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원장군호국정신 선양회가 주최하고 전남요트협회와 손죽도어촌계가 주관한 이대원장군 항로탐사일정(7.30~7.31)에 참가하는 인원을 수송하는 선박은 국내유일 범선인 코리아나호다.
참가자들 중에는 전남요트협회회원 뿐만 아니라 키르기스스탄 출신 외국인 노동자 21명이 참가했다.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 북부에 위치해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이다.
키르기스스탄 노동자들이 코리아나호에 승선하게 된 계기를 만든 사람은 '카슴'이다. 2015년에 코리아나호가 원어민을 초대해 선상항해를 할 때 승선한 경험이 있는 카슴이 정채호 선장한테 "바다 구경을 못해본 친구들한테 바다구경을 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해 정 선장이 흔쾌히 허락했다.
"한국에서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쌀 공장 하고 싶다"
경남 창녕의 가구공장에서 3년째 일하는 카슴은 대학 졸업 후 엔지니어로 왔다. "키르기스스탄에서는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었는데 한국에 오니까 일자리가 많았다"는 그에게 "한국에 온 이유와 한국과 키르기스스탄이 크게 다른 점은 무엇인가?"를 묻자 그가 답했다.
"키르기스스탄은 90% 이상이 산지라 말과 소, 양을 기르는 목축업이 주종이기 때문에 일자리가 별로 없고 월급도 적어요. 월급이 한국의 1/5에 불과하고 물가도 1/5 정도 쌉니다. 키르기스스탄의 산은 정상부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만년설-돌산-푸른 산 순인데 한국의 산은 온통 푸른 산 입니다."키르기스스탄에는 바다가 없지만 프셰발스크라는 경상남도 크기의 호수가 있다. 바다를 처음보거나 처음으로 배를 탄 카슴 친구들은 웃통을 벗어젖히고 바다 수영을 즐겼다. 카슴이 친구들에게 좋은 기회를 준 정채호 선장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좋은 배타고 멀리 떨어진 섬까지 와서 우리나라 음식인 '아씨(ASH)'를 먹게 돼 기분 좋습니다. '아씨'는 우리나라 전통음식으로 쌀과 향신료 등은 키르기스스탄에서 공수해온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정채호 선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동영상을 촬영해 참가 못한 친구들에게 보냈더니 부러워했어요.""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밑천삼아 귀국하면 쌀 공장을 해보고 싶다"는 그는 "자동화된 한국 쌀 공장을 도입하고 싶다"고 말하며, 한국시골에 홀로 남은 어르신들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서울에서 좋은 직장을 가진 자식들이 부모님을 모시지 않고 일 년에 한 번 부모를 찾아오는 것은 잘못된 것 같아요. 이슬람 전통은 늙은 부모님을 모십니다. 장사하면 거짓말도 하고 얼굴에 가면을 써야하기 때문에 정직하게 농사지으며 쌀 공장을 운영하고 싶어요."여러 나라 돌아보고 여행사 차리고 싶다는 루슬란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슬란이 "영어할 수 있어요?"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입국한 지 두 달 밖에 안 된 그에게 "영어할 수 있다"고 하자 말문이 터졌다.
루슬란은 키르기스스탄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적에 상트테르부르크로 이민 갔다. 페트로콜리지 관광학과 3학년을 휴학하고 1년간 한국에서 일하기 위해 온 그는 대학생답게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한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 여행업을 하다가 여행사를 차릴 계획인 그가 입을 열었다.
"한국인들은 러시아 사람들이 무례하고, 알콜 중독자가 많고 부패가 만연한 나라로 알고 있지만 소수의 사람만 그렇습니다. 한국인들은 미국과 러시아 중 어느 나라를 더 좋아합니까?"질문에 웃음이 나왔지만 한국인들이 러시아보다 미국을 선호하는 이유를 정중하게 설명해줬다. 한국전쟁 당시 러시아와 중국은 북한을 지지했고 미국은 남한을 지지했다는 걸.
