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에 개원한 우리 병원 인근에는 K자동차 공장이 있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일부 언론에서 종종 '귀족노동자'로 불리곤 한다.
작년 말 한 노동자가 우리 병원을 찾았다. 이 공장에서 10여 년간 일한 30대 후반의 남성 노동자로, 우측 어깨에 통증을 느껴 찾아간 병원에서 회전근개 파열이라고 진단을 받고 산재 처리가 가능할지 (업무 관련성 소견서 발급이 가능할지) 상담 차 내원한 것이다. 혼자 오신 것이 아니고 노동조합 담당자와 함께 오셨다.
진단이 비교적 명확해서 작업 공정상 어깨 부담 작업이 어느 정도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이 분이 어느 한 공정에서만 일했던 것이 아니라 부서 내 20개쯤 되는 공정에서 번갈아가며 일을 했던지라 전체 공정을 다 뒤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두 달 뒤 이 분이 다시 병원을 찾아 왔다. 이번에는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형님과 함께 오셨다. 일하는 부서 내 전체 공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각 공정에 어깨 부담 작업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각 공정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했는지 등에 대해 사진까지 첨부해서 아주 자세히 정리해 오셨다. 함께 오신 분의 도움을 받아 정리하신 것이라고 했다.
정리해온 자료를 다시 한 번 정리해서 업무 관련성 소견서를 작성했고 올해 1월 산재 신청을 했다. 4월에 산재 승인이 났고, 두 번의 연장 신청이 받아들여져서 8월 말쯤 종료 예정으로 현재 열심히 치료 중이다.
'귀족노동자'의 실체이 분과 함께 산재를 신청하고, 승인받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귀족노동자'의 실체를 좀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 병원에 처음 오셨을 때 이 분은 산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조합원들이 일하다가 다치거나 아팠을 때 필요하면 산재 처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노동조합과 산재에 대해 좀 아는 직장 동료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산재 신청조차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 산재 승인을 받았지만 처음 진단받았을 때부터 산재 승인까지 6개월이 걸렸으나 이 기간은 그나마 짧은 편이다. 나중에 전해 들은 얘기인데, 같은 부서 내에 아픈 분들이 또 있는데 잘 몰라서 혹은 회사의 눈치가 보여 그냥 적당히 개인적으로 치료받고 마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산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산재를 신청하려고 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헤매다 보면 산재 승인을 미끼로 접근하는 각종 브로커에게 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산재를 신청하더라도 승인되는 경우보다 불승인되는 경우가 많고, 그런 경우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겪게 된다고 한다.
회사에 찍히고, 브로커에게 돈 뜯기고, 동료들에게 꾀병 환자로 낙인찍히고... 노동조합도 없는 영세 사업장 노동자 얘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강성노조로 유명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얘기다.
이들에게 '귀족'이라는 수식어가 과연 온당한 것인가? 일하다가 다치거나 아팠을 때 제대로 치료받을 권리, 무슨 특별한 권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인 이 권리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귀족'이라니... 게다가 '귀족'이라고 불리는 노동자들의 처지가 이러한데, '평범한' 노동자들의 처지는 어떨까? 생각하면 그저 답답할 뿐이다.
이런 막막한 현실 속에서 이 분이 산재로 요양하면서 열심히 치료에 전념하며 건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조합원들이 일하다가 다치거나 아팠을 때 필요하면 산재 처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노동조합(단결)과 산재에 대해 좀 아는 직장 동료(지지)와 우리의 도움(연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괄호 안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정수 기자는 (사)공강직업환경의학센터 향남공감의원 원장입니다. 또한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에도 연재하였습니다.