 된 것이 지금 생각해도 후련했었다"고(김윤기, 남기고 싶은 이야기, 대한건축학회지, 1975.8.).
하지만 이것은 정확한 이야기가 아니다. 총독부는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철도를 활용한 관광 사업을 계획했다. 철도국장은 지방의 특색에 맞게 한옥형 역사를 채용하자고 주장했다. 김윤기가 철도국에 입사하기 전에 지어진 한옥형 역사도 있었다.
물론 그는 입사 후에 신축된 한옥형 역사 공사에 참여했을 것이다. 기억의 왜곡 혹은 과장, 어쩌면 출세한 사람이 자서전을 쓸 때처럼, 뭔가 아쉽고 변명하고 싶은 시절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한옥형 역사(驛舍)는 여러 의미가 중첩된 건축이었다. 조선인 건축가에게는 민족성의 코드였고, 일본인 건축계장에게는 이국정취를 활용한 이윤의 코드였다. 한옥형 역사를 짓기 위해서는 일제 때문에 해체된 전통건축 장인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니 일제가 정책적으로 소외시킨 전통건축장인에게는 제도권 내부로 개입할 수 있는 기회의 코드였다.
건축적으로 봐도 그렇다. 철도역사라는 근대적인 공간을 전근대적인 전통 양식으로 만들었다. 대형 공공시설을 한옥형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신재료와 공법도 채택되었다. 어찌 보면 한옥형 역사는 식민지의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무난하게 타협할 수 있었던 건축이다.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 진출하는 분야는 건축설계, 구조계산, 시공, 공무원, 공기업 등이다. 김윤기는 철도국에서 건물의 레이아웃부터 설계와 시공 일체를 맡았고, 건축구조에 관한 글도 발표했다. 그 후엔 공기업에도 있었고 행정가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건축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셈이다.
그런데 정작 그의 작품도, 그가 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건축도 거의 없다. 오늘날 건축역사가가 아니라면, 후배 건축가들은 그를 모른다. 덜 출세하고 덜 유명했어도 작품을 남긴 건축가는 간혹 기억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