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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보, 추어탕 맛있게 하는 집 아는 데 있어요?"
"오늘은 추어탕이에요? 그놈 식성이 무던하려나 보네. 추어탕까지 찾는 걸 보니."

35년 전 일이다. 한창 입덧을 하던 때라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곧잘 찾아다녔다. 그날 남편이 얼른 외출 준비를 하고 나를 데리고 간 곳이 송파구 삼전동에 있는 유명하다는 추어탕 집이었다. 그때까지 먹어본 추어탕은 고작 다섯 손가락으로 꼽아도 손가락이 남을 정도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어릴 때 할머니께서 끓여주시던 맛이 아련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곱게 간 미꾸라지에 무시래기를 듬뿍 넣고 묵은 된장을 풀고 끓여서 알싸한 산초가루를 솔솔 뿌려 먹는 맛을 떠올리니 입안에 군침이 절로 돌았다. 기대를 잔득하고 추어탕을 주문했다.

추어탕이 나왔는데, 이게 웬일인가! 허연 배를 희뜩 뒤집고 뚝배기 안에 모로 누운 미꾸라지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생전 처음 본 통미꾸라지 추어탕은 충격이었다. 나도 몰래 뒤로 물러앉으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엄마야 이기 뭐꼬!"

주변의 손님들은 무슨 일인가 하며 힐끗거리기도 하고 수군거리기도 하는데 정작 주인은 관심조차 없었다. 남편이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나가자고 했다. 숟가락도 안 댄 음식 값을 치르고 그냥 나왔다. 그런데 얼마나 놀랐는지 배 속의 아기가 똘똘 뭉쳐서 배가 딱딱하고 많이 아팠다. 집에 와서 한참 시간이 지나고 진정이 되자 배는 풀렸지만 그 후로 나는 추어탕을 안 먹었다.

그 일이 있은 지 30여 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대수술을 몇 번 했다. 주위의 사람들 말이 '병 회복에 추어탕이야말로 가격대비 영양가가 높은 음식'이라며 권하기에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자주.

'거룩한 손'을 가진 어머니

전남 장성에 와서도 근교에 있는 추어탕 집을 두루 섭렵하던 중에 역시 귀촌한 이웃의 추천으로 담양까지 가게 되었다. 우리가 간 곳은 '강의리추어탕'. 그곳의 특징은, 직접 띄운 메주로 담근 된장으로 추어탕을 끓이고, 밥은 조그만 압력밥솥에 하는데, 금방 한 밥을 밥솥째 갖다 준다. 밥을 다 푸고 나서는 물을 부어 숭늉을 끓여서 마시는데, 가스레인지까지 밥솥을 가지고 가서 숭늉을 끓이는 것까지 손님들이 직접 한다. 조금 수고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의 맛이 있다.

며칠 전에도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젊은 남정네와 인사를 하게 됐다 "이 집 사장님이세요?" "아니요, 사장님은 저희 어머니예요" 등의 얘기를 나누다가 나는 그 자리에서 어머님과 인터뷰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명함을 주고받았다.

얼마 후 다시 강의리추어탕을 찾았다. 안내를 받고 들어가서 방안을 살펴보니 우리나라의 3대 TV 방송국에서 하는 맛 탐방에 다 소개가 된 집이었다. 내가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추어탕 때문이 아니었고, 유명해서는 더욱 아니었다.

오로지, 아들과 잠깐 나눈 대화 중에 어머니를 꼭 만나고 싶다는 마음 하나에서였다. 가지고 간 인터뷰 질문지를 들여다보며 잠시 방안을 서성이고 있는데 강단 있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아들도 그 옆에 앉았다. 간단한 인사를 드리고 인터뷰 질문지를 할머니께 드렸다. 할머니 앞에 놓은 질문지를 아들이 슬그머니 가지고 가서 살폈다. 할머니와 몇 마디 대화 중에 느낌이 왔다.

'아! 이분과는 형식적인 모든 것은 접어야겠구나!'

먼저 호칭을 '어르신'에서 '어머니'로 바꾸었다. 그래도 속을 내 주시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사진이나 몇 컷 찍고 아들과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좀 찍자고 해도 좋은 말로 거절하셨다. 그 순간, 어머니의 손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주 크게 확대돼서. 나는 나도 몰래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울컥하며 명치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그 손을 쓰다듬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겨우 한마디 했다.

"참 거룩한 손이네요. 정말 거룩한 손이네요."
"무슨, 거룩하기는 뭐가!"

어머니의 손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한 거룩한 손
어머니의 손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한 거룩한 손 ⓒ 김경내

나는 여자의 그런 거룩한 손을 두 번째 봤다. 첫 번째는 8남매를 농사지어서 키우고 대학 공부까지 시키신 우리 시어머님의 손이다. 시어머님의 손은 험하기가 이를 데 없었고 손가락 마디 굵기가 남자 일꾼들 같았다. 열 개의 끝 마디는 다 꼬부라져서 펴지질 않았다. 철없는 이 며느리는 시어머님의 손가락을 들여다보고 신기해하며 물었었다.

