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맞아 여행을 떠난다는 친구들이 부럽지 않다. 인천공항을 가득 매운 사람들의 모습에도 별 느낌이 없다. '저 사람들은 어딜 저리 가나' 하는 궁금증이 잠시 구름처럼 머릿속을 떠다니다 사라질 뿐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방바닥에 배 깔고 누워 책이나 읽는 게 최고의 여름휴가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않는가.
머리 위에선 앙증맞은 선풍기가 연신 시원한 바람을 내뿜는다. 옆구리 옆에는 방금 얼음을 띄운 시원한 수박 화채가 놓여 있다. 그 아래엔 아담한 크기의 천도복숭아 두 개가 대기 중이다. 내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고, 나는 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다. 이만하면 완벽한 세팅 아닐까. 이 세팅은 얼마 전부터 줄곧 그려온 내 여름휴가 모습이다.
너도나도 휴가를 떠난다는 '7말8초'. 이맘때쯤 나만의 여름휴가를 맞이하고 싶었다. 예전에는 '여름휴가'라고 하면 왠지 어디라도 꼭 가야 할 것 같아 애가 타곤 했다. 그래서 어디라도 꼭 가곤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든 대개 너무 더웠고, 사람이 많았으며, 결국엔 너무 지쳐 휴가 아닌 휴가가 되기 일쑤였다. 반복된 실패 끝에, 내가 알게 된 건, 역시 더운 날엔 집에 누워 선풍기 바람이나 맞고 있는 게 '장땡'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그 어떤 고민도 없이 여름휴가를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최대한 널브러져서 최대한 느슨하게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기로 한 것이다. 준비물은 네 가지면 됐다. 선풍기, 책, 맛있는 과일 그리고 나.
읽기로 미리 찜해 두었던 책은 예전에 한번 읽은 적이 있던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었다. 밤에는 별을 보며 강을 따라 이동하고, 낮에는 수영과 낚시로 시간을 보내던 허클베리 핀(아래 헉)과 짐이 생각나서였다. 이 책을 읽는 때만큼은, 지글지글 끓는 도시 속 아파트 내방에서 미시시피 강 위를 둥둥 떠가는 뗏목 위로 사뿐히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내 옆에는 헉과 짐도 대자로 누워있겠지.
드디어 나만의 여름휴가가 찾아왔고 난 계획대로 방에 엎드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어 내려갔다. "<톰 소여의 모험>이라는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 나에 대해 잘 모를 겁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책은 헉의 목소리로 헉과 짐의 모험을 다룬다.
아버지로부터 도망친 헉, 주인으로부터 도망친 흑인 노예 짐. 둘은 미시시피 강을 따라 뗏목을 타고 남쪽으로 두둥실 떠내려 간다. 길고 긴 여름 낮과 밤. 갖은 모험을 두루 거치며. 자유를 찾아 저 멀리.
다시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건 비단 너무 덥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민하고 재치 있는 헉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읽는 사람의 가슴마저 뻥 뚫어주는 타고난 말솜씨. 배웠다는 어른들 혼을 쏙 빼놓을 만큼 뛰어난 직관력과 지혜. 거짓말이란 외피 속에 곱게 자리 잡은 인간을 향한 따뜻한 연민. 모순과 이기로 가득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어린 헉은 밤하늘 별처럼 빛이 났다.
도망 노예 짐을 대하는 헉의 모습은 다시 읽어도 얼마나 귀엽고 매력적인가. 노예가 도망치길 돕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헉은 착하고 선량한 짐을 결코 배반하지 못한다. 세상의 법을 따를 것인가, 친구와의 우정을 지킬 것인가.
결국 헉은 '나쁜 짓'을 하기로 한다. 도망 노예를 숨겨주기로 한 것이다. 기독교 교리대로라면 이로 인해 헉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지만, 헉은 그저 이렇게 중얼거리고 만다.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무서운 말"이지만 친구를 위한 일이니 "내뱉은 말은 취소하지 않"기로 재차 다짐하면서.
모험을 부르는 건 언제나 헉의 호기심이었다. 헉의 호기심은 절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모험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듯 이어졌다. 나도 둘의 옆에서 둘이 저지르는 아슬아슬한 모험의 공모자가 되어 함께 미시시피 강을 헤엄쳐 나간다. 가능하다면, 이 모험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면서.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나는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아직 내 여름휴가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일도 가장 더운 오후 시간, 배를 깔고 누워 헉과 짐을 만날 예정이다.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이 책에서 동기를 찾으려는 자, 교훈을 찾으려는 자, 플롯을 찾으려는 자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그저, 재미만 느끼면 된다는 말이지 않을까. 하긴, 모험에 재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이 더운 날, 재미있는 책 한 권 읽는 것 외에 뭐가 더 좋을까.
덧붙이는 글 | <허클베리 핀의 모험>(마크 트웨인/민음사/1998년 08월 05일/1만1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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