궁금한 게 많은 루슬란이 "한국인들이 장수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 한국인들은 채식위주의 식생활과 의료환경이 개선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주자 고개를 끄덕였다.
"80세까지 코리아나 운영하겠다"는 정채호 선장정채호 선장이 코리아나와 맺은 인연을 설명했다. 그가 요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전남대 여수캠퍼스에서 4년간 무역실무와 회계사 강의를 하던 그가 요트탈줄 알고 일본말을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요트선수를 인솔하고 일본 사가현 가라쯔시에 가게 됐다.
일본에서 돌아와 요트협회를 창단(1983년)하고 협회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옵티미스트급 5명 중 3명이 그가 길러낸 선수들이다. 그해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세계 옵티미스트급 요트선수권 대회 인솔단장으로 참가했었던 정 선장.
그는 전라남도 요트선수를 이끌고 전국체전에서 16년간 우승을 하기도 했고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를 여러 명 배출시켰다. 1994년도에 한국 해양대학교 요트부 동아리 담당교수로부터 코리아나호를 인수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구매 상담 중에 민선 초대 여천시장에 당선됐고 당선 이틀 후에 코리아나호를 인수했다.
정채호 선장은 바다 사나이다. 작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열린 세계 범선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여수에서 코리아나호를 타고 악명 높은 현해탄을 건널 때 비바람이 불고 배가 심하게 흔들려도 밤새워 키를 잡고 코리아나호를 운전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사람이 살면서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한테 요트를 배우라고 권하면 '물에 빠지잖아요'라며 지레 겁만 먹어요. 도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미국 노인 헨리(88)씨가 혼자 요트를 타고 세계를 두 번이나 돌았고 지금도 항해 중입니다. 원래는 77세에 그만두려고 했는데 헨리를 만나서 코리아나를 80세까지 운영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60년간 바다에 산 최영석 부선장... 바다는 내 영혼의 와이프코리아나호에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올 만한 최영석 부선장이 근무하고 있다. 올해 나이 84세. 멋진 마도로스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낀 채 배 구석구석을 돌며 점검하는 그의 인생관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
최씨는 1960년대 3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한국해양대학교에 합격해 해양대학교 실습선을 탔다. 졸업 후 해양대학교 실습선 선원이 된 그는 일본어로 된 배 부위의 모든 명칭을 영어로 바꾸기 시작했다. 영어를 잘해 병무국장실에 근무하기도 하고 해양대학 실습선 갑판장으로 근무했던 그는 한국에 배 문화가 정립되어 있지 않은 데 불만을 느껴 외국 선박회사에서 근무했다
노르웨이, 독일, 미국 등지의 외국 선박회사에서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영어를 잘할 뿐만 아니라 배에 관한 모든 자격증을 땄기 때문이다. "60년 동안 배타고 항해하며 돌아본 나라 수를 셀 수 없다"는 그는 부자가 될 기회가 많았다.
"IMF 때는 러시아에서 비행기를 팔아 달라, 알루미늄을 팔아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돈도 있었고 돌아다니기 싫어서 거절했어요."어느 날 부인으로부터 "돈 꾸러 다니지 않게 해줘서 고맙고 밥 차려 달라고 하지 않아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는 최영석씨는 "행복은 마음에 달렸어요. 백만장자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젊었을 적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왜 내 몸이 하나 밖에 안 되나, 할 일이 너무 많은 데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자신의 일은 안 하고 남 탓만 하는 세태를 안타까워 한 그는 "앞으로는 학력이 필요 없고 능력이 필요한 세상이 됩니다"라며 "자유는 내 맘대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책임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배는 내 영혼의 와이프"라며 "지금도 꿈이 있다. 우리나라에 큰 범선이 생기면 그 배에서 청소를 해도 행복하겠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영원한 바다사나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