"어머니 손가락이 왜 이래요?"
"새끼들 공부 시키느라고 땅을 하도 파서 그렇제."

시어머님 돌아가신 지 23년이 됐건만 가끔 생각나는 손이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은 손을 강의리추어탕집에서 본 것이다. 그 손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고 80평생을 살아온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 손은 '나 이렇게 살았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뭐라고 표현조차 하기 어렵다.

특히 '어머니'에게 약한 나는 그만 질문의 맥을 잃어버리고 덤벙덤벙 느끼는 대로 가슴이 시키는 대로 물었고, 나의 그런 마음이 통했는지 어머니는 서서히 마음의 문과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최금순 할머니가 추어탕집을 운영하는 법 

메주 강의리추어탕에서 직접 담근 메주를 손질하고 있다.
메주강의리추어탕에서 직접 담근 메주를 손질하고 있다. ⓒ 김경내

주인공 최금순 할머니, 80세. 글에서는 호칭을 어머니라 부르려고 한다.

최금순 어머니의 친정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는 집이었는데도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한글도 깨우치지를 못했다. 그 시절엔 '여자는 글을 배우면 시집가서 고생스러운 일을 시시콜콜 적어서 친정으로 편지를 한다'는 이유로 딸들은 한글도 가르치지 않는 수가 있었다. 지방이 전혀 다른 나의 할머니께 똑같은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인터뷰 질문지를 아들이 슬그머니 가지고 갔던 이유를 알았다.

어머니는 같은 동네의 청년을 만나 결혼을 했고 7남매를 낳았다. 남편은 한량이었고 사업가였다. 하지만 하는 것마다 실패를 했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가계를 꾸려가야만 했다. 300평이 넘는 집을 활용해 누에를 치기 시작했다. 일 년에 80장의 누에를 치자면 누에치는 아가씨들만 30명이 넘었다. 80장의 누에가 먹어대는 뽕을 대기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30마지기 뽕밭에 뽕나무 접목까지 손수 다 했다. 19년을 누에를 쳐서 자식들 공부를 시키고 남편 뒷바라지도 계속했다. 그렇게 허리 펼 시간 없이 일을 하는데도 남편은 늘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남편 친구들을 대접하느라고 음식을 만들어 대다보니 자신도 몰래 음식 솜씨가 늘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인생 2막이 시작됐다. 나고 자란 강의리에서 추어탕집을 하게 된 것이다.

"메주를 직접 띄워서 담근 된장으로 끓인 추어탕 맛도 일품이지만, 압력밥솥 밥맛이 정말 좋아요. 어떻게 압력밥솥째 손님께 내갈 생각을 하셨나요?"

"식당을 하기 전에 가끔 외식을 해보면 밥맛이 문제였어요. 문제는 압력밥솥에서 잘 지은 밥을 퍼서 온장고에 넣었다가 내 주는 거였어요. 그걸 보고 내 집에 돈을 내고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에게 어떻게 특별난 대접을 할까 고민하다가 밥이라도 맛있게 먹이자 싶어서 그때그때 한 따뜻한 밥을 밥솥째 내갈 생각을 했지요."

화제의 압력밥솥 밥 조그만 압력밥솥에 금방한 밥을 밥솥째 손님 상에 낸다.
화제의 압력밥솥 밥조그만 압력밥솥에 금방한 밥을 밥솥째 손님 상에 낸다. ⓒ 김경내

"어머니의 그 마음이 지금의 강의리추어탕을 만들었겠네요. 자녀들 공부는 누에쳐서 시켰고, 추어탕집은 어떻게 운영을 하시는지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어서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재산이 많든 적든, 자식이 둘만 돼도 유산 분배 문제로 시끄러워지기 일쑤인 세상이다. 아래는 어머니께서 현명한 방법으로 자녀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는 방식이다.

어느 날 어머니가 초상집에 문상을 가게 됐다. 그곳에서, 영정 앞에서 유산 때문에 자식들이 싸우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 내가 죽고 난 후에 내 자식들이 유산 때문에 싸우는 일은 없게 해야 되겠다. 그러자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를 고민하다가 이 방법을 택했다.

"같은 조건에서 똑같이 분배하는 방법은, 똑같이 강의리 추어탕을 2년씩 운영하게 했어요. 2년 동안 나는 일만 도와줄 뿐 금전에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어요. 얼마만큼의 수익을 내느냐는 각자의 몫이지요. 그러니까 더 열심히 일하고 질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맛을 내는 데 최선을 다하더라고요. 그렇게 차례대로 2년간 추어탕 비법도 배우고 돈을 모아서 자기 마음에 드는 장소를 물색해서 제2, 제3의 강의리추어탕집을 운영하고 있어요. 첫째와 셋째는 싫다고 해서 다른 일을 하고 있고요. 이곳은 이제 마지막으로 맏아들에게 물려줬어요. 그렇게 해서 재산 분배에 대한 해결을 했어요. 각자가 능력껏 일해서 가져갔으니 다툼이 없고 우애도 좋아요. 다들 만족할 만큼 추어탕집 운영이 잘 돼서 참 다행이에요."

