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육부에서 추진하는 평생교육 단과대학 신설 사업에 참여한 이화여자대학교의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 추진에서 촉발된 학교와 재학생 및 졸업생 간 갈등은 결국 학생과 동문들의 주장이 관철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으로 대학교에 대한 예산 지원을 무기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는 교육부의 교육 행정에 대한 비판 여론이 새로이 생겨났다. BK 21부터 시작해서 의전원과 치전원 설립에 대한 예산 지원 인센티브 부여와 WCU 사업을 거쳐 코어와 프라임 사업까지. 교육부는 학령인구 감소와 대학 신입생 인구 감소를 이유로 자율성이 강조되어야 할 대학의 교육 시스템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간섭을 해왔다.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 글에서 주로 다룰 내용은 아니므로 차치하자.
2.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 추진과 관련한 중요한 반대 논리 중 하나는,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 아니라 재단이며, 학생은 재단이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를 제공받는 소비자"라는 것이다. 이는 합당한 주장이며, 대법원 판례에서도 학생은 대학교의 구성원이 아니라 외부인임을 적시한 바 있다.
그렇지만 교육과 관련해 학생을 단순히 소비자로만 여기는 것은 무언가 깔끔하지 않은 느낌을 준다. 과연 학생은 일개 소비자에 불과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에 불과한 선생님들에게 매년 스승의 날에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부르면서 감사하는가? 대학교 교수들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에 불과할 뿐 선생님이 아닌가? 우리가 대학교 교수들은 '선생님'이 아니라 '교수님'이라 일반적으로 호칭하는 것은 이러한 인식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들을 가져봄 직하다.
대학은 단순히 '교육 서비스' 판매하는 곳 아냐4. 만약 학생들이 소비자라고 가정을 해보자. 그렇다면 대학 교육의 제일 고려사항은 학생들의 니즈가 된다. 교수회의에서의 커리큘럼 구성이나 학생의 성적을 평가하는 교수들의 고유 권한은 '소비자 권리'라는 전가의 보도 앞에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있다. 꼭 필요한 과목을 깐깐하게 가르치고 평가하는 교수의 강의는 학점을 중시하는 학생들에 의해 외면될 가능성이 높고,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학점을 잘 주는 교수의 강의는 학생들이 몰릴 가능성이 높다.
물론 학문적 업적을 평가해 이루어지는 종신재직권(tenure) 등은 교수들의 고유 권한으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제도가 언제까지 수요자의 니즈와 분리되어 이루어질지도 의문이다. 예컨대 정말 인기 있는 교수가 있는데 연구업적 미비로 종신재직권 심사에서 떨어져서 다른 학교로 이직해야할 경우, 학생들의 반발을 무시할 권리를 교수회의 혹은 대학본부에서 주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5. 이러한 문제는 대학이 단순한 교육 서비스를 판매하는 기관이 아닌, 학문 연구와 교육과 학문 후속 세대 양성 등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만 하는 대학의 복합적인 본질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대학의 본질에 대해 데이비드 커프(David L. Kirp)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 있다
"진정한 대학, 최선의 대학이 가지고 있는 대학정신은 시장체제에서 환영받는 가치와는 무관하다. 대학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대학의 가치는 학자들의 공동체라는 믿음, 소유의식(ownership)보다는 개방성(openness)을 추구하는 정신, 진리 탐구자로서의 교수, 학생은 구매 욕구를 만족시켜주어야 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아직 특정 색깔을 띠지 않은 동자승(acolyte)과 같은 신참내기라는 개념 등에서 나온다(David L. Kirp(2003), Shakespeare, Einstein, and the Bottom Line : The Marketing of Higher Education을 독고윤(2013), '대학이란 무엇인가' 파워포인트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
6. 대학의 이러한 본질에서 다른 무엇보다 우선해서 추구되어야 할 가치는 "학문적 수월성(academic excellence)"이다. 대학에서는 더 많이 연구하고, 더 훌륭한 연구 업적을 남긴 학자가 존중받으며, 나이나 근속연수가 아니라 연구 업적에 의해 학자로서 교수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다. 학생들에 대한 교육 역시 그들을 사회에 진출해 활약할 인물이자 학문 후속 세대로서 교육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한 교수가 더 잘 가르친다"는 법칙이 통용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 내 의사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7. 대학의 의사결정 구조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의 의사결정은 민주적이지 않다. 정교수, 부교수, 조교수로 나뉘고, 총장을 비롯한 보직교수와 그렇지 않은 교수로 나뉘며, 교수, 직원, 학생으로 나뉜다. 대학의 본질은 학문적 수월성의 추구이기에, 의사결정 구조 역시 그러한 학문적 수월성을 추구하기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학문적 수월성의 추구라는 목표에 1인 1표라는 민주주의 원칙은 다소간 유보된다. 물론 학생회로 대표되는 학생자치, 교수회로 대표되는 교수들 간 협의체제, 직원노조로 대표되는 대학 구성원으로서 교직원, 그리고 대학 구성원으로서 각 이들 집단의 대표와 보직교수 및 재단이 참여하는 대학평의회 등 개별 집단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마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과연 제대로 운영되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8. 이번 이화여자대학교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 추진을 둘러싼 갈등은 이러한 대학의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 셈이다. 당면한 갈등은 해결되었지만, 대학의 본질과 그 본질과 연결되는 대학의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논의는 유보된 상태다. 과연 한국 대학은 학문적 수월성을 추구하는 학문 공동체이자 교육 공동체, 그리고 개방성을 지닌 집단으로서의 가치를 추구하는가?
만약 추구한다면 그 공동체의 의사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교육 정책과 예산 지원을 결정하는 교육부에 의해 대학 교육이 좌지우지되는 사태는 언제고 다시 발생할 수 있다.
9. 수백 년이 넘은 미국이나 유럽의 근대적 대학 교육에 비해, 한국의 근대적 대학 교육은 그 역사가 짧다. 가장 역사가 오랜 대학이 아직 200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길지만 세계적 기준에서 보면 짧은 이 한국 고등 교육의 역사에서, 학령인구의 감소와 대학 정원 감축 등의 문제가 이슈가 되는 지금이 대학 교육의 본질과 대학의 바람직한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최적의 시점이다.
이 논의가 선행되어야 대학의 구조개혁도, 대학 감축도,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선행되는 대학 교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화여자대학교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 추진 철회는 끝이 아니다. 이화여자대학교의 논의는 끝났지만, 한국 사회의 논의는 이제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