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을 깨어 누워있는데 밖에 빗소리가 들린다. 아! 오늘도 걷기 힘들겠구나. 아침 6시 일어나 밖에 나와 보니 비는 그치고 서쪽 하늘에 달이 밝게 빛나고 있다. 참 다행이다.
오늘은 아소프라에서 레데시야 델 카미노까지 27Km를 걸을 계획이다. 숙소를 나서 밀밭길과 포도밭길을 걷는다. 9일 동안 밀밭길을 걷는데 경치는 비슷한 듯하면서 다른 풍경이다.
포도밭에는 농부들이 나와 포도순을 잘라주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넓은 포도밭을 언제 다 끝낼 수 있을까 괜한 걱정을 한다. 순 자르기는 기계로 할 수 없는가 보다.
비가 내린 후 걷기 좋은 밀밭길을 걷는데 길 양쪽에는 노란 유채꽃이 피어 있다. 그 유채꽃 줄기에는 달팽이들이 수없이 매달려 있다. 어떤 녀석들은 느리게 길을 건너고 있다. 비가 오고 나니 경치가 더 아름답다. 유채꽃 줄기에 매달린 달팽이를 찍고 있으니 순례객들도 따라 찍는다.
콧노래로 찬송을 부르며 걷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던 동양인이 "뷰엔 카미노" 인사를 한다. 나도 "뷰엔 카미노" 하고 인사를 했는데 속도를 늦추며 "한국인이세요?"라고 묻는다. 자전거에서 내려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천안에서 온 아버지와 아들인데 2주 동안 카미노를 달린다고 한다. 아버지를 따라 온 10대 아들이 대견하다.
비가 내린다. 배낭에 레인커버를 씌우고 비옷을 입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비를 만나는 게 제일 싫다. 불편하기도 하고 사진 찍기도 힘들다. 조금 걷다 보니 비가 그친다. 앞에 노인 한 분이 걷고 있다. "뷰엔 카미노" 서로 인사를 나눈다. 이 분은 프랑스에서 온 65세 아저씨다. 수염을 기르니 나이 맞추기가 힘들다. 이 분은 프랑스 집에서 부터 여기까지 걸어서 왔는데 한 달 걸렸다고 한다. 같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순례길을 걷다가 본 무지개밀밭길을 한동안 걷다 보니 골프장이 보인다. 몇 몇 사람들이 골프를 치고 있다. 리오하 알타 골프클럽이다. 그 옆에는 골프장 손님들을 위한 숙소가 있는데 관리가 되지 않아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골프장을 지나 조금 걸으니 제법 큰 도시 시루에냐가 나온다. 우린 바에 앉아 커피와 빵으로 허기를 채웠다. 서쪽으로 갈수록 날씨 변덕이 심하다. 오늘도 비가 오락가락하면서 여러 번 우의를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였다.
이렇게 비가 오락가락 할 때 풍경은 독특하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데 저 멀리 밀밭에는 햇살이 환하게 비추기도 하고, 우리는 햇살을 받으며 걷고 있는데 멀리 앞에는 먹구름이 무섭게 들판을 덮고 있을 때가 있다.
이런 변화무쌍한 날씨 덕에 무지개를 두 번이나 볼 수 있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무지개를 보다니, 우린 정말 기분이 좋았다. 우리 앞에는 독일 청년들이 힘차게 걷고 있다. 배낭이 우리보다 훨씬 크고 무거워 보인다. 그런데도 힘차게 걷는 모습이 부럽다. 역시 젊음이 좋다.
언덕을 오르니 십자가가 보인다. 우린 여기서 기념촬영을 한다. 언덕을 넘으니 산토 도밍고 칼사다 마을이 나왔다. 성당 옆을 지나다가 안으로 들어 갔는데 미사 중이다. 오늘이 주일이어서 미사가 있다. 성당 안은 미사를 드리는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유럽의 교회들은 건물만 크고 신자들은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성당을 나와 다시 밀밭길을 걷는다. 마을을 지나 2시간 정도 걸으니 멀리 레데시야 델 카미노 마을이 보인다. 마을에 도착하여 알베르게를 찾아 보니 성당의 일부를 알베르게로 사용하는 산 나사로 알베르게가 보인다. 이 알베르게는 저녁, 아침까지 제공하는데 기부제로 운영하는 곳이다.
알베르게로 올라가는 계단은 어둑하고 낡았지만 오래된 성당에서 자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어서 좋다. 또 잊지 못할 것이 하나 있다. 이 곳에서 침대를 배정 받으면서 순례자 여권에 스탬프를 찍는 곳에 손 그림을 예쁘게 그려 준다. 뒤에 성당과 겸한 알베르게에 묶을 때 마다 산 나사로 알베르게에서 손으로 그려준 스탬프를 보면서 엄지 손가락을 세워주던 일이 기억난다.
샤워를 하고 빨래까지 널고 나서 성당 앞 정원에서 일기도 쓰고 손톱 발톱을 다듬었다. 우리와 같이 걷고 있는 폴란드 여인도 일기를 쓰고 있다. 그녀는 담배를 꽤 즐긴다. 아소프라를 떠날 때도 창가에 걸터 앉아 담배를 피우며 떠나는 우리를 보고 인사를 했다.
각 국 순례자들의 장기자랑이 벌어지다친구와 둘이서 마을 산책을 하고 숙소로 돌아 오니 오후 6시, 순례자들이 식당에 앉아 있다가 주방에서 감자, 양파, 당근 등을 내어 주며 도와 달라고 한다. 순례자들이 하나 둘 달려 들어 감자, 양파, 당근을 다듬고 알맞게 자른다. 서로 대화하며 자신들이 먹을 음식 재료를 손질하는 것도 즐거웠다.
식당에서 요리를 하는 동안 미국인 남자와 아가씨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한다. 50여 명의 순례자들이 자연스럽게 둘러 앉아 손뼉을 치며 즐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자와 아가씨는 부녀 사이였다. 한참을 듣기만 하다가 알베르게 사무장이 나와 사회를 보면서 각자 소개하는 시간을 갖고 장기자랑 시간을 가졌다.
한국인도 다섯 명이 왔다. 미국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브라질인, 폴란드인 등등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어울려 손뼉을 치며 같이 노래하는 모습은 정말 즐거웠다. 나도 노래 한곡과 하모니카를 불었는데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 선상에서 연주되었던 찬송 '내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연주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온 순례자는 '오 솔레미오'를 불렀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따라 불러 가장 인기가 있었다.
즐겁게 놀고 있는 동안 요리가 완성되어 둘어 앉아 우리가 깎았던 감자, 양파 등을 넣어 만든 스프와 빵, 과일로 식사를 하고 와인으로 멋지게 건배도 하였다. 정말 멋진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