"지금은 아예 일에서 손 떼셨나요? 일을 놓으면 어머니 앞으로 수입도 없을 텐데 서운하지 않으세요?"

"일은 도와주고 있지만 맏아들 앞으로 서류로 된 거는 다 넘겨줬어요. 내가 지금 돈 필요할 일이 뭐 있겠어요. 무소유! 훌훌 털고 나니 마음이 이렇게 편한 걸. 7남매 중에 5남매가 추어탕집을 하네요. 다행히 7남매 다 추어탕을 한다고 안 해서 참 다행이에요 7남매가 다 추어탕을 해 봐요. 창피하지."

어머니 말씀대로 7남매가 다 추어탕집을 운영한다고 해도 하나도 창피할 것이 없다. 오히려 대견한 일일 것이다.  지금 강의리추어탕을 물려받은 맏아들(둘째) 전준우씨는 현직 광주 MBC방송국 보도국 뉴스PD, 생방송 총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인터뷰를 하는 날도 야간근무를 하고 아침에 퇴근을 해서 반바지에 면셔츠를 입고 식당일을 돌보고 있었다.

"존경하는 어머니... 못 배우셨지만 자식들에게 사람의 도리 가르쳐줘"

모자 자식에게 존경받는 어머니 최금순님과 세상에서 어머니를 제일 존경한다는 맏아들 전준우씨
모자자식에게 존경받는 어머니 최금순님과 세상에서 어머니를 제일 존경한다는 맏아들 전준우씨 ⓒ 김경내

맏아들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이 식당을 이끌어갈 것인가 하고. 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계속해야지요. 단순히 어머니께서 일구어 놓으신 터전을 넘어서, 아랫녘에서는 뭐니뭐니해도 강의리추어탕이라는 자부심을 저희 형제들에게 심어 주셨어요. 저희 집에 오시는 손님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살림나간 형제들도 월매출 1억이 넘는 곳도 있고, 못해도 5~6천은 다 넘어요. 이곳 매출이 아직은 제일 많지요."

"효자네요. 어머니께서 보람을 느끼시겠어요."

"효자 아니에요. 제가 고3때 어머니 속 썩인 거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하기만 한 걸요."

그 사연은 이랬다. 고등학교 3학년, 사월초파일이었다. 공휴일이고 해서 광주에서 함께 자취를 하며 여고에 다니는 셋째 여동생과 서울 사는 누나한테 놀러 갔다. 금방 갔다 올 생각으로 어머니께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갔다. 그런데 내려오려고 보니 5.18광주민주화운동이 터져서 광주로 가는 차가 없었다. 전화도 불통이었다. 그렇게 서울에서 한 달이 넘게 어머니께 아무 소식도 못 전하고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어머니는 아들이 광주에서 죽은 줄 알고 시체를 찾아 다녔단다. 본인 어깨에 있는 점을 보여주며 전준우씨는 말했다.

"남자 시체를 뒤지며 어깨에 점이 있는가만 확인을 하셨대요. 하루는 시체를 찾아다니다가 지쳐서 제 자취방에 막 들어가서 털썩 주저앉아 있는데 주인댁 딸이 와서 옥상에 같이 올라가서 시내를 살펴보자고 하더래요. 그런데 하도 걸어 다녀서 다리에 맥이 풀려서 못 가겠더래요. 주인댁 딸은 혼자 올라갔고 조금 지나서 총소리가 들렸대요. 주인댁 딸이 총에 맞아 즉사를 했대요. 그때 어머니가 제정신이셨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준우씨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어머니를 세상에서 제일 존경해요. 많이 배우고 어리석은 부모보다, 못 배웠지만 저희에게 사랑을 가르치시고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신 어머니를."

말을 마친 전준우씨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머니는 양쪽 다리 관절염 수술을 해서 걸음이 시원치 않지만 여전히 식당일을 도와준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사신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나요?'라고 질문하자,

"한 많은 세상 살았지요. 지금은 한없이 살지만, 그래도 가슴 한 편에는 못 배운 게 한으로 남아 있긴 해요. 아직도 친정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하고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길가까지 나오셔서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신다.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그 거룩한 손을!


#최금순 #강의리추어탕#압력밥솥밥#어머니의 손#존경받는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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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시원한 청량제, 겨울에는 따뜻한 화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쓴 책 : 김경내 산문집<덧칠하지 말자> 김경내 동시집<난리 날 만하더라고> 김경내 단편 동화집<별이 된 까치밥> e-mail : ok_0926@daum.net 글을 써야 숨을 쉬